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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사
고려조선
열성수교
항일의사

독립운동가

 

천호 (天浩 : 직제학공파 31세손)

 

의범(義範)의 외동아들로 1900년 2월 20일 평안북도 의주(義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발발하자 이에 참여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어 만주 봉천성 관전현(滿洲 奉天省 寬甸縣)으로 건너간 그는 오동진(吳東振)을 단장으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인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에 이용규(李龍奎), 김관봉(金寬鳳), 김광진(金光振) 등의 권유로 그 단체에 가입(加入)하여 활약하였다.

 

그리고 1919년 5월 18일,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단원인 김광진, 고학운(高學運)과 같이 의주군 가산면 도금동(都琴洞)의 김준석(金俊碩)에게 일금31원을 모금하였으며, 국내의 적기관 공격에도 활약하였다. 이후 다시 상해(上海)로 가서 1922년 10월 김구(金九), 여운형(呂運亨), 이유필(李裕弼), 조상섭(趙尙燮), 손정도(孫貞道), 김인전(金仁全) 등이 결성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에 가입하였다. 그는 한국노병회의 제7차 이사회(第七次理事會)에서 특별회원으로 의경대원(義警隊員)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또한 1924년 6월 5일에는 채군선(蔡君仙), 박희곤(朴熙坤)과 함께 낙양강무당(洛陽講武堂)에 유학하여 수료한 다음에는 임시정부(臨時政府) 경무원(警務員)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또한 공창렬(孔昌烈), 김상덕(金尙德), 박진(朴震), 변금파(邊錦波), 신국권(申國權), 신언준(申彦俊), 엄항섭(嚴恒燮), 윤소야(尹小野), 장덕진(張德震), 조덕진(趙德津), 최남식(崔南植), 최충신(崔忠臣) 등과 함께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를 발기하였다.

 

그후 독립운동계의 선전기관인 상해〈독립신문(獨立新聞)〉의 주간(主幹)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상해의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1926년 말경 이화익(李化翼)과 함께 재등실 총독(齋藤實總督)을 주살하고자 폭탄을 갖고 국내로 들어왔으나 나석주(羅錫疇)의 거사로 경비가 매우 엄중하여 실현치 못하였다. 그는 다시 만주를 거쳐 북경(北京)에서 활약하다가 결국 일경(日警)에 피체되어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3년 정부에서 그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1989년 2월 3일 별세.묘소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배위(配位)는 함평인(咸平人) 최경옥(崔京玉). 1911년9월23일생으로 기일과 墓所 미상.父는 최진섭(崔珍燮), 母는 李씨라고만 하였다. 외동아들 형국(亨國)이 있다.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8卷, 國家報勳處, 1990年, pp.259~260. 

 

註 ㆍ朝鮮民族運動年鑑 175,184面 

ㆍ高等警察要史 108面 

ㆍ民族獨立鬪爭史史料(海外篇) 128面 

ㆍ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國會圖書館 299,480,505,527,537,539,543,544,548,574面 

ㆍ思想情勢視察報告集 243面 

ㆍ思想情勢視察報告集(其2) 454面 

ㆍ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編) 8卷 472,537,860,868面 

ㆍ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359面 

ㆍ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286面 

ㆍ獨立運動史(國民報勳處) 4卷 413面 

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民報勳處) 11卷 803∼805面 

ㆍ獨立運動史資料集(國民報勳處) 14卷 570,924面 

 

  

 

독립운동가

 

최 린 (崔 麟 : 대령군파 29세손) 

자(字) : 공지(公之) 호(號) : 여암(如菴) , 고우(古友)

1878年(戊寅) 1月 25日生 ~ 납북

 

일본 명치대학 법과 졸업, 감찰서 주사, 보성중학교장, 3.1독립운동 주동 33인중 1인 3년 옥고, 매일 신문 사장, 대한체육회장, 천도교령, 1896年 19세에 함남 관찰부 집사가 되고, 1902年 개화당의 영수 박영호가 이끄는 활빈당(活貧黨)과 일본 유학 육사졸업생이 주동이 된 일심회(一心會)에 참가하여 정부의 개혁을 추진 중 불순세력으로 몰려 활빈당은 해산되고, 다수인이 체포되는 중 일본으로 피신해 있다가 특사 된 후 귀국하여 외부주사(外部主事)가 되었다.


1904년 다시 일본에 건너가 동경 부립 제일중학교(東京 部立 第一中學校)에 들어가 일본 유학생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고, 1906년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명치대학 법학과에 입학 1909년에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당시 일본 체류중에 손병희 선생을 만나, 후에 천도교(天道敎)를 신봉하게 되었고 3.1독립운동 주동자의 한 사람이 된 동기가 되었다. 한일합방 후 구국의 힘을 키우기 위하여 보성학원을 재건하여 보성중학교장직을 수행하면서 신민회(新民會)에 가입 하여 항일 구국운동에 투신하였다.

 

3.1 운동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 옥고를 치렀다. 옥고를 치른 후 세계 속의 조선이 살아 갈 길을 찾기 위하여 구미(歐美) 여행을 다녀와서 1928년 천도교 도령이 되었다. 백만 교도의 우두머리가 된 선생에게 내려진 일제의 압력으로 "측임참의"라는 올가미를 쓴 선생은 도탄에 빠진 창생(蒼生)과 천도교를 살리기 위하여 일제의 요구를 끝까지 거절 못하고 변절자란 오명(汚名)을 받는 희생양이 되었다. 그러나 철인 성자(哲人聖者)의 현실 도피의 길을 모를리 없지만, 북의 남침에도 피난을 거부하고 불우한 백성들과 함께 있다가 납북(拉北)의 비운을 맞은 선생의 절개와 애국 애족 지심은 독립운동가로서의 본분(本分)을 다하고 위상(位相)을 높인 단면이라 평가할 수 있다.

 

  

 

애국지사

 

최익환(崔益煥)

 

선생은 1890년(고종6년) 2월12일 충남 홍성군 홍주면 옥암리에서 아버지 동욱(東昱)公과 어머니 청주한씨 사이에서 동학을 신봉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海州崔氏 文貞公派 31世孫이며 호(號)는 역전(力田)이다.

 

선생의 아버지는 동학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고, 어머니는 남편이 옥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서대문형무소 옥문앞에서 순종(殉從)하였다. 혁명가의 가정에서 출생한 선생의 천성은 강직하고 투지가 강할뿐 아니라 기골도 장대하였다.

  

 

선생은 7세부터 13세까지는 향리의 서당에서 국학과 한문을 수학하였고, 16세부터 18세되던 봄까지는 경성 광무일어학교에서 중학속성과정의 일본어를 수학하였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일본의 세력이 날로 치솟는 당시의 세류로 보아 일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중요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그런 선생의 생각은 정확하여 광무일어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5월 종사도량형 사무국의 통역관으로 취직하여 1년간 근무하다 1908년 탁지부(度支部) 세무주사의 사령을 받아 충남 서천군 재무서 주사로 보직되었다. 서천 재무서로 부임하는 길에 자신의 본가인 홍성 옥암리를 찾았으나 3년전인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데 분개한 홍주의 전 참판 민종식이 의병 500명을 이끌고 거병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홍주일대는 의병가담자 색출 등의 이유로 일본군의 말발굽 아래 갖은 핍박으로 초토화가 되었고 의병장 민종식도 그해 11월 체포되어 모진고초를 당하였다. 고향을 떠날때와는 달리 황폐화된 고향의 모습은 선생에게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충격을 주었으며 가슴에 큰 못을 박았다. 그런 고향을 뒤로하고 서천에 세무주사로 부임한 이후에도 선생은 자책의 쓰라림을 품고 어언 2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무언가를 결심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오랜 지기인 전협(全協)을 만나 민족운동의 길을 모색하기로 하였다. 그러던 중 민족운동자금으로 사용하기 위해 공금을 횡령한 사실이 서산 헌병대에 발각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선생의 나이 만19세 그 아까운 20대의 한창일할 나이를 컴컴한 서대문형무소에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평생을 통한 선생의 애국운동은 처음부터 고역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1915년 8월 29일 선생이 잔여형기 1년여를 앞두고 출옥했다. 출옥 후 전협과 함께 간도와 만주를 거쳐 상해의 임시정부와 교감을 갖고 1919년 2월 서울로 잠입하여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하고 같은 해 5월초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일명 대동단(大同團)이란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였다. 당시 기미독립운동으로 일경의 경계가 삼엄하였으나 종교계, 상공계, 불교계, 군인측, 노인층, 여승계 등 각계의 조직책을 규합하는데 성공하였다. 당시의 시대상황은 9년 전인 1910년 대한제국이 합병되고 고종(高宗)황제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義親王)이 공(公)으로 강등되어 이강(李堈) 공(公)이라 칭했는데 1919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일경의 철저한 감시와 핍박으로 이화궁에 거의 유폐되어 있는 실정이었다. 이에 대동단은 상해 임시정부로 탈출시켜 황족인 의친왕이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조선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사실을 알림으로써 임시정부의 위상 확립과 민족의 독립의식을 더 한층 돈독히 하고 대외에 조선의 독립을 주장할 적임자로 삼고자 탈출계획을 세워 철저한 준비 끝에 실행하였으나 이화궁을 거울 들여다보듯 감시하는 일경들에게 이화궁에서 의친왕이 없어진 것이 탈로나 탈출도중 의주 안동현에서 체포되어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 사건으로 대동단의 실체를 알게된 일경에 의해 대동단은 단원 대부분이 체포되어 해체되었다. 선생도 체포되어 6년형이 선고됐다.

 

1926년 2월 출옥하여 다음 해에 김좌진 선생과 서울에서 광복단운동을 비밀리에 추진하다 적발되어 김좌진 선생과 함께 종로 구치감에 1년간 구금되었다 석방되었다. 이후 광복단 본거지를 만주로 옮길 것을 결정하고 1928년 만주로 잠행하여 김좌진 선생은 군사실력 양성을 담당하고 선생은 교육과 산업을 통한 문화실력양성을 담당하여 1937년까지 광복단운동에 투신하여 활동하다 만주사변이 돌발됨에 1937년 일본영사관 경찰에 1년간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고 1944년에 서울과 개성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대고려재건당의 비밀조직을 진행하다 체포되어 고초를 격다 석방되었고 해방되기 직전 임시정부의 청년들과 인민정치당을 만들었으나 예비검속으로 구금되었다가 해방되어서야 석방되었다.

 

해방 후 인민정치당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하여 신한민족당이 국민당과 합류됨에 따라 한독당 중앙 상무위원에 피선되었고 다음 해에 민주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한국동란 중에는 미군 극동군사령부 측의 휴전협상 비밀요원으로 평양에 밀파되었다가 1년 6개월 후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후 이 나라의 혁신운동에 투신하여 1957년 10월 민주혁신당이 창당되어 통제위원장에 피선되었다.

 

선생은 침략자에 대항하여 투쟁하다가 투옥되고 석방되면 투쟁을 계속하면서 시종일관 애국운동을 지속하여온 가장 철저한 혁명적 투사의 생활가운데서도 신학문(新學問) 학습에 힘써 28세되던 해에는 일본의 명문 와세다대학 강의록을 통한 교외생(校外生)으로서 정치 경제과를 필업(畢業)하였으며 또 어학에도 전력하여 마침내는 일어, 중국어와 함께 영어까지 능통하였으니 선생의 조선독립을 위한 지칠줄 모르는 투쟁과 학업에 대한 깊은 탐구정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남음이 있을 것이다. 19세의 소년시절부터 일생동안 오로지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몸이 부서지도록 진력한 애국지사 최익환(崔益煥)선생은 1959년 7월 21일 향년 70세로 서울 성북구 돈암동 골짜기 토막에서 쓸쓸히 타계하였다. 장례는 동지장(同志葬)으로 7월 25일 치러져 망우리에 안장되었다가 1991년 대전국립묘지로 천장(遷葬)되었다.

  

▶서훈(敍勳)◀

1968년 3월 1일 :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

1977년 12월 31일 : 독립유공자 건국포장

1990년 12월 26일 : 건국훈장 애국장

  

▶가족사항◀

아내 : 김운열(金雲烈) (故)

아들 : 기창(基彰), 며느리 : 이상귀(李相貴)

손자 : 중현(中鉉), 손녀 : 나래·시내

딸 : 명화(明和), 사위 : 신복룡(申福龍)

외손자 : 나라, 외손녀 : 나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