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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보(甲子譜, 1744년)
갑자보(甲子譜, 1744년)
정묘보(丁卯譜, 1807년)
병인보(丙寅譜, 1866년)
신묘보(辛卯譜, 1891년)
기미보(己未譜, 1919년)
신축보(辛丑譜, 1961년)
경오보(庚午譜, 1990년)
경자보(庚子譜, 2020년)
 
◇ 甲子譜 序
 
대저 한 사람의 몸이 나누어져 길거리의 사람과 같이 아무 관계없는 정도에 이르게 된다고 한 것은 노소(老蘇 : 蘇洵을 가리킴)의 깊은 슬픔을 표현한 말이다. 사람이 성(姓)을 받은 것은 처음에는 하나의 본(本)에서 시작하여 그 지파(支派)가 천만가지로 나누어진다. 또 그 나누어진 무리가 날이 갈수록 소원해 지고 천륜의 떳떳한 도리를 가지고서도 서로를 모를 정도이니 저 소순(蘇洵)이 그렇게도 슬퍼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인심(人心)을 포섭하고 풍속을 돈후하게 하는 것은 보계(譜系)를 밝히는데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보계를 밝히지 않는다면 그 누가 백가지 파(派)가 같은 근원을 가졌으며 저 갑씨(甲氏 : 赤狄의 부락)와 소경(昭景)이 같지 않으면서도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겠는가? 최씨는 해주(海州)의 큰 성(姓)이다. 고려의 태사 중서령을 지낸 문헌공(文憲公) 충을 선조로 하여 고려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칠, 팔 백년동안 고관대작이 끊이지 아니하였고 후손이 번창하여 마침내 나라 안의 큰 집안이 되었다. 만약 세상에 다른 씨족이 족보를 만들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어찌 최씨 같은 큰 성이 족보가 없을 수 있겠는가?
 
아! 해주최씨 일문은 참으로 번성하였구나! 크게는 우리 동방의 학교를 흥기시키고 해동공자라 불린 분이 있으니 바로 문헌공이 그 분이요 부친을 그대로 이어받아 높고 귀한 벼슬을 형제가 같이 역임하여 그 이름과 덕망을 찬연하게 떨친 분은 문화공(文和公)과 문장공(文莊公)이다. 그리고 나머지 이름 난 공경과 위대한 인물은 세대를 거듭하여 후한 덕을 갖추어 태어났다. 그리하여 재상의 지위에 오르고 역사에 이름을 빛낸 분이 또한 많아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정도이다. 우리 朝에 들어와서는 집현전 부제학(萬理)공이 세종 임금을 섬기어 문치(文治)를 보좌하였다. 그러나 그 뒤로부터는 간언을 받아들이고 정사를 살피는 바른 도가 회복되지 못하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혼란한 시절에 화를 당하게 되었다. 절도사(節度使 : 경회)공은 검은 상복을 입고서 전쟁에 임하여 진양(晋陽 : 진주)의 외로운 성(城)에서 용맹함을 떨쳤고 월담(月潭 : 황)공과 추봉(秋峰 : 유원)공은 2대에 걸쳐 아름다운 일을 하여 그 공훈과 충성이 성대하게 세상에 드러났다. 그리하여 어떤 분은 간룩한 역모의 싹을 잘라 버리었고 어떤 분은 떳떳한 윤리,기강을 바로 세웠으니 모두다 당 시대를 빛내고 후세에 전해질 일을 한 분들이다.
 
그 뒤를 이어 문장(文章)과 의열(義烈)로서 저명하였던 분은 하나, 둘로 헤아릴 수가 없다. 그 중 고죽(孤竹) 양포(楊浦)의 시(詩)는 그 빼어난 격조와 신령한 운치가 성대한 국가의 문운(文運)을 드러내며 한 시대의 문화를 빛낸 것이며 근래에 상국(相國)을 지낸 고(故) 간재(艮齋 : 奎瑞)공은 조용한 성품에 은거하기 좋아하였고 정숙하고 충성스러움으로 특히 뛰어난 분이다. 이분이 바로 현재의 우리 성상께서 『일사(一絲)로써 나라의 안녕을 도왔다』는 포상의 말씀을 하사한 분으로 성상의 포상하는 글이 하늘의 해와 별처럼 밝게 빛나고 있는 것이다. 최씨 가문이 여기에서 더욱 빛을 내었으니 아! 참으로 성대하구나! 최씨가 어찌 족보가 없을 수 있으며 유래 없이 만들어 질 수가 있겠는가? 반드시 그 선세(先世)의 빛나는 삶과 쌓아온 음덕과 기반이 후세 사람을 인도하고 도와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넓게 베풀어준 덕택과 멀리까지 끼쳐준 복록(福祿)이 많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무릇 후손되는 사람이 집안을 무너뜨리는 것은 깃털 태우는 것처럼 쉽고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하늘에 오르는 것처럼 어렵다는 사실을 안다면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깊이 성찰함으로서 선조의 체모를 깎는 것을 두렵게 여기어 충효로서 서로를 권고하고 우애와 친목으로서 상호 전해주고, 영원토록 아름다운 명예를 지키고, 선조에 대하여 욕을 끼치지 아니 한다면 세상에 덕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면서 그 성(姓)만을 짊어지고 모철로보(冒鐵爐步)한다는 기롱을 받는 사람은 부끄러운 줄을 알게 될 것이다. 만약 이상과 같은 효과가 없다면 족보 만드는 일을 무엇 때문에 하겠는가?
 
당초에 양포(楊浦)의 아들인 묵수(默守 : 유해)공이 세보(世譜) 두 책을 만들어 집안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보(全譜 : 대동보)는 아직 없었다. 이에 간재(艮齋)공의 둘째 아들인 삼척부사(三陟府使) 상정(尙鼎)과 추봉공(秋峰公)의 현손(玄孫)인 상보(相甫)가 여러 종인(宗人)과 더불어 계획하여 자료를 모아 족보를 만들었다. 족보가 이미 이루어지고 그것을 인쇄함으로서 그 전승을 장구하게 하고자 하였으니 참으로 그 집안을 잘 이은 일이라고 기록할 수 있겠다. 이윽고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최씨에게는 먼 외손이 된다고 하여 족보의 서문을 쓰라고 부탁하였다. 이러한 일에서도 친척과 친분을 유지하는 의로움을 널리 펼치시어 나를 길거리에서 만나는 정도의 무관한 사람으로 보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니 내가 사양하려고 한 들 어찌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성상(영조) 20년(단기 4077년 / 서기 1744년) 갑자 4월 하한(下澣)에
- 통정대부 원임홍문관부제학 수양(首陽) 오수채(吳遂采)는 삼가 서문을 쓴다 -
 

◇ 甲子譜 跋
 
우리 해주최씨의 유래는 오래 되었다. 멀리 문헌공(文憲公)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700년넘게 전해져 내려오면서 명망과 덕행이 이어지고 옛 가문의 명성과 훈업(勳業)을 오히려 떨어뜨리지 않았다. 이 어찌 우리 문헌공께서 쌓으신 은택이 오래될수록 더욱 끊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아. 사람이 새나 짐승과 다른 까닭은 자기들에게 조상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부모의 모습을 미루어서 그 5, 6대 조상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그러므로 문명한 宋나라시대의 정자(程子 : 程明道. 程伊川 선생)께서도 오히려 탄식하였던 것이다. 백년 내려온 가문이 없으면 세대가 내려올수록 풍속도 더욱 지저분하게 변하여 근본을 잊고 몸을 더럽히게 되며 풍교(風敎)가 무너지게 되니 어찌 이에 근본하지 않으랴? 오직 우리 해주 최씨 집안은 수십 세 소목(昭穆)이 서로 바라보며 구슬을 꿴 것처럼 대를 이어 대대로 빛을 남기고 다행스럽게도 끊어지지 않았다. 묵수당(默守堂 : 유해)께서 족보를 만드시면서 가전(家傳)등을 더욱 넓힌 뒤에 오히려 그 소략하고 빠진 부분을 마음 아파하셨다. 청하군(淸河君 : 홍상)이 지금 다시 족보를 엮으면서 옛날에 빠지거나 나뉘어진 부분들을 모두 떨쳐 모아 멀고 소략하며 외롭고 한미한 집안까지도 모드 근원을 찾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음이 없었다. 그래서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분명하게 되었으니 우리 집안의 문헌도 또한 장차 백세 후에라도 징험할 만 하게 되었다. 무릇 이곳에 족보를 올린 자들은 자기 한 사람의 몸에만 이르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각기 자기가 온 곳을 알고 충의를 세우게 될 것이며 조정에도 이로움이 있을 것이다. 장씨(長氏 : 최고 종형)의 말처럼 조상의 유업을 널리 구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병을 돌보느라고 족보 만드는 일에 참여하지 못하여 부끄러움을 스스로 갚을 수가 없다. 대신 이 글로서 힘쓰는 바이다.
 
숭정(崇禎) 기원 후 두번째 갑자년(단기 4077년 / 서기 1744년)
- 문헌공 22세손 통훈대부 삼척도호부사 상정(尙鼎)은 삼가 발문을 쓰다 -
 
우리 집안은 문헌공(文憲公) 때부터 비로서 동방의 갑족(甲族)이 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800여년이나 내려왔다. 그런데도 여지껏 족보가 없었고 제학공(提學公 : 만리)이 간직한 가전(家傳)에 다만 선대의 사적 및 충헌공(忠憲公) 장파만이 기록되어 있었다. 만력(萬曆 : 명나라 신종 연호) 기묘년(1579)에 일휴당(日休堂 : 경회)공이 비로서 두 어른(사재령 珙과 영랑장 安澤)의 호구를 얻어 기록하고 각 파계로 하여금 비로서 살펴 근거할 바가 있게 하였다. 묵수당(默守堂 : 유해)공이 기록들을 엮어서 한 권짜리 족보를 만드니 이때가 바로 숭정(崇禎 :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 연호) 병자년(1636)이었다. 또한 그 뒤에 족보를 계속하여 만들지 못한지가 벌써 백 년이나 되었다. 지금 집안의 여러 종인(宗人)들이 앞서서 종형 상정(尙鼎)에게 의견을 내고 또한 여러 종인들이 비용을 내어 일을 시작하였다. 여러 집안이 이 일에 참여하여 반 년 지난 뒤에 일을 다 마치게 되었다. 비록 연대가 오래되고 문헌도 부족하여 이따금 빠진 곳이 있고 잘못이 있을지라도 우리 선조들께서 덕을 쌓으시고 창성해지신 것을 그 후손들이 또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 아! 높은 벼슬이 잇달아 나오고 명성이 빛났으며 충신과 효자가 서로 이어 나왔다. 청백리가 이어졌으며 덕업(德業)과 문장이 일세에 빛났다. 죄를 지어 죽거나 그 이름이 탐관오리로 떨어져 조상들에게 욕을 끼치고 宗人들에게 부끄러움을 끼친 자들은 하나도 없었다. 이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아 아! 훌륭하여라. 문헌공께서 일찍이 『덕행은 규장이니 청검을 명심하라』라는 詩를 지으셨으니 자손으로 이름이 오른 자들은 이 말을 명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무릇 우리 후손들은 덕행(德行)에 더욱 힘써 낳아준 조상들에게 욕되게 하지 않아야 하리라.
 
영조 22년 갑자(단기 4077년 / 서기 1744년) 늦은 여름에
- 문헌공 22세손 통훈대부 행 청하현감 홍상(弘相)은 삼가 발문을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