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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 년의 뿌리를 내리면서 문벌거족으로 천연히 빛난 해주최문의 역사와 대종회 연혁에 대하여 간략하게 거재합니다.

 


 

우리 해주최씨를 창개하신 시조 온() 할아버님께서는 해주지역 토호족으로 재산이 넉넉해 장자 호걸이라 일컬었으며, 해주에서 휘 충() 아드님을 낳으시고 수신제가(修身齊家)를 잘 하시어 후에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증직되셨다.

 

고려朝 성종3년 갑신년 984년에 태어나신 2世 冲 선조님께서는 외모가 출중하고 성품은 굳고 곧았으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하여 목종 8년 즉 서기 1005년에 甲科(文科)에 장원급제하여 현종, 덕종, 정종, 문종까지 오조(五朝)에 걸쳐 역사(歷仕)하면서 출장입상(出將入相)으로 문무의 요직을 두루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 등 최상의 관계훈작(官階勳爵)에 이르기까지 많은 위업을 이루고 태보태사(太保太師)로 추존되었으며 추충(推忠), 찬도(贊道)라는 공신의 호까지 받았다.

 

문종 7(1053)70세로 벼슬을 사양하니 왕은 특별히 교서를 내려 윤허할 수 없다하면서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 계속해서 국정을 자문하게 하고 다시 협모(協謨), 동덕(同德), 좌리(佐理®), 윤리(允理) 공신호를 내렸으며 80세에 다시 홍운, 의유, 보정, 수정, 강제 공신호를 더해 11개의 공신호를 받아 역사상 가장 많은 공신호를 받았다. 그리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벽상삼한(壁上三韓),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중서령(太師中書令),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상주국(上柱國), 양평부원군(陽平府院君)의 작위를 받아 누대유종(累代儒宗) 삼한기덕(三韓耆德), 유궁규얼(儒宮圭蘖)이라는 당시 최대의 존칭과 예우를 받았다.

 

관직에서 은퇴 하신 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학교인 구재학당(九齋學堂)을 세워 수 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유학(儒學)을 크게 진홍시켰으며 계이자시(戒二子時)로 두 아드님을 훈계하여 자손들의 입신양명(立身揭名)에 기틀을 마련하였다.

 

문종 21년 서기 1067년에 왕이 충 선조님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충 선조님께서 중서령인 큰아드님 유선(惟善)과 상서령인 둘째 아드님 유길(推吉)의 부축을 받으며 연회장에 들어서자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면서 매우 영광스런 일이라 칭찬하였고 한림학사 김행경이 시를 지어 경하하기를 높은 벼슬과 공명을 이룬 자손들이 함께 기로(耆老)를 부축하고 들어가니 황은에 취하는 도다. 상서령은 중서령을 시중들고 장원은 장원을 부축하였네! 세상에 드물게 사입두(四入頭:송나라 집정 三司使)에 이른다는 말을 듣긴 하였지만 한 가문에 정승들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소. 한 집안에 재상이 줄줄이 나는 것도 드물거니와 대를 이어 문과에 장원한다는 것은 더욱 존경스럽네. 날마다 선비들의 칭송이 자자하더니, 오늘은 온 거리가 떠들썩하네. 연이어 공적을 세워 청사에 빛나니 천 자루 붓이 닳도록 써도 형용하기 부족하네.”라 하였다.

 

이렇게 삼한기덕(三韓耆德)儒宗으로 삼불후(三不朽) 을 모두 갖춘 희대의 인간 대성자이시며 동방의 大聖으로 부각된 선조님께서는 文宗 22年 무신년 서기 1068915曰 수85세의 천수를 다 하시고 서거하셨다. 왕은 文憲이란 시호를 내리고 선종3년 서기1086년2월1일 정종묘정에 배향하였으며, 민족의 사표(師表)가 되신 문헌공 선조님께서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되어 오늘날에도 존숭되어 오고 있음은 해주최문의 영광은 물론, 우리 민족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다져진 기반 위에서 후손들은 代代로 수상, 재상 등 고위관직을 역임하면서 문벌거족으로 성장하였으며 종묘에 배향된 공신이 문헌공 휘 , 문화공 휘 惟善, 영렬공 휘 允儀, 충경공 휘 思認, 간재공 휘 奎瑞 5이며 문인 박해가 심하던 武人 집권 시에도 문청공 휘 와 충헌공 휘 유엄(有淹) 선조님 같은 걸출한 인물이 명문의 전통을 과시하였고 조선조에도 만리공(萬理公, 집현전 부제학)과 간재공(艮齋公, 奎瑞) 선조님은 淸白吏청백리로 역사에 빛나고 있으며 특히 간재공은 영의정 재임 시 역모 정보를 사전 입수하고 용인에서 한양까지 100여리를 철야 상경해서 왕께 고변하여 나라의 위급을 모면함으로써 왕으로부터 일사부정(一絲扶鼎)이란 어서를 하사 받은 , 功臣으로 시호가 충정(忠貞)이며 안성 불지에 현존하는 어서각이 후손에게 교훈과 긍지를 주고 있다. 또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왜인과 싸우다가 장렬히 순절한 경회장군과 기미 독립운동 33인의 한분인 린() 선조님 같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애국지사도 있는가 하면 수많은 선조님들이 알게 모르게 각 분야에서 해주최문을 빛내면서 천년의 뿌리를 면면히 이어 왔다.

 

12에서 15사이에서 형성된 27의 후손들은 전국 각 지역에 분포되어 계파별 또는 지역적으로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오면서 화수회 또는 종친회를 결성하여 승조상문과 친목을 도모해 왔으며, 1744년 갑자보(甲子譜) 발간을 계기로 종친회 활동이 표면에 나타나 丁卯譜, 丙寅譜, 辛卯譜, 已未譜 발간으로 이어지고, 해주최씨를 하나로 묶은 대종회가 태동한 것은 1956년으로 전한공파의 인섭씨 원선씨 원보씨 등 종현이 중심이 되어 약 6개월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1957428대종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元善 초대회장을 비롯하여 회장단과 임원을 선출하고 회칙을 제정하였으며, 그해 8월에는 영당 건립 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 상연 종현이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 대지 500평을 희사하여 서기 1958년에 5평의 영당을 건립하고 문헌영당이라 명명하여 문헌공과 문화공의 영정을 모시고 봉제사 하였고, 대동보 발간위원회도 발족하는 등 괄목할만한 위선사업에 전국 종친들의 기대가 컸으나 집행부의 불협화음과 관리 등의 문제로 갑자기 와해되어 1959년 봄에 대종회가 자동해체되는 불운을 맞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문헌영당 대지도 타성의 소유가 되어 부득이 안성 불지(현 해동사)로 이전하여 1982년까지 불지 문중에서 봉제사 해왔으며 대종회는 해체되었지만 원보씨를 비롯한 몇 분의 노력으로 1961년 신축보(辛丑譜)를 발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대종회를 재건해야 한다는 여러 종현들의 열화와 같은 집념으로 198110재형, 태호, 길준, 준기, , 재혼, 영수, 광식씨 등 12의 종현들이 가칭 해주최씨대종회를 재창립할 것을 발기하고, 19821023서울 마포 가든호텔에서 해주최씨대종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在衡 초대회장을 비롯한 회장단, 고문, 자문위원, 집행부 임원을 선임하고 회칙을 통과 각 문중과 지역 대표로 운영위원을 위촉하여 여러 차례 임원 및 운영위원회를 개최하면서 사업계획을 실행해 나가는 등 회장단과 집행부의 헌신적 노력과 모든 조직의 협조가 원만히 이루어지고 전국 종친의 긍정적인 협조로 대종회는 일취월장(日就月將)의 발전을 거듭하였으니, 198373회 운영위원회에서 문헌공 탄신 천주년 기념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저명한 대학교 교수들이 집필한 논문으로 최충연구논총(崔冲研究論叢)”이란 단행본을 발간하여 1984121일 서울 엠버서더호텔에서 역사적인 문헌공 탄신 천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겸 출판기념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고, 1986년에는 종지 창간호를 발간하였으며 1990년에는 문헌공 탄신 천주년기념 대동보(경오보)를 발간하고 여의도에 대종회 사무실(동북빌딩 607)를 장만하였으며, 1992년에는 남한 종친들의 숙원인 문헌서원”(오산 내삼미동)이 준공되어 문헌공, 문화공, 섭상서령공의 영정을 새로 모시고 첫제사를 봉행하였고 종지 2도 발간하였다. 그리고 1995년에 대종회 10年史를 발간하였고, 1998년에는 뮨헌공 선조님의 위상을 재정립하기 위하여 2차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그 논문으로 유학사상 최충의 위상(儒學史上雀沖位相)”이란 단행본을 발간하여 전국 종친에게 배포하였으며 2001년에는 종지 3과 경오대동보에 누보된 종현을 위하여 경오보추보를 발행하였고 20021월에는 문헌공 탄신 천주년기념보(경오보)”를 재판하였으며 2003815일에는 해주최씨 백년대계의 동량이 될 중앙청년회가 결성되는 등 대종회 창립 20여년 만에 해주최씨 청사(靑史)에 기리 남을 않은 업적을 이룩하였다.

 

 


 

이상 내용과 같이 우리는 참으로 자랑스러운 명문의 후예들이라 하겠으며 이와 같은 사업을 앞으로도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지구촌의 세계화와 지식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는 젊은 세대들은 조상 전래의 미풍양속과 윤리도덕보다 국적을 알 수 없는 외래문물을 선호하고 숭조상문과 경로효친보다 인터넷을 통한 지식과 정보를 더 중요시하여 종친회나 뿌리 교육은 구시대 유산으로 평가절하하고 관심이 적은 것이 현실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보다 나은 것을 배우고 취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무조건 내 것을 버리고 남의 것을 취하는 정신은 주체성이 결여되었다고 하겠으니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을 살려 기본적인 전통미풍양속과 윤리도덕은 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동방예의지국에 해동공자(海東孔子)의 후손이기에 더욱 그러하며 특히 해주최씨의 동량이 될 청장년은 중앙청년회에 적극 참여하여 명문의 전동을 자손만대에 전할 수 있도록 다 같이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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