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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崔)자의 뜻
문중의 역사 > 유래 > 최(崔)자의 뜻

최(崔)자의 뜻》 는 높을 山과 사람 人, 흙 土를 두 개 포갠 圭자로 형성된 문자이며, 이 규(圭)자는 천자에게 받은 땅을 다스린다는 뜻과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내리던 신표의 뜻으로 위로는 뫼 山, 아래로는 사람 人, 흙 土를 두 개 합친 최(崔)자는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인신 최고의 신분표시였다.

 

삼국사기에 유리왕 9년(32)에 6촌의 이름을 6部로 고치고 17관등을 설치한 것을 두고 일부에선 이때를 6촌장 득성(得姓)시기로 보지만 이것은 종래 사로(斯盧) 6촌을 행정구역인 6部로 개편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신라의 중앙관제가 공식적으로 만들어지고 지방제도가 지역적인 행정구역으로 개편되는 시기로서 이미 박혁거세 즉위 초에 사성받았던 6부촌장들의 성(姓)은 변함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또 삼국유사에는 소벌도리(蘇伐都利)는 정씨(鄭氏)의 조상도 되며 진주 소씨(蘇氏) 시조도 소벌도리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 세계(世系)를 구체적으로 밝힐 만한 문헌은 없고 다만 다음 같은 두 가지 說이 있다.

 

최씨의 원류》 요(堯)임금의 후손인 기곤오가 소성(蘇城 : 현재 길림성)의 하백에 봉해 졌으며 기원전 2266년경 소성(蘇城)이 단군조선에 영속됨에 따라 기씨에서 소씨(蘇氏)로 성을 고쳤으며 이 소곤오의 후손이 신라 6부 촌장 중의 한 사람인 돌산 고허촌의 소벌도리(蘇伐都利)이며, 이 소벌도리의 25세손이 진주 소씨 중시조인 소경(蘇慶)이라고 하는 說과,

 

풍이(風夷)의 후손인 적제축융(赤帝祝融)이 기원전 4241년 풍주(風州)의 배곡(倍谷)에 도읍을 정하고 전 국토에 부소나무(蘇 : 무궁화)를 심어 소(蘇)를 姓으로 삼고 이름을 소복해(蘇復解)라 하였고 그후 소복해의 61세손 소 풍(蘇豊)이 기원전 2392년 소성(蘇城)의 하백에 봉해졌으며 소풍(蘇豊)의 69세손 소백손(蘇伯孫)은 신유(申有) 진기(陳岐) 등과 함께 진한(辰韓)을 세웠다는 說이 있는데,

 

이 소백손의 29세손 소경(蘇慶)은 신라 진지왕 2년(577)에 출생하여 처음 이름을 알천이라 하였고 진덕왕 때(702~737) 상대등 벼슬을 지냈다. 일찍이 소경(蘇慶)은 후손이 없어 걱정하였는데 어느날 꿈에 나타난 소벌도리의 계시(진주 도사곡으로 이사하면 9저를 얻을 것이라 함)에 따라 신라 태종 무열왕 7년(660) 3월에 지금의 진주 상대동으로 이거하고 이름을 경(慶)으로 개명하였다 한다. 이후 과연 9대에 걸쳐 9명의 장군이 배출되었고 후에 후손들이 소벌도리를 원조로 하고 진주를 본관으로 삼아 소경(蘇慶)을 중시조로 모셨으며 이로서 진주 소씨의 문호가 열렸다. 중시조 소경(蘇慶)은 관직이 각우에 이르렀고 나라에 큰 공을 세웠으며 태종무열왕 3년(656)에는 왕이 그의 조상인 소벌도리를 문열왕(文烈王)으로 추봉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의 국사(國史)에 의하면 기원전 200년을 전후하여 삼한(三韓 : 마한, 변한, 진한)에는 국읍(國邑) 옆에 천군(天君)이 제사를 받드는 소도(蘇塗)라는 별읍(別邑)이 있었다. 이 소도(蘇塗)에는 큰 나무를 세우고 거기에다 방울과 북을 걸어 신성지역임을 표시하였고 천군(天君)이 제사장으로 농경예식과 종교의례를 주관하였다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소백손(蘇伯孫)이 진한(辰韓)을 세우기 훨씬 이전부터 그 조상들은 이미 천군의 직위를 갖고 별읍(別邑)에 머물면서 읍(邑)의 명칭인 소(蘇)를 성(姓)으로 쓰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진주 소씨의 경우 중시조 소경(蘇慶)이 소벌도리의 25세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위 두 설 중 어느 說을 취하더라도,

 

기원전 2392년 소풍(蘇豊)이 소성(蘇城)의 하백에 봉해진 사실과 기원전 2266년 단군조선에 예속된 사실등은 일맥상통한다. 또한 이 소풍(蘇豊)의 69세손은 진한을 일으킨 소백손(蘇伯孫)이며 그의 29세손이 소경(蘇慶)이고 소경은 소벌도리로부터 25세손이니 진한(辰韓)을 일으킨 소백손(蘇伯孫)의 증손자가 바로 최씨의 득성조(得姓祖) 소벌도리(蘇伐都利)인 것이다. 소벌도리에 이르러 새로이 최성(崔姓)을 득성(得姓)하였으나 그 후손들 중 일부는 종래 천군의 지위로서 기존의 소씨(蘇氏)를 유지하였을 것이고 점차 대군장 세력에게 그 직위가 예속되어 감에 따라 일부 후손들은 새로운 성씨(崔氏)로 개명,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경주 최씨 시조 최치원(崔致遠)이 소벌도리(蘇伐都利)의 24세손이라는 사실에서 그 흐름을 엿볼 수 있다.

 

최치원(崔致遠)의 윗 대에서 개성, 삭녕, 동주(철원), 전주(최군옥) 등으로 나눠지고 그의 손자(孫子)인 최승로(崔承老)의 후손에서 함양, 청주, 충주, 영흥, 용강, 수원, 부안, 강릉, 강화, 화순, 통천, 양천, 원주 등으로 분관(分貫)이 되었으며 지손에서 해주, 진주, 탐진, 전주(최균)등으로 분관했다고는 하지만 정확히 고증된 바는 없다. 최씨는 경주최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해주최씨, 우봉최씨 등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전주최씨와 동주최씨도 상당한 세력을 떨쳤다. 최씨는 조선시대보다 신라와 고려에서 세력을 떨친 성씨이며 그 밖에도 김씨에서 최씨로 사성받은 수성최씨와 중국에서 귀화한 충주최씨가 있다. 최씨는 문헌에는 326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125본만 전하며 이마저도 자세한 것은 수 십 본에 불과하다.최씨는 김, 이, 박씨 다음으로 인구가 많으며 1985년 국세조사에서 191만 3322명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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