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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聖受敎大槪

 

太祖朝傳.

敎曰先賢文憲公崔 後裔垂萬世承蔭不爲沙汰考講東西班正職別爲收用至如支庶號牌軍簿閑丁賤役竝皆勿侵特令撫恤使之安護.

 

太宗朝又以此意再三傳.

敎曰先賢文憲公崔 後裔子子孫孫世世承承東西正職不次擢用勿計代數之玄遠從其所居鄕不省始其本籍自其官雖別考出世系

母論直派與支庶一依.

太祖朝受敎或有支庶沙汰考講號牌軍牌軍籍歲抄閑丁凡百賤役竝勿侵責使之安護亦.判下爲白乎地.

 

仁祖朝丙寅傳.

敎曰與先賢安裕子孫一體直孫及庶孫考講軍簿竝皆勿侵可也.

 

英祖朝壬子傳.

敎曰依 先朝受 敎施行.

 

[조선 초부터 말기까지 500년 동안 '열성수교' 기록을 살펴보면.... 해동공자 문헌공 최충의 후예들은 아래와 같이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된다]


◇ 조선 태조 朝에 다음 같은 전교가 내려졌다

『선현 문헌공 최충의 후예는 만세토록 승음(承蔭 : 특별히 음관으로 임용)하게하고  고강(考講 : 살펴 헤아림)하여 사태(沙汰)시키지 않도록 할 것이며,

 문무관의 정직에 있는 사람은 특별히 승급하여 쓰라. 

또한 후손들의 원근을 가리지 말고 호패, 군패, 군적, 한정의 천역 등은 부과하지 말 것이며 특별히 어루만져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하라』

 

◇ 조선 태종 朝에도 다음 같은 전교가 내려졌다

『선현 문헌공 최충의 후손은 대수(代數)의 원근을 따지지 말고 거주하는 고을에 따라 살피지 말고 그 본적에 시초를 두고서 관직이 비록 다르더라도 그 세계를 상고하여 밝히라. 직파(直派)와 지서(支庶)를 논하지 말고 하나같이 태조 朝의 수교에 의지하여 지서(支庶)가 고강(考講:성적을살펴등수를매기던일)에 사태(沙汰)됨이 있거나 군적이나 천역 등에 동원되지 않게 하라』

 

◇ 조선 인조 朝(丙寅 : 1626년) 판하(判下 : 임금의 판결)전교는

『선현 최충은 안유의 자손과 일체로 직손 및 서손(庶孫)에 대하여 고강(考講)과 군부 모두를 부과하지 아니함이 옳다』하였으며,

 

◇ 조선 영조 朝(壬子 : 1732년)에도 

『先朝의 수교에 따라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 예조수교완문 (禮曹受敎完文) 천계(天啓) 6년(인조4년 1626) 병인(丙寅) 12월에 啓下. 예조에서 상고(相考)함.

유학(幼學) 최상(崔湘)등이 임금의 거둥 앞에서 진정서를 올리어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 고려朝에 문교가 황폐하여 오랑캐를 면하지 못할 시절에는 윤리가 없고 기강이 끊어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은 금수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즉 이미 무너진 의리를 일으켜 세우려는 사람이 없었고 이미 쇠퇴해 버린 학문과 예의를 그 누가 드러내려 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선조인 문헌공이 이에 이미 무너진 의리를 일으켜 세워 삼강(三綱)을 다시 진작시켰고, 이미 쇠퇴해버린 학교를 처음으로 열어 문물을 다시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써 동방의 도학의 흥성과 禮樂(예락)의 완비를 찬연하게 다시 밝히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당시 사람이 선조를 일컬어 [해동공자]라 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 동방이 예의를 부지(扶持)하여 지금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이 분의 功에 힘입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정묘(靖廟 : 고려 정종 묘정)에 배향하고 首陽(해주)에 사당을 세우니 이름이 중국에까지 진동하여 천 년 동안 제사를 받들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연고로 우리 태조대왕께서 크신 왕업을 개창하시었을 적에 특별히 문헌공의 공훈을 유념하시어 만세토록 영원히 문헌공의 덕을 입어 승음(承蔭)케 하여 동반, 서반의 정직에 특별히 수용케 하였습니다. 


지서(支庶)의 경우 한정의 천역을 일체 부과하지 않고, 특별히 어루만져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또한 판하전교(判下傳敎)하시었습니다. 또 가정(嘉靖) 壬子와 만력(萬曆) 癸卯에 두 번 군적을 조사할 적에 문헌공 최충의 후예는 별건성책(別件成冊)하여 군적 가운데에 일체 거론하지 않는다는 일로써 다음 같은 전교가 있었습니다. 


『문헌공 최충의 뭇 자손들에 대해서는 고강(考講)에서 사태(沙汰) 시키거나 호패, 군부, 한정 잡역 등 일체의 일을 부과하지 말라. 先朝의 금석과 같은 법전을 준수할 일이다』 하시며 이를 호패청 및 各 道에 명백히 알려 시행토록 윤허하셨습니다. 문헌공의 후예는 직파와 서파를 논하지 말고 잡역을 부과하지 못하게 하여 비록 한미하게 살더라도 귀천을 묻지 않고 세세토록 안녕을 지키면서 고강을 면하였고 군역을 면하였습니다. 그런데 훗날에 이르러 고강(考講)에 침범당하고 군부(軍簿)의 책임을 받으니 臣등은 참으로 민망스럽습니다. 만약 啓下에 그 원통함을 호소하지 않는다면 장차 누구에게 호소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데 성상께서는 先賢의 학교를 흥성시킨 功을 유념하시고, 조종의 교훈에 보답한다는 은전을 실천하시어 가정 임자년과 만력 계묘년의 舊例에 의거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성조(聖朝)의 변함없는 은전(恩典)을 준수하여 저희들로 하여금 고강에서 사태당하지 않게 하고 또 호패, 군부 등의 천역은 부과하지 않게 하여 주신다면 이는 참으로 선현의 공훈에 보답하여 후손을 보살피는 은전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신등이 또 천지부모의 은혜를 입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천계6년(인조4년 1626) 병인 12월 호패청 계사啓辭 

『문헌공의 직손 및 서손은 고강(考講)과 군역을 면해주어 비록 백세에 이른다 하더라도 영원히 항구적 법으로 삼습니다. 군부, 천역은 매 사람당 포를 거둠으로서 그들의 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음이 적절한 듯 합니다. 성상께서 재가하심이 어떠합니까?』 이에 대하여 당시 영의정 이원익(李元翼)과 영중추부사 정창연(鄭昌衍)은 병으로 심사하지 못하였고 좌의정 윤방(尹昉), 판중추부사 신흠(申欽), 우의정 오윤겸(吳允謙)이 의론 끝에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先賢의 자손에 대하여 별건성책(別件成冊)하여 군부에 넣지 아니함과 고강(考講)에 침범치 아니함은 先王朝의 수교임이 과연 명백한 것입니다. 따라서 후대에 함부로 고치는 것이 또한 어려울 것입니다. 성상께서 재가하심이 옳으실 줄로 아옵니다』

 


 

 

 


◇ 병조수교완문 (兵曹受敎完文) 병조에서 상고(相考)함.

전일에 계하(啓下)하여 예조에서 회계하여 문헌공 최충의 행상을 가져다가 상고하오되 太祖태조대왕 朝에 특별히 명을 내려 다음과 같이 전교하시었습니다

 

 『先賢 문헌공 최충의 후예 중, 직손은 만세토록 승음(承蔭)케하고, 고강(考講)에 사태당하지 말며 동반(東班), 서반(西班) 정직에 특별히 수용하라. 지서(支庶)의 경우에는 호패, 군부, 한정 천역은 모두 부과하지 말라. 그리하여 특별히 어루만져 그들로 하여금 편안히 살게 하라. 

이 또한 판하전교(判下傳敎)하셨으며 太宗태종대왕 朝에 또 이와 같은 뜻으로 전교하셨거니와 해조(該曹 : 예조)에서 各 道에 자세히 알린바 있습니다. 

청나라 옹정(雍正) 9년(영조7년 1731) 11월 12일에 수원에 거주하는 출신(出身:과거에 급제하고 아직 보임받지 못함) 최몽상(崔夢尙)이 현 성상의 거동 앞에 진정서를 올렸는데 

그 일이 병조에 啓下됨에 그 내용을 살펴보니 전일 최상(崔湘)의 것과 같았으며, 현 병조판서 徐(?)참판과 李(?)좌랑이 복계(覆啓)하였습니다. 

그의 선조인 문헌공 최충은 고려 朝의 명현으로 교육의 문을 열고 학교를 개설한 功공이 있어 그 자손에게는 군부를 부과하지 말라는 일이 열성조의 수교에까지 있습니다. 

따라서 일찍이 병조에서 행관(行關 : 동급관청에 보내는 공문)을 내려 탈이 난 것을 조사하게 하였습니다만 

다만 해당 읍에서 탈이 낫는지의 여부가 과연 진정서의 내용대로라면 그의 원통하다는 주장은 특별한 일이 아니 오니 사목(事目)과 세계를 자세히 살핀 다음에 탈이 난 것에 대해서는 

즉시 그 탈을 없애주고, 이후에는 잡역을 부과하지 않는다는 뜻을 本 道에 행문이첩(行文移牒 : 관문서를 발송 조회함)함이 어떠하오리까?』 

동부승지 김유가 다시 읽어보고 받들어 들어가니 성상께서 전교하시기를 『그대로 시행하라』 하셨다.

 


 

 

 

 


수교 (受敎)

융희 3년(대한제국1909년) 을유 春춘정월에 순종황제의 거둥이 서도를 순수(巡狩)할 적에 大德대덕을 선포하시고, 폐하여진 예전(禮典)을 모두 거행케 하심으로서 유자를 숭상하고, 선현(先賢)을 존중하는 일을 급선무로 삼으셨다. 고려의 태사(太師)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은 학교를 진흥시키고 국력을 배양하였으니 그 풍성한 공훈과 탁월한 업적은 천년동안 크게 감탄받은지라 그 묘지를 방문하여 수리하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술잔을 올리라 하는 성지(聖旨)를 내려 주셨다.

 

 

 


관찰사 조희문 계사 (觀察使 趙羲聞 啓辭)

『문헌공 최충의 묘도(墓道)는 해가 오래되어 잃어 버렸고 찾아가 물을 길이 없사옵니다. 그러하오니 해주군(海州郡)의 서원 옛터에 위판(位版)을 새로 만들고 치제(致祭)드릴 것을 엎드려 청하옵니다. 하교(下敎)에 따라 보고 한 바대로 경건히 위판(位版)을 받들고 규장각(奎章閣)으로 하여금 제문(祭文)을 짓게 하고 제물의 진배(進排) 및 집사관의 차정(差定) 등은 본도(本道)로 하여금 거행할 일을 맡도록 하고 제수(祭需)는 장례원(掌禮院)에서 조칙을 받들어 本 郡에 전송하도록 하였나이다』

 


 

 

 

 

치제축문 (致祭祝文)

융희(隆熙) 3年(대한제국1909년) 歲次 기유 3월 경술삭(庚戌朔) 初 8日 丁巳時에 순종황제는 臣 해주군수 한형리(韓炯履)을 파견하여 고려 시중(侍中) 문헌공 최충의 영전에 제사를 올립니다. 


『옛날 은성(殷盛 : 중국 殷나라의 전성기)한 조정에 규성(奎星 : 文運을 뜻함)의 별자리가 위성(緯星)에 모여들고 정원(貞元)의 시기에 정기가 우뚝 태어났네. 경서를 펼치고 경연에서 임금을 모시며 문치(文治)를 찬양하셨네. 조상(朝象)을 광제(匡濟)하시고 큰 이륜(彛倫)을 부식(扶植)시키셨네. 성학(聖學)에 공을 들이시고 유도(儒道)를 자신의 일로 여기셨네. 고루함이 풍습이 되고 풍교(風敎)가 쇠미해진 그 시절에 분발하시어 성실한 마음으로 제자를 돌보셨네. 극수(棘蒐)를 일으켜 세우시고 경적(經籍)을 나열하시었네. 이에 구재(九齋 : 문헌공도)를 창설하시고 많은 선비를 모으셨네. 산재(山齋)에서는 여름 학과를 열어 성리(性理)를 강구하셨네. 夏나라의 서(序 : 질서)와 殷나라의 상(庠 : 학교)을 공경하여 세대를 뛰어넘어 개설하셨네. 해동의 한 지역에서 법을 외치는 소리가 넘쳤네. 사도(斯道)의 밝아짐은 해가 중천에 뜬 듯 하였고 인재의 빛남은 구슬이 연못에 쌓인 듯 하였네. 공맹(孔孟 : 공자와 맹자)의 참된 원천이 한 시대에 아름답게 빛났네. 희녕(熙寧)의 때에 돌아가시어 새로운 인의(仁義)의 덕을 남기셨네. 동쪽 방에 제사를 받들어 백세토록 종앙(宗仰 : 최고로 우러러 받듬)하네. 대녕(大寧)의 옛터에는 신령의 정기가 어슴프레 보이네. 이에 황제전하의 서도(西道) 순수(巡狩 : 순행을 뜻함)를 당하니 아름다운 城을 여덟 번 바라보셨네. 수령에게 명하여 술잔을 올리게 하셨으니 신령은 이르시어 흠향(歆饗)하소서』

 

-종2품 嘉善大夫가선대부 규장각 전제(典製) 臣 김유성(金裕成)이 삼가 지어 바침-

 



 

 

 

◇ 공신 자손 수교 (功臣 子孫 受敎)

충 훈부위담급사(忠勳府爲膽給事) 啓下하신 本 府의 계목(啓目)에 이르기를...

 

「國朝국조가 개국 이래로 양무 22공신(揚武功臣양무공신 : 조선 영조 4년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다스린 功으로 吳命恒 등 22인에게 내린 공신號)의 자손은 매 식년마다 단자(單子)를 거두어서 세계를 수정케 함으로써 마치 종부시(宗簿寺)의 선원록(璿源錄)의 수정이나 돈녕부(敦寧府)의 족보수정과 같이 하게 하여 千百代에 이르더라도 그만두는 일이 없도록 한다. 

이러한 것은 실로 열성조(列聖朝)에서 훈신들과 더불어 피를 입술에 묻히며 동맹(同盟)하여 산하대려(山河帶礪 : 작위에 봉할 때 맹세하는 말로 漢나라 고조 유방이 공신과 제후를 봉할 때 쓰던 문구)하여 먼 후손에까지 미칠 것이라는 성의(盛意)뿐만 아니라 태조 朝로부터 선조 朝에 이르기까지 공신의 자손은 장구하게 나라를 함께 누리리니 금일의 환난을 서로 구원할 것을 잊지 말라.

百世토록 도와서 國朝와 더불어 함께 하리라」라는 뜻으로 맹세하는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내어 천지에 고하고 옥쇄를 찍어 인각(麟閣)에 보관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祖宗 朝의 金石금석과 같은 법전이거늘 외읍(外邑)의 수령이 조가(朝家 : 국가)의 공신자손을 우대하는 성대한 뜻을 염두에 두지 않고, 공신의 자손을 갖가지로 침탈하고 곤경에 빠뜨리며 그들에 대한 대우가 도리어 향품(鄕品)이나 중서(中庶)의 부류보다도 못합니다. 

그리하여 공신의 자손들로 하여금 문호(門戶)를 보전하지도 못하게 하니 그로 인하여 조금 모양을 갖춘 자는 충의(忠義)의 칭호를 부끄러운 명목으로 간주하여 세계(世系)를 수정하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혹은 담당관이 여러 가지로 트집을 잡고서 代가 멀다고 일컫고 보청폐단(報淸廢單)함으로서 그 선조의 음덕을 끊고 그들을 몰아서 천역에 집어 넣습니다. 그러니 정탈(定奪)의 실제적 혜택이 훈신의 자손에게 미치지 못하며 이는 참으로 법의 뜻이 아닙니다. 

금후에는 각별히 신식(申飾)하시되 외읍(外邑)에서 혹시 이와 같은 폐단이 있거든 해당 수령을 파직시키고 향소 읍리(鄕所 邑吏)에게는 특별히 형장을 가하여 추문하고 귀양을 보내주시기 바라며 다음같이 소원하옵니다.

 

공신자손들에게 부과한 役역은 속히 관아에서 사고처리를 하라는 엄명이 있었음에도 담당관은 조가(朝家)의 공신자손을 우대하는 성의를 체득하지 못하고서 아직도 처리하지 않고 있으며,

 혹은 혼잡하게 침탈하는 폐단이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잔약하고 피폐한 훈신의 후예가 편안하게 지내지 못하고 그 정상이 가긍합니다. 

 

本 官관이 이 일의 조목조목을 열거하여 침범하지 말라는 행간을 돌린 즉 해당 읍의 수령이 이를 준수하여 거행치 않으니 참으로 장차 민간의 믿음을 얻지 못할까 우려됩니다. 

정묘년 봄에 영조대왕께서 친히 本 府에 임하셨을 적에 대신들이 품계를 올린바 정훈(正勳 : 정식 작위를 받은 공신)자손에 대해서는 법전에 의거하여 하여 군역에 넣지 말 것이며, 이 명을 따르지 않고 태만한 자는 나포조사하여 그 죄를 묻는다는 성상(聖上)의 윤허를 얻었습니다. 

성상의 거둥이 本府에 친히 이르신 것은 일찍이 없었던 성대한 일입니다. 친히 이르시어 하교하시고 신식(申飾)하신 것은 다른 사목(事目)이나 사례와 비교하여 특히 중요한 것이로되 각 읍 수령이 즉시 거행하지 않는다면 성상의 하교를 받들어 시행하는 도리에 극히 미안한 처사일 것입니다. 

이 사목(事目)이 반포된 뒤에 공신 자손 중 세계가 분명한 사람에 대하여 각 읍에서 다시 예전대로 계속 침탈할 경우 道臣과 帥臣(병마 절도사와 수군 절도사)은 事目에 의거 그 중 가장 중벌로 징계하고, 수령은 判下의 사의(辭意)에 의거하여 그 죄를 물을 것이며, 향소(鄕所)의 읍리(邑吏)는 각별히 형장을 가하여 귀양 보내시길 바랍니다. 

또 공신 자손을 처리한 내용을 성책하여 병영에서 거두어 상부에 올리게 하시고, 관리들의 변칙적 운용이 없게 하시며 만약 세밑을 지나더라도 행하지 않거든 담당자를 엄중이 문책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본래 사목(事目)에 없는 잡역도 지금은 혼동하여 침책(侵責)하는 폐단이 끝이 없습니다. 이것 또한 중지하도록 해주시고 이를 태만히 하는 수령은 팔계(八啓)의 죄로 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가정(嘉정) 6년 朝鮮 중종 22년(1527) 丁亥 2월 초9일

-우부승지 臣 한용택 품계 올리는 일을 차지하여 윤허를 받고 判下한 뒤 경외(京外)에 반포하였다-

 


 

 

 

 


◇ 해릉군 최빈 수교 (海陵君 賓 受敎)

 宣祖 朝 忠勤貞亮 竭誠效節協策 扈聖功臣 宣傳官 贈 資憲大夫 兵曹判書 兼 判義禁府事 五衛都摠府 都摠管 海陵君 崔賓 


『선조 朝 충 근정양 갈성효절협책 호성공신 선전관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해릉군 최빈(崔賓)은 피할 수 없이 오래도록 험하고 절박한 일에 종사했으니 

이를 상주고 포록하는 식전을 차리고 옛 제도를 상고하여 새로이 훈공에 보답한다. 

 

 빈(賓)의 타고난 천품을 내가 비록 알았으나 이토록 강인하고 능한 줄은 미처 알지 못했구나. 그때 시종들의 예비가 있었음에도 오랑캐들의 돌발적 침공으로 이런 어렵고 위태한 일을 만났다. 

그 속에서 이리 저리 뿔뿔이 헤어지는 환난을 당했으나 하늘이 이 나라를 도우심에 현량한 무관종신(武臣從臣)을 얻게 되었다. 

평양성을 피해 갈 때 짐이 탄 말마저 죽어 그 상황이 참으로 절박하고 위험하였다. 신하들도 모두 나를 버리고 가거늘 오직 빈(賓)만이 늙은 몸으로 앞장서 선 듯 업기를 청하니 나 또한 사세가 절박한지라 무겁고 괴로운 일을 사양치 아니하였다. 

이후 십여일 이나 애써 용만에 도착하였으니 하늘이 宋나라를 복되게 한 것과 무엇이 다르랴. 가상한 큰상이나 책훈은 후일에 있을 것이라 이르고 후일 승용을 기다리게 하였다. 다행히 개선이라도 하면 신분과 등급에 관계없이 상을 주려 하였는데 빈(賓)만이 의분을 참지 못하고 피를 토하고 죽었구나. 

비록 책훈을 넓히어 도형의 은전을 내린들 이미 저승에 가 있으니 누구에게 이일을 알려 후세에 전하리오. 

빈(賓)의 부모처자는 일계급 녹을 올리고, 無子무자거든 생질, 사위에게 가계(加階)하고, 적장 손은 대대로 거두어 영세토록 세습케 하여 그 녹을 잃지 않게 하라』 


                               -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전교 : 충 훈부회계(忠勳部回啓), 해릉군파보(海陵君派譜)

 


 

 

 

 


해성부원군 최황 수교 (海城府院君 滉 受敎)

輸忠翼謨光國推忠奮義 平難功臣 崇祿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世子貳師 海城府院君 贈 領議政 崔滉

 

『선조 朝 수충익모광국추충분의 평난공신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세자이사 해성부원군 증 영의정 최황(崔滉)은 그의 풍성한 공과 위대한 업적이 인각에 빛나게 간직되어 있다. 

그의 자손된 자는 세세토록 수록하여 영원토록 보살핀다는 뜻이 선연하게 단서철권(丹書鐵卷 : 공신에게 나눠주는 공훈록)에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연대가 멀어지고 후속이 점차 바뀌자 그 자손 중에는 군역, 잡역에 섞여 편입되는 폐단이 있다. 

先朝께서 내리신 말씀이 전후에 계속되었고 그 자손 중에 혹시 군관, 감관, 면임 등 각종의 군보천역(軍保賤役) 및 연호잡역(煙戶雜役)에 혼잡하게 책임을 맡는 폐단이 있거든 

이러한 일로써 지방관에 빙고(憑考)하고 특별히 면제받게 하라. 

그리고 담당관도 또한 이러한 사목事目을 받들어 살펴서 시행하고 조가의 훈신후예를 우대하는 성의를 보여주는 것이 마땅하다』 

 

                               -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전교 : 충훈부회계(忠勳部回啓), 좌랑공파보(佐郞公派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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