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辛卯譜 序
노천(老泉 : 蘇洵을 가리킴)이 족보에 서문(蘇洵이 지은 族譜引)을 쓴 이래로 족보를 만드는 사람은 대개 그 글을 많이 가져다가 증거로 삼는다. 그렇다고 해서 효제(孝悌)의 마음이 노천이 말한바 대로 반드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 그것은 단지 공언(空言)에 불과하고 문구(文具)에 불과한 것이다. 족보를 가지고 와서 서문 쓰기를 청하는 사람이 있어도 나는 일찍이 가벼이 그 청에 응한 적이 없거니와 그것은 학식이 없는 자가 어찌 감히 책의 첫 머리에 오르는 글을 쓸 수가 있겠는가 참으로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해주 진사(進士) 최학선(崔學善)이 옛 족보에 바탕을 두고 증수(增修)를 하고는 나의 선세(先世)에 인척의 연분이 있다고 하여 나에게 서문 한마디를 청하였다. 나는 문사(文辭)에 재주 없다는 것으로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해주최씨는 고려의 태사(太師) 중서령(中書令) 문헌공(文憲公)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七,八백년을 지나왔는데 도덕, 절의(節義)와 효우(孝友), 문장에 있어 각 시대마다 인물이 계속 이어졌다. 또 높은 벼슬을 계속 이어와서 과연 부제학(副提學) 오수채(吳遂采)의 서문(序文)의 말과 같았다.
족보를 만드는 일은 무릇 네 차례나 있었다. 묵수공(默수공 : 유해)이 처음 족보를 만드셨고 삼척공(三陟公 : 상정) 및 청하공(淸河公 : 홍상)이 증수하였다. 이제 태현(泰鉉), 학선(學善), 창부(昌溥)가 서로 힘을 합하여 크게 갖추어 놓았다. 이루어 놓은 것이 많을수록 소언하였던 종인(宗人)이 더욱 친밀해졌다. 하물며 태현, 창보는 청하공, 삼척공 두 분의 후손으로 특히 선조의 뜻을 잘 이어받아 일을 계속한 사람임에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당나라 사람 씨족지(氏族志)에서는 최씨로서 머리를 삼거니와 동방의 갑족(甲族)으로 해주 최씨도 또 그와 같다. 최씨의 번창함과 큼이 예로부터 그러하였다. 그렇다면 이 족보는 마땅히 씨족지(氏族志)의 경우로서 보아야지 노천(老泉)이 말한 효제(孝悌)나 기대하고 말아서는 안될 것이니 이에 거친 글을 엮어 서문을 쓴다.
성상 28년(단기 4224년) 신묘 맹춘(孟春) 상순에
- 정헌대부 행예조판서 겸 홍문관제학 이순익(李淳翼)은 삼가 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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