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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문중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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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崔氏)는 우리 겨례의 숱한 성씨(姓氏) 가운데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성씨의 하나로 신라시대 이래 많은 재상(宰相), 학자(學者), 문인(文人)을 배출한 전통있는 명벌(名閥)이다. 특히 해주최씨(海州崔氏)는 고려朝에서 가장 빛을 발한 가문으로 일부 역사가들은 『고려의 역사는 곧 해주 최씨의 역사』라고 말하기도 한다.


해주최씨는 황해도(黃海道) 대령군(大寧郡 : 해주海州)에서 조상 대대로 학문을 숭상하고 행실을 돈독히 하였으며, 마침내 시조 온(溫 : 증 태자태보)에 이르러 재산을 크게 불리고 문명을 떨치니 세상사람들이 장자(長子)라 칭송하였다.

 

그 뒤를 이은 2세祖 충(冲 : 문헌공)이 그 호부함을 바탕으로 학문에 몰두하여 마침내 해동공자(海東孔子)의 칭호와 고려朝 최고의 관작(官爵)을 얻었으며, 3세祖 유선(惟善 : 문화공), 유길(惟吉 : 섭상서령공), 4세祖 사제(思齊 : 양평공), 사량(思諒 : 강경공), 사추(思諏 : 충경공)등의 대를 이은 장원급제로 가문의 명성을 한껏 날렸다.

 

또한 5세祖 약(약:한림학사), 관(灌 : 평장사), 주(湊 : 평장사), 6세祖 윤의(允儀 : 영렬공), 홍윤(洪胤 : 경문공), 7세祖 민(敏 : 좌복야), 8세祖 자(滋 : 문청공), 9세祖 유엄(충헌공) 등이 앞뒤로 재상이 되어 명신(名臣)과 공신(功臣)반열에 오르니 귀족(貴族) 중에서도 최고요 명실상부한 고려朝 제일의 권문세가(權門勢家)가 되었다.

 

이에 후손들이 시조(始祖)의 세거지(世居地)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혈통을 세우니 바로 명문거족 해주최씨의 발원이었다.

 

또한 청송최씨 (靑松崔氏) 최세걸(崔世傑)은 원손(遠孫)이며.  아산최씨 (牙山崔氏), 용궁최씨 (龍宮崔氏), 나주최씨 (羅州崔氏) 등도 해주최씨에서 분적(分籍)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선대(先代)에 대하여는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았다.

 

청송최씨 (靑松崔氏) 始祖 : 京 (경)

해주최씨 시조 온(溫)의 원손(遠孫 : 13세손)이다. 그는 조선 때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내고 삭주(朔州)에서 경북(慶北) 청송으로 이주하여 청송(靑松)을 본관(本貫)으로 삼았다. 그의 아들 세걸(世傑)은 통훈대부 어모장군(通訓大夫 禦侮將軍)이 되었고, 그의 아들 팽령(彭嶺)은 참의(參議)를 지냈으며 인방(仁邦)은 중추부사(中樞府使)가 되어 가문을 중흥시켰다. 그 외 언상(彦祥)이 판관(判官), 덕항(德恒)은 효자(孝子)로서 유명하였고 응천(應天)은 부호군(副護軍)이 되어 이름을 날렸다.

 

아산최씨 (牙山崔氏) 始祖 : 예립(禮立)

예립(禮立)은 조선 朝에서 사과(司果)를 역임했으며, 증 태자태보를 지낸 해주 최씨 시조 온(溫)의 21세손이다. 선대(先代)는 누대(累代)에 걸쳐 충남(忠南) 아산(牙山)에 세거(世居) 하였는데 예립(禮立)이 정주(定州) 지방으로 이사하면서 선조(先祖)의 고향인 아산(牙山)을 본관(本貫)으로 삼았다. 그의 손자 석창(碩昌)은 조선 朝에 충익위(忠翊衛)를 역임했고 석창의 아들 극준(克峻)은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용궁최씨 (龍宮崔氏) 始祖 : 玄 (현)

해주최씨 시조 온(溫)의 후손이다. 고려 朝에 평리부밀직사사(評理府密直司使)를 역임하였고 그의 손자(孫子) 유(濡)는 군부판서(軍簿判書)로 충숙왕(忠肅王) 복위 8년(1399) 조적의 난 때 왕을 호종한 공(功)으로 성근익대협찬보정 일등공신(誠勤翊戴協贊保定 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하자 취성군(鷲城君)에 진봉되었다. 그후 공민왕(恭民王) 때 이르러 삼사사(三司使)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이에 후손들이 용궁(龍宮 : 경북(慶北) 예천군(禮泉郡) 용궁면(龍宮面)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였다.

 

탐진최씨 (耽津崔氏) 始祖 : 思全 (사전)

해주최씨 시조 온(溫)의 증손(曾孫)이며 문헌공(文憲公) 충(冲)의 손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1921년 개성의 묘소가 발굴되어 지금은 광주박물관에 있는 묘비명에 "사전의 조부는 상약국직장 최철, 부친은 장작감 최정이며, 그 선조는 탐진현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잘못임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의술(醫術)로 출사(出仕)하여 왕(王)의 신임을 받았다. 고려 인종(인종) 4년(1126) 조카사위 이자겸(李資謙 : 思諏의 첫째 사위)이 궁궐을 범하고 함부로 권세를 부리자 왕(王)과 협의하여 이자겸의 심복인 척준경(拓俊京)을 설득, 그를 제거하였다. 그 공(功)으로 공신(功臣)에 책록되고 병부상서(兵部尙書)가 되었다. 그후 승진을 거듭, 수태위 문하시랑 평장사(守太尉 門下侍郞 平章事)에 이르러 탐진백(耽津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탐진(耽津 : 전남(全南) 강진군(康津郡)으로 하였다. 그러나 오랜 병화(兵火)로 인하여 그 소목계통(昭穆系統)을 고증할 문헌이 없어져 버렸다. 그리하여 사전(思全)을 시조로 하고 그 후손 중, 응규(應奎), 준량(俊良), 효로(孝老), 총(聰), 윤덕(允德), 홍건(弘建) 그리고 유각(有恪), 정원(井元), 심충(深忠), 승태(昇泰), 장보(章甫) 등을 중시조(中始祖)로 기일세(起一世)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고 있다. 사전(思全)의 장남 변(弁)은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올랐고, 차남 열(烈)은 효인(孝人)이란 칭호를 왕으로부터 받았다. 또 중시조(中始祖) 응규(應奎)는 중서령(中書令)에 오르는 등, 탐진최씨 혈통을 이어 가문을 더욱 빛냈다.

 

나주최씨 (羅州崔氏) 始祖 : 井元(정원)

해주최씨에서 분관(分貫)된 것으로 잘못 알려졌던 탐진(耽津) 최씨 시조 사전(思全)의 후손으로 조선 세종 때에 진의부위(進義副尉)에 올랐다. 탐진최씨 족보에 의하면 정원(井元)은 강진파(康津派) 중조(中祖)인 준량(俊良)계에 합보(合譜)된 것으로 나타나 있고 나주(羅州) 최씨 족보에는 그의 손자 금남공(錦南公) 부(簿)가 전남(全南) 나주(羅州) 출신으로 조선 성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 한 후, 교리(校理)에 올라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왕명(王命)으로 표해록(漂海錄)을 저술하여 문명을 떨쳤다. 후손들이 충남 보령(保寧)과 청양(靑陽) 등지에 세거(世居) 하면서 금남공 부(簿)의 출신지 나주(羅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분적(分籍)했다고 한다. 대표적 인물로는 용운(龍雲)은 인조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고, 정순(廷洵)은 효종 때 형조참의(刑曹參議), 의현(毅鉉)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으며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지낸 사권(事權)은 나주최씨의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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