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辛丑譜 序
무릇 선조를 공경하고 조상을 높이며 집안들과 두텁게 지내고 친척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동양도덕의 근원이고 바로 우리나라 고유의 아름다운 풍속이다. 족보란 것은 바로 보(普 : 두루 넓다)이니 집안 친척들을 두루 합하여 그 이름을 모아 싣기 때문이다. 계파대로 나누고 항렬대로 베풀며 소목(昭穆)을 밝히고 종손(宗孫)과 지손(支孫)을 서술하는 것이다. 비록 100세(世)가 지나 촌수가 멀어졌더라도 이 족보를 살펴서 보면 서로 같은 뿌리의 친척인 것을 알게 되어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게 된다. 옛사람들이 족보 엮기를 중하게 여긴 것도 다 이러한 까닭에서였다.
해주최씨는 우리나라의 큰 성(姓)이다. 해동부자(海東夫子) 문헌공(文憲公)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9백여년 동안 도덕(道德), 절의(節義)와 효우(孝友), 문장(文章)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고 높은 벼슬을 서로 이어받아 자손이 번성하였다. 근원(根源)이 깊은 샘은 길게 흘러가고 뿌리가 단단한 나무는 그 가지가 길게 뻗는다더니 참으로 그러하다.
해주최씨는 족보를 모두 다섯차례나 엮었는데 가장 마지막에 엮었던 기미보(己未譜)도 또한 벌써 40여년이나 지났다. 그 사이에 6.25 동란을 겪으면서 친척일가들이 죽고 살며 옮겨 다니게 된 변화가 평상시절의 몇 갑절이나 되었으니 족보를 긴급하게 다시 엮어야 될 사정은 참으로 정세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무술년(1958년) 봄에 대종회를 열고 이렇게 논의하였다. 『지금 족보를 다시 엮을 일은 하루라도 늦출 수가 없다. 게다가 문헌서원(文憲書院)이 이역(異域)으로 들어가 제사를 드리지 못한지가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영당에 진영(眞影)을 받드는 일도 또한 금일에 아니할 수가 없다. 이 두 가지 일은 어느 것이 더 급하고 덜 급한지를 가릴 수가 없으니 한꺼번에 일을 시작하여 함께 추진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이에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옳다고 하였다. 그래서 각지에 글을 띄우고 서울에다 보소(譜所)를 열어 일을 진행하였다. 먼 곳과 가까운 곳에 있던 여러 친족들이 정성을 아끼지 않고 힘을 다하여 한 목소리로 호응하였다. 간부와 유사들도 부지런하게 일을 보아 그 이듬해 기해년(1959년) 가을에 영당을 새로 지었다. 또 2년 뒤인 신축년(1961년) 봄에 족보 엮는 일을 모두 마쳤다.
이 족보를 장차 인쇄에 부치려고 하면서 후손 원보(元溥), 경근(庚根), 영직(泳稷)이 그러한 사실을 갖추어 와서 나에게 머리말을 부탁하였다. 나는 문헌공(文憲公)에 대하여 평생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으며 또 머리말을 애써 구하려는 뜻을 저 버리기 어려웠다. 문장을 못짓는다고 할 수도 없었고, 또 내가 느낀 바도 있었다.
무릇 한집안의 후손들이 번성하고 창대해지는 까닭은 조상들이 인덕(仁德)을 쌓은 그 나머지가 아님이 없다. 후손된 자들이 조상의 뜻을 공경하여 받들고 자기가 할 도리를 다하면 갈수록 더욱 창성해질 것을 어찌 다 알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無念爾祖 聿脩厥德 (무념이조 율수궐덕 : 그대의 조상을 잊지 말고 언제나 덕을 닦으라) 하였으니 덕을 닦는 것이 바로 조상의 뜻을 생각하는 결실이다. 또 [서경]에 이르기를, 克明俊德 以親九族 (극명준덕 이친구족 : 큰 덕을 밝혀 구족을 친하게 하였다) 하였으니 덕(德)을 밝히는 것이 친척들을 친하게 하는 근본이다. 그 요점을 말한다면 조상을 공경하고 친척들과 도탑게 지내는 것도 그 근본은 덕(德)을 힘쓰는 데에 있다.
바라건대 지금부터 각자 스스로 덕에 힘써 한편으로는 조상을 높이고 공경하는 도리를 다하며, 또 한편으로는 친척과 도탑게 화목하는 도리를 닦는다면 집안이 어찌 창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금일 해주최씨 집안 여러분들이 족보를 다시 엮는 뜻을 여기에 있음을 알고 덕(德)을 힘쓰는 의(義)를 기록하여 사족(蛇足)같은 한 마디를 덧붙인다.
단기 4194년(서기 1961년) 신축 9월에
- 성균관 부관장(成均館 副館長) 죽계(竹溪) 안인식(安寅植) 삼가 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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