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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공 일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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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역사 > 시조 > 문헌공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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誕生 (탄생) 옛날부터 거룩한 인물들의 탄생에는 으레 설화(說話, 신화나 전설)가 따른다. 「문헌공」 선조님이 태어나실 때에도 나라의 학문이나 예술이 크게 일어나는 운세를 상징(象徵, 직접 보이지 않는 사물을 연상시키는 내용물)한다는 규성(奎星, 이십팔수의 열다섯 번째 별)이 하늘에 엉기여 우리 해주최씨의 시조이신 온(溫) 선조님의 집 쪽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문헌공」충 선조님이 태어나신 곳은 황해도 대령군(지금의 황해도 해주시)인데, 아버님 되시는 온 시조님은 집안도 부유한데다 고을에서 호장으로 아주 명망이 높은 분이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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壯元及第 (장원급제)
「문헌공」 충 선조님은 재주, 슬기, 풍채 등이 아주 빼어나신 어른이셨다. 거기에다가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열심히 하셨기 때문에 주위에서는 장래가 크게 기대되는 인물로 여겼다. 갓 스무 살이 되시는 해에 과거에 응시하셨는데, 문과(文科, 문관을 뽑는 과거)에서 과거 등급의 가장 으뜸인 갑과(甲科)에 장원(壯元, 수석)으로 급제(及第, 합격)를 하시었다. 그리하여 순탄하게 벼슬길에 오르시고 목종, 헌종, 덕종, 정종, 문종까지 다섯 분의 임금님을 섬기면서 신하로서는 가장 높은 벼슬인 문하시중(門下侍中, 지금의 수상)을 지내시고 또 여러 개의 공신칭호(功臣稱號, 나라를 위해 공적이 많은 신하에게 특별히 내리는 칭호)를 받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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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將入相 (출장입상)
문관(文官)으로서의 높은 학식과 경륜에다, 무관(武官)으로서의 군사지식까지 고루 갖추신 「문헌공」 선조님께서는 나가셔서는 장수이시고 돌아오셔서는 재상이었다. 임금님께서는 당시 “북쪽변방의 경비를 단단히 하기 위해 성(城)을 넓히는 등 임무를 다해주기 바란다.” 라고 하시었다. 이때 「문헌공」 할아버님께서는 성과 보(堡, 적을 막기 위한 진지) 14개소를 새로 구축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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執務光榮 (집무광영)
타고난 성품이 근면 성실하셨다. 「문헌공」 할아버님께서는 오로지 나라 다스리는 일에만 열중하시었다. 다시 말해서 사사로운 일은 멀리하시고 나라와 백성들을 위하는 일에만 신명을 바치셨다.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시좌객(示座客)은 나랏일에 바쁘실 때의 심경을 읊으신 것이다.
‘물 가운데 정자 시원한 대청이 나를 부르는데도 문서 더미 속에 쌓여 세월을 보내는구나. 붉은 앵두, 자줏빛 죽순(대나무순) 철이 지나려 하는데 붉은 무궁화와 석류의 모양은 역시 곱기만 하구나...(이하 생략)’ <시좌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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戒二子詩 (계이자시)
「문헌공」 할아버님께서는 유선(惟善), 유길(惟吉) 두 아드님을 두셨는데, 아드님께 대한 교육이 무척 엄격하셨다. 특히,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두 아드님을 훈계하시는 글 계이자시(戒二子詩)는 우리들 후손에게 큰 가르침이 되고 있다.
‘우리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좋은 물건은 없으나 오로지 갑진 보배를 간직해 내려오는 것이 있다. 문장을 비단으로 여겼고, 덕행을(德行)을 곧 옥으로 생각했다. 오늘날 서로에게 이르는 말은 부디 뒷날에도 잊리를 말아라. 그러면 나라를 위해 귀히 쓰이는 인재가 되고 대대로 더욱 더 번영할 것이다.’ <계이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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宴會場參席光榮 (연회장참석광영)
고려조 전반기(前半期)에 있어서 해주최씨는 그야말로 명문세도 가문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문헌공」 선조님이래 조상님들이 대를 이어 높은 벼슬길에 올랐으며, 나라의 재상 자리를 맡은 조상님만 10여 분이 계셨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부러워하며 예찬한 글이 전하여 오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임금님이 나라의 원로들을 위해 베푸시는 연회장에 두 아드님의 부축을 받고 참석하시는 「문헌공」 선조님의 모습을 보고 당시의 한림학사(翰林學士) 김행경은 ‘상서령(尙書令)이 중서령(中書令)을 모시고, 을장원(乙壯元)이 갑장원(甲壯元)을 부축하셨네.’라고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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凡杖下腸 (범장하장)
「문헌공」 선조님께서는 춘추가 70세 되시던 해에 연세가 많으심을 이유로 임금에게 벼슬길에서 물러나시겠다고 주청을 하셨다. 그러나 임금님께서는 “시중 최충은 이 나라의 정사를 맡아 주어야겠다.”고 하시면서 팔걸이의자와 지팡이를 친히 내려 주셨다. 그리고 최고의 공신칭호인 추충찬도협모동덕윤리공신(推忠贊道協模同德允理功臣)칭호와 개부의 삼사수태사 문하시중 상주국(開府儀 三司守太師 門下侍中 上柱國)이라는 인신(人臣)으로서는 가장 높은 벼슬을 더해 주셨다. 「문헌공」 선조님께서는 능력과 인품이 뛰어나셔서 임금님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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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齋 (구재)
「문헌공」 선조님께서는 76세가 되시던 해에 중서령을 마지막으로 스스로 벼슬길에서 물러나시고 나라의 인재(人材)를 기르는 교육사업에 힘을 쏟으셨다. 고려수도 개경 자하동에 구재학당(九齋學堂, 아홉 채의 학당에다 아홉 과정의 교과를 설치하였다.)을 세우고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게 하셨다. 한편, 당시의 교육기관은 국자감(國子監)이라고 하는 국립(國立) 교육기관이 있었으나, 사립(私立)으로는 구재학당이 처음으로 세워졌고, 규모로 보나 짜임새 면에서 구재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교육기관'이 되는 배경이 되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문헌공」 선조님을 '해동의 공자(海東公子)'로 일커르게 되었고, 조선왕조에서도 높으신 뜻을 받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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