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醇正儒學祖宗

私學之元祖

海東孔子

 

文憲公 諱 冲 先祖 眞

 

 

 

 

2世祖 : 문헌공화상찬(文憲公畫像讚)

기자(箕子)의 교화(敎化)도 벌써 멀어졌고 성인(聖人)의 법이 무너졌다. 문명(文明)의 징조가 나타나 규성(奎星)에 다섯별이 모여들었다. 이러한 시기에 문헌공(文憲公)께서 탄생하셨으니 금옥(金玉) 같은 그의 지조(志操)며 물과 달 같은 그의 정신이었다. 학문은 경()에 근본을 두었고, 지식은 하늘과 사람의 이치에 통달하였다. 덕행(德行)을 보물로 여겼으며 청렴과 검소를 몸에 새겼다. ()은 효성과 우애를 철저히 하였고 의()는 학문을 바로 잡아 일으켰다. 성명(誠明)으로 교육의 바탕을 세웠고 예()를 바로 잡아 백성들을 깨우쳤다.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 임금은 임금 노릇, 미개한 문화를 변혁시켜 윤리를 정해놓았다. 도학(道學)을 우리나라에 수립함에 있어서 세우신 수훈(首勳)은 백세(百世)가 지났어도 오히려 새로워진다.

 

-양촌(陽村) 권근(權近) 지음-

 

 

2世祖 : 문헌공중수화상찬(文憲公重修畫像讚)

나라에서는 주춧돌과 같은 공적을 세웠고 개인으로서 학교를 설립한 것은 유학계(儒學界)의 큰 공헌이다. 문헌공(文憲公)의 덕은 학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후학들이 존중하는 마음으로 높은 풍모를 영원히 우러러본다.

 

영락(永樂) 3朝鮮 태종 5(1405) 乙酉 춘정월

-11대손 예문관직제학 지형조사(藝文館直提學 知刑曹事) ()이 중수함-

 

 

2世祖 : 문헌공화상개모기(文憲公畫像改模記)

문헌공 최선생은 학문이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관통하였고 도는 렴()과 민의 학설(宋代의 성리학)과 일치하였으니 곧 우리나라 성리학(性理學)의 시조다. 아들 문화공은 부친의 전통을 잘 이어 받아서 이단(異端)을 배격하며 정도를 옹호하였다. 모두 고려의 역사에 살려서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 우리나라의 신재(愼齋) 주세붕이 서원을 창건하고 두 분을 함께 모셔 제사를 드렸으며 원래 있던 두 분의 화상(畫像)을 영락(永樂) 을유년에 새로 수리하여 양촌(陽村) 權公(권근)이 찬을 지었고 다시 명종 을축년에 모사하여 서울 집에서 본원에 옮겨 모실 때에 명곡(明谷) 崔公(최석정)이 제문을 지어서 고하였다. 그 뒤 135년이 지난 기묘년에 후손 영의(永儀), 진동(鎭東) 등이 오래 갈수록 더욱 낡아질 것을 염려하여 그 보존책(保存策)으로 다시 벌번을 모사하고 사당을 수리해 공경히 받들어 모셨다. 꼭 공자께서 자리에 계시는데 백어(伯魚)가 마당에 쫓아가는 것을 보는 듯 했다. ! ! 훌륭하도다. 정자(程子)는 머리털 하나라도 닳지 않으면 곧 딴 사람이라 했는데, 지금 800년이 지나는 동안 수리한 것이 한 번이요. 옮겨져 모사하기를 두 차례나 하였으니 어찌 조금도 본 모습과 틀림없다 할 수 있으랴. 그러나 옛적 공자(孔子)가 죽은 뒤 유약(有若)을 스승으로 삼고자 했던 것도 유약이 공자와 닮았던 탓이 아니겠는가? 화상을 그리는 화가의 말대로 다만 7푼 정도라 해도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많이 변하고 퇴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000년 후에 앉아서 몇 푼 정도의 비슷함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벌써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는 일찍 모사하기 이전에 뵈온 적이 있는데 풍겨오는 빛이 환하게 밝고 봄바람이 자리에 가득하여 거의 직접 교훈을 받는 듯한 느낌을 가졌다. 더구나 그분이 사시던 고장에 살면서 이 서재에 머무르는 사람이면 출입할 적마다 선생의 지팡이와 신발의 시중을 드는 듯 할 것이며, 아침저녁으로 음성을 듣는 듯 할 것이니 성격을 바로 잡으며 덕을 도야하는 좋은 점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 ! 화상이 계시는 곳이 곧 도가 있는 곳이다. 후세 사람들도 영의(永儀), 진동(鎭東)과 같은 마음을 가진다면 선생의 는 영구히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숭정(崇禎) 기원 후 4번째 임진년 朝鮮 순조 32(1832)

-자헌대부 원임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사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지춘추관사 세손좌부빈객 오위도총부 도총관

(資憲大夫 原任吏曹判書 兼 知經筵 義禁府事 弘文館提學 藝文館提學 知春秋館事 世孫左副賓客 五衛都摠府 都摠管)

이면승(李勉昇)이 쓰다-

 

 

2世祖 : 문헌공화상봉안서원문(文憲公畫像奉安書院文)

삼가 생각하옵건대 남기신 모습은 길이 드리우기를 영세토록 할 것입니다. 후손들은 오래도록 영정을 받들어 모시며 시골에서 잘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해주(海州)는 공이 사시던 곳으로 사당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으니 이 영정을 사당에 걸어 모시고 받드는 것이 일로서나 도리로서나 마땅한 일입니다. 유림(儒林)들이 이 일을 의논하여 뜻을 모으니 모두들 달려와서 받들려 하였습니다. 다만, 잘 꾸몄던 영정 두루마기가 세월이 오래되어 찢어지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였기에 삼가 수리하여 새롭게 하도록 하였더니 일이 완성되었음을 알려왔습니다. 이에 좋은 날을 받아서 영정(影幀)을 수레에 싣고 해주로 돌아와 감히 깨끗한 잔을 올리면서 정성스럽게 고하여 아뢰옵니다.

 

-후손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 간재(艮齋) 규서(奎瑞)가 고함-

 

 

2世祖 : 문헌공중수화상봉안문(文憲公重修畫像奉安文)

아! 우리나라는 땅이 미개한 지역에 가까이 있으니 은(殷)나라 태사(太師)였던 기자(箕子)가 가르침을 베풀어 문교가 처음으로 드날리게 되었습니다. 역사가 신라와 백제에 이르러서는 유학이 녹듯이 풀어져 버렸습니다. 세상의 풍속은 무식해져서 가시나무를 다듬지 않은 것처럼 난잡해졌습니다. 고려 중엽에 문운(文運)을 주관하는 규성(奎星)이 모이는 운을 당하여 하늘이 우리나라로 도를 옮겨오는 복조(福祚)를 내리니 곧 문헌공께서 태어나셨습니다. 훌륭하신 선생님이시여! 선생께서는 중국의 정자(程子) 형제들과 주자(朱子)보다 먼저 태어나셨습니다. 오직 당시에는 불교만을 숭상하였는데 공께서는 홀로 공자님의 가르침을 받드셨습니다. 구재(九齋)에 선비들을 불러 모아 가르치고 인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훌륭한 학생들은 화려하고 다양하게 청하여 물었으며 백성들은 예절과 겸양을 실천하고 선비들은 유학 경전들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참으로 뛰어나셔서 유가(儒家)의 용마루가 되셨고 진실로 우리나라에서 훌륭한 선비이셨습니다. 나라의 왕정(王庭)에서 드날리셨으니 기린이 나오고 봉(鳳)새들이 모여드는 태평성대가 되었습니다. 이에 문화공이 나시니 나라의 귀한 인물이 되셨습니다. 이교(異敎)를 배척하고 정도를 잡아 왕께 간하여 아름다운 것을 크게 건지셨으니 명예와 덕망을 대를 이어 드러내셨습니다. 높고 높은 수양산(首陽山)은 저 바닷가에 우뚝 솟았습니다. 이곳에 공의 영정(影幀)을 걸고 편안히 모시니 제기들은 가지런히 놓여있고 후손들이 거듭 나란히 흠양한 일이 유원에 빛났습니다. 마을은 주자(朱子)의 출생지 무원과 같고 남기신 자취는 자하(子夏)가 글방을 열었던 서하(西河)와 비슷합니다. 질과 문이 여러 번 변하여 법도가 더욱 멀어지더니 다행스럽게도 이 영정이 자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두 폭의 초상화에는 엄연히 살아 계실 때의 모습이 드러나 있고 관복을 입고 너그럽게 떨치시니 보는 사람들이 허리 굽혀 경건히 인사드립니다. 이처럼 영정을 옮겨 모셔다가 사당의 위판(位版)에 배향하니 두 분의 신명과 형상이 서로 의지하여 눈으로 보매 도가 드러납니다. 황홀히 아버지를 모심은 공이(孔鯉)가 아버지 공자(孔子)의 뜻을 받듦과 같고 더욱 간절한 것은 안자(顏子)가 공자(孔子)의 도(道)를 뚫을수록 단단하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풍채가 새로워지니 사당(祠堂)의 모습도 더욱 빛이 납니다. 이 좋은 아침을 가리어 맑은 술을 잔질하여 올리며 향불을 사르오니 혼령이 있으시다면 보잘 것 없는 음식이나마 흠향(歆饗)하시옵소서.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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