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箕子)조선이 건국되면서 중국의 한자문화가 유입되고 위씨(衛滿)조선 때에 이르러 그 풍습들이 본격적으로 전해지면서 당시 국왕(國王)과 중앙의 대신(大臣 : 각 촌장)들이 자신의 신분과 부족을 표시하기 위하여 점차 성(姓)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는 고대 씨족사회가 점점 분화되어 소수부족 지배사회로 전환되어감에 따라 타 씨족과의 구별은 필연적이었으며 이러한 호칭이 대대로 세습됨에 따라 자연스레 그들의 성씨로 정착하게 되었다.
'위만조선 말엽(기원전 128년)에 압록강 중류지방에 있던 멸군(滅君) 남려(南閭)가 28만구를 인솔하고 위만조선의 예속에서 벗어나고자 한(漢)나라에 귀속을 청했다'하여 그 성(南)을 나타내고 있으며 위씨 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 때의 대신이던 성기(成己), 로인(路人), 한음(韓陰), 삼(參)과 장군(將軍)이던 왕겹의 이름도 보인다. 또,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 한전(漢傳)에 인용된 위약(魏略)을 보면 '중국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나라 지황년간(地皇年間 : 서기 20 ~ 23년)에 진한(辰韓)의 우거수(右渠帥) 염사치(廉斯齒)가' 운운하여 성과 이름을 동시에 적고 있고, 서기 30년 낙랑군(樂浪郡) 토호(土豪) 왕조(王調)가 한인 태수 유헌(劉憲)을 죽이고 하는데서는 처음으로 토착인의 성명을 밝히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성씨의 사용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것이다.
또한 '부여(夫餘)에서는 선비족(鮮卑族) 모용외(慕容畏)의 침략을 받아 국왕 의노(依盧)가 자살하였고 다시 모용황의 침입으로 국왕(國王)인 현(玄)과 함께 5만명이 포로로 잡혀 갔다'에서 당시 국왕을 현(玄)으로 표시했는데 이것이 성씨(姓氏)였는지는 고증할 길이 없으나 다만 후대에 내려오면서 성(姓)으로 삼았을 것이라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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