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高句麗) :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37년에 부여(夫餘)에서 내려온 해모수의 아들 주몽(朱蒙)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으며 시조 왕으로서 본 성인 해(海)를 버리고 나라이름의 첫 글자인 고(高)를 성으로 삼았다. '유리왕 14년(기원전6년)에 부여왕 대소(帶素)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고 유리왕 32년(서기13년)에는 부여군이 침입해오자 왕자 무휼(無恤)이 섬멸하였다'하여 그 이름들을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그들의 성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태조왕 69년(서기121년)에 이르러서는 '현도군과 요동(遼東)지방을 공격하여 요동태수 채풍(蔡諷)을 죽이고, 신대왕 8년(서기172년)에 한(漢)나라 대군이 쳐 들어오자 국상(國相) 명림답부(明臨答夫)가 굳게 성(城)을 지켜 격퇴하였다'하여 성과 이름을 동시에 기록하고 있다. 또 건국초기에 동명성왕 주몽이 신하들에게 내려준 극, 중실, 소실씨와 유리왕이 사성했다는 위, 우씨, 또 대무신왕이 사성한 낙, 부정, 대실씨가 있고 당시 재상이던 을두지, 송옥구를 비롯하여 그 후에 등장하는 목도루, 고복장, 을파소, 음우, 명림어수, 창조리 같은 이름도 보인다. 왕비나 왕모(王母)의 성으로는 예, 송, 우, 연, 주 등이 있었으며 그 유명한 연개소문이나 을지문덕이 또한 보인다. 결국 고구려의 중요 성씨는 왕성(王姓)인 해, 고를 비롯하여 을, 주, 송, 목, 우, 연, 명림, 을지씨로 일부 귀족들은 이미 8대 신대왕(서기 165~179년)이전부터 성씨(姓氏)를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 (百濟) : 삼국사기에 의하면 주몽(朱蒙)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19년이 되던 해(기원전18년)에 그 아들 온조(溫祚)가 남쪽으로 내려와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으며 백제 건국에 공(功)이 큰 여러 신하에게 각 성씨를 하사하였다. 이들을 십제공신(十濟功臣)이라 하는데 그 중에서 전섭(全攝)과 마여(馬黎)가 보이며 이른바 대성팔족(大姓八族)이라 지칭되는 사, 연, 이, 해, 진, 국, 목, 백씨도 등장하는 것이다. 이들 8대성은 처음에 그들 부족간의 구별적 호칭에 지나지 않았으나 점차 지도자급 개인에 대한 성씨로 나타내게 되었다. 후한서(後漢書)와 진서(秦書)등에는 백제 왕실의 성은 처음 우(宇)에서 여(余)라 하였다가 뒤에 부여(夫餘)씨로 썼다고 하며 이외에도 동부의 홀씨, 목리만치, 조미걸취, 제증걸루, 고이만, 흑치상치 등이 있고 개루왕 때의 도미, 당(唐)나라 고종으로부터 당씨를 사성받고 웅진도독이 되었다는 부여웅(夫餘雄)이 있다. 그러나 그 연원이 분명한 성씨는 그리 많지 않고 성씨의 최초 사용 연대는 서기 약150년 경의 7대 사반왕 전후인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新羅) : 삼국유사에는 신라 왕성인 박, 석, 김 3성(姓)의 전설인 난생설화(卵生說話)가 기록돼 있고 유리왕 9년(서기32년)에 육부의 촌장들에게 각각 최(崔), 이(李), 정(鄭), 손(孫), 배(裵), 설(薛)氏를 사성했다고 하며 사량부(沙梁部)를 사훼부(沙喙部),급량부(及梁部)를 훼부(喙部 : 탁부 또는 돌부)라 하여 비문에 자주 인용되는 것으로 보아 신라초기 권력의 핵심은 사량부와 급량부의 씨족들로 보여진다. 또 탈해왕(서기57~80년)때 '거도(居道)가 우시산국(于尸山國 : 영해)과 거칠산국(居柒山國 : 동래)을 정복하였다' 했으며 한참 뒤인 내물왕 22년(서기382)에는 '위두(衛頭)가 사신으로' 운운하여 그 성씨를 명확히 표기하였다. 신라가 성씨를 사용한 연대는 서기 약100년 경 전후로 추정되고 있으나 7세기 이전에 세워진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서울의 북한산비, 경남의 창녕비, 함흥의 황초령비, 이원의 마운령비)와 진지왕 시절로 추정되는 대구의 무술오작비, 진평왕 시대에 건립된 경주 남산의 산성비 등에서 왕의 수행자들의 성은 쓰지 않고 출신부(村)명과 이름만을 기록하여 의문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 소수부족만이 지도세력으로 형성된 점과 신분세습 등에 비춰볼 때 굳이 성(姓)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 부족명(部族名)만으로 구별이 가능했다고 볼 것이다.
발해 (勃海)와 후삼국(後三國) : 고구려의 구장(舊將)이던 대조영(大祚榮)이 신라통일 직후인 서기 698년 현재 만주지방(길림성 돈화현)인 동모산에서 세운 나라로 처음에는 진국(震國)이라 하였다. 후당서(後唐書) 발해군(渤海郡) 편을 보면 서기 732년에 발해 무왕이 흑수부를 치는 한편 장문휴(張文休)로 하여금 해군을 이끌고 산동성 등주(山東省 登州)를 치게 하였다 했으며, 당시 발해의 지배층 대부분이 왕족인 대(大)씨를 비롯하여 고구려 왕성인 고(高)를 쓰고 있었고 거의가 고구려 계통의 성씨였다. 또 일본에 파견된 정사 85인 중 만주식 성을 가진 사람은 6명뿐이고 그 밖은 모두가 한식 성을 쓰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고씨가 무려 26명이나 되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발해는 고구려와 신라의 기존 성씨를 그대로 쓴 것으로 추측되며 위 성씨 외, 서기 906년 당(唐)나라에서 신라인 최언위와 등제서열사건(登第序列事件)을 일으킨 오광찬과 그의 아버지인 오소도가 보인다.
또 신라 말 혼란기에 상주(尙州)에서 발기한 원종(元宗)과 애노(哀奴), 북원(北原 : 원주)의 양길(梁吉), 죽주(竹州 : 죽산)의 기훤(箕萱), 완산주(完山州 : 전주)의 후백제왕 견훤(甄萱), 양길의 부하였던 태봉국왕 궁예(弓裔), 그 부하였던 고려태조 왕건(王建) 등에서 보듯이 당시부터 이미 성씨가 상용되었고 다만 최하층 계급이던 천민들만이 성을 쓰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건국 후 태조가 귀부해 온 발해(勃海)왕자 대광현에게 계(繼)라는 이름과 왕(王)씨를 사성한 것을 보더라도 당시의 성씨 사용이 보편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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