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다망 하신줄 아오나 감히 글을 올려 疏를 드리게 됨을 이해 바라옵니다. 다름아니옵고 지난 9월 13일 열린 우리당 국회의원이신 김원웅(대전 대덕구) 의원께서 대전의 모 음식점에서 지역 친여 원로분들과 정국현안 논의 의 장에서 전시작통권 문제로 한나라당 초선 의원10 여명이 김의원에 생각과 반대 되는 행동? 을 하였다 하여 그들을 빗대어 ""한나라당은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최만리가 되겠느냐"" 하였고 이어서 ""현재 한나라당을 보면최만리를 연상 시킨다""라며 독설을 퍼부었다.(이는 대전일보 9월 14일 )에 기사화 되었던것을 올려 드린것 입니다.
존경 하옵는 대통령 님!!! 지금이 어느시절입니까? 일국에 국회 의원이란 者가 현재 국회통일 외교 통상 위원장이라는부서의 首長에 신분이며 공인으로서, 그것도 공식석상에서우리일족에게는 神과 같으신 선조님을 비방 폄하 발언을 하는 사태(우리 해주 최씨 일문은 사태로 규정 지었습니다.)가 일어났던것입니다.해서 우리 해주최씨일족은 그사실을 알고 난후에 곧바로 대응 을 하였습니다. 김원웅 의원에게 공개 사과를 요구 하는 서한과 동시에 김의원의 홈피로 들어가 항의 하였던바,나흘이 지난 18일 오전 에 이메일로 김의원으로부터 답변을 받았습니다. 하온데, 그답변 내용은 불난집에 기름 끼었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내용인즉슨다음과 같습니다.
본인은 해주최씨와는 관계없이 지금 일반적으로 인터넷 상에 유포 되어 있는 ㅇㅇ대학??ㅇ교수의(죄송합니다 교수님의 존함을 함부로 올릴수 없음을 양지 하여 주십시요)인터넷상에 있는자료를 인용 하였다 하였습니다. 하온데 우리가 확인 한 바로는 김의원의 주장과는 상반된 내용이 있었습니다.이는 김의원 자신이 古史 도 잘모르고 識見도 없이 훌륭하신 남의 선조님을 중상 모략 하였다고 생각 되옵고, 또, 김의원 자신은 남이 자신의 조상을 비방 한다 하여도 별로 개의치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5000년 유구한 역사 속에 우리선조님이나 현재의 우리가배운것 하고는 전혀 앞뒤가 않맞는다 생각 합니다. 왜냐하면 이나라 대한민국은 애초부터 崇祖思想 으로 이어진 세계어느나라에서도 그유래를 찾아볼수 없는 하나의 문화 유산 으로 알고 지키고 계승하는 나라인것을 어찌! 김의원만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까? 崇祖精神 도 없는 김의원 자신의 자질을 스스로 자인 하는 대목인 것 입니다. 또한, 김의원 자신은 별로 한말이 없는데 우리 해주최문이 과민 반응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다시 바꾸어 말씀 드리면, 김의원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 우리해주최문이 난리를 친다 가됩니다. 하오면 우리 해주최문전국 30만 종친이 정신 병자라는 이야기 밖에 달리 해석 할수가 없습니다.가만히 있는사람을 해꼬지 하니 말입니다 이런행동은 정신 병자나 하는게 아닐지요.? 또한 청와대에 이백만 홍보수석도 우리 선조님에 대하여 언급 하였다 들었습니다 금년 4월 10일 날자 입니다. 또한 이병완 비서실장도 언급 하였다 들었습니다. 청와대 내에서는 공공연하게 우리선조님을 자주 인용하셔야만 국정 운영이 잘되는지는 모르오나 하찮은 저같은 필부는 통탄 하고 있습니다.그분들에게 하문하여 주십시요. 우리 해주최씨 알문이그들과 같이 공공연히 공식석상에서 그들의 선조를 헐뜯어도 그들의 마음이 편한지 말입니다.
존경하옵는 대통령님! 우리 해주최씨 일문이 의원님들 의정활동 하시는데 걸림돌이 된적도 없고 더우기 훌륭하신 선조님(집현전부제학(휘)만리) 공 께서는 더욱 그렇지 않을진대. 어쩨서 청와대에서나 국회 의원들 의 입에서 우리 선조님의 이야기가 그것도 좋지 않은 표현을 할때만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쩨서 역사의 인물을 본인들의 잣대로 재어서 비방 또는 폄하 하는 일이 생기는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자고로 역사는 만들어지는게 아니라 쓰여진다고 배웠습니다. 하여서 작금의 김원웅 의원의 행태(이렇게 표현하여 죄송 합니다)를 도저히 묵과 내지는 좌시 하지 않을것 입니다. 김의원 그분도 자식을 낳아 기르실테지만 우리 해최 일문은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崇祖精神을 바탕으로 하여 자녀를 양육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 이란 말입니까? 이럴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우리 일문은 참으란 이야기는 아니겠지요.이번사태는 김원웅 의원께서 정식적으로 우리 해최 일문에게 공식 사과를 하고,부제학공(휘)만리 선영에 가서 부복하는것만이 해결되는것이라 사료 됩니다.
존경하옵는 대롱령님! 우리 일문은 결코 정치적인 의도는 분명 없다는것을 밝혀 두는 바이옵고, 특히 여당 국회의원의 행적에 누를 끼치게 함이 아님을 고지 하여 주실것을 당부드리오며 부제학공 선조님의 자료가 아래 있사오니 살펴 보시와 답변을 바라나이다, 끝까지 보아주실것도 당부드립니다. 건강 하십시요 대통령님! 그리고 남으신 임기동안 진짜 멋있는대통령님이되시길 바라나이다.
해주최씨 대종회 청년국장 겸,중앙청년회 회장 대행겸,부제학공 후손종회 청년 회장 최영길 배상
崔萬理는 한글 창제의 반대론자인가?
오환일(유한대학교 교수)
최만리(1394?~1445:태조3년?~세종27년)는 세종때의 문신으로 역사에서 보기 드문 청백리로 뽑힌 분이다. 공의 출생 년대는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그의 관력을 조급해 보면 조선 건국 초기인 1394년 (태조 3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는 1419년 (세종 즉위년)에 중광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과 집현전 박사로 관직에 진출한후 1439년(세종21년)에 1년간 강원도 관찰사로 외직에 부임 한것을 제외 하면 1445년(세종27년)운명할 때까지 집현전에서 봉직 하였다. 공의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 백련봉 기슭에 있으며 그곳에는 공의 후손인 해주최씨가 집성촌을 형성하여 세거 하고있다. (典翰公派:옮긴이) 공은 황희 정승과 함께 청백리로서 우리 역사에서 명성을 떨쳤으나, 한글 창제에 반대한 사대모화자(事大慕華者)로 매도 당하기도 한다. 공이 올린 상소(이른바 한글반대상소 라 칭하는것)의 실상을 밝히는것은 공의 업적을 바르게 이해 하고, 역사를 바르게 해석하는 데 중요한 문제이다.
최만리를 한글 창제 반대론자로 보는것은 그가 1444년(세종26년)2월20일 에 올린 上疏文(조선왕조 실록 103권 세종26년 갑자 2월)에서 비롯되었다. 통용 甲子上疏(갑자상소)라 하는 이 상소문의 내용은 먼저 언문을 제작하신것이 지극히 신묘하나 臣(신) 등이 좁은 소견으로 볼 때 의심되는점이 있어 조심스럽게 그문젯점을 열거 하오니 살펴 허락해 주실것을 바란다고, 하면서6개항을 제시 하였다. 그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조선은 옛부터 선진문명을 자랑하는 중화권에 속해 사대 외교로 문물을 흡수 하면서 문화를 발전 시켰다. 이제 오랑캐들과 같이 독자적 문자를 만들어 사용한다면 明(명)과의 외교 문제가 발생 할수 있고, 선진 문화권에서 이탈하여 학문이 쇠퇴하고, 정치에도 이익이 없다. 더구나 언문(운회언해를뜻함))창제는 풍속을 바꾸는 중대한일로 충분히 검토 하여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인데 너무 급하게 서두르는것이 아닌가. 또한 주상께서 안질 치료를 위해 초정리 약수터에 행차하여 행재소에서 까지 언문 연구에 골몰 하시는것은 옥체를 조섭 하는데도 이롭지 못하다. 여기에 聖學(성학)으로 왕재(군왕으로서 배워야할 일)를 연마할 동궁(후에 문종)이 文士(문사)의 六藝(육예)중 한가지에 불과한 언문 연구에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내용이다.
최만리가 疏頭(소두)가 되어 집현전 학자 6명과 함께 올린 갑자상소는 언문창제 반대 상소가 아니라 언문 운회언해를 계획 한것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어 당시 집현전 최고 책임자인 부제학으로서 집현전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상주한것 이라 하겠다. 세종이 諺文廳(언문청)을 설치하고 음운과 문자에 관한 연구를 거듭하여 1443년(세종25년)에 마침내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그후 세종은 한글의 실용화를 실험하고 韻會諺解(운회언해)를 위해 의사청에 집현전 학자와 동궁을 비롯한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 9인이 모여 논의 하게 된다. 이때가 1444년(세종26년) 2월 16일 로 甲子上疏 를 올리기4일전이다. 때문에 甲子上疏를 올린 직접적인 동기는 의사청에서 韻會諺解를 계획한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운회언해란: 한자음에 언문으로 중국식 발음으로 토를 다는일)(옮긴이) 최만리가 갑자상소를 올린 참뜻은 무엇일까? 公(공)도 집현전에서 27년간 봉직하면서 최고책임자인 부제학으로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한글창제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였다. 그러한 그가 한글창제를 반대하려면 한글이 창제 되기전1443년(세종 25년)에 할 것이지 한글이 완성된 후 1년이 지난뒤에나 갑자상소를 올렸으니 이상소는 한글창제 반대상소라 할수없다. 마침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이 창제되어 明(중국)과의 사대외교문제, 중화문화와의 관계가 소홀해지고 학문 발전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하고 있던중 의사청에서 韻會諺解(운회언해)를 계획하자 한글창제와 같이 중대한 일이 신중히 처리 되지 못하는 점에 불만을 갖고 더욱이 왕의 옥체도 돌볼 겸, 동궁(문종)의 왕재수업도 충실히 할것을 강조 하면서 최만리가 집현전 학자들의 의견을 수합하여 疏頭(소두:상소 하는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어 甲子上疏(갑자상소)를 올린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만리가 올린 甲子上疏(갑자상소)가 한글 반대 상소로, 최만리는 한글창제를 반대한 事大慕華者(사대모화자)로 널리 알려진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일찍이 국어학자 김윤경은, 광복후에 우리 한글이 일제통치시에 온갖수난을 당하였고, 그이전 연산군 때도 탄압받아 널리 보급 되지 못하였으며 창제 초기부터 반대론자들에 의해 천시 당하였음을 역설하면서 한글 사랑과 보급에 더욱 힘쓰자는 취지를 강조 하다보니 갑자상소를 한글반대 상소로 잘못 해석 한데서 비롯 된것이다. 그후 역사학자 이병도, 국어학자 이숭녕과 남광우, 정치사학자 신복룡 등이 김윤경의 잘못된 해석을 비판하면서, 최만리의 갑자상소는 한글 반대상소가 아니라 한자음 개신을 위한 音韻諺解(음운언해) 간행에 반대한 내용임을 밝혔다.
최만리는 세종때 명재상 황희와 함께 우리역사에 특기할만한 淸白吏(청백리)로서 국가를 위해 충심으로 직간을 서슴치 않았고, 세종도 그의 직간이 충성심과 愛民思想(애민사상)에 본뜻이 있음을 익히 알고 있기에 특별히 총애하면서 어려운 정사에는 항상 의논할 만한 충신 으로 여겼다. 그의 갑자상소도 잘못 알려진 한글반대 상소가 아니며 韻會諺解(운회언해) 에대한 의견을 개진 한것이요, 신중하게 언어정책을 추진하여 문화발전, 明(명)과의 외교문제, 왕의 건강 문제, 동궁(문종)의 학업 등 고려 할것 을 諫言(간언)하는 것으로 충성심에서 올린 글이다. 때문에 세종도 그의 본뜻을 이해 하고 형식적으로(군왕의위엄?) 하루 의금부에 감금 하였다가 곧바로 석방하여 복직 시킨 것이다. 갑자상소가 한글반대 상소라면 세종이 심혈을 기울여 추진했던 한글 창제를 반대한 갑자상소를 용납 했겠는가?
그래서 갑자상소는 한글 반대 상소가 아니요 오히려 충성심 에서 올린 直諫(직간)임이 분명 하므로 갑자상소와 최만리에 관한 잘못된 평가는 즉시 시정되어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올바르게 애국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