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하면 아울러 연상되는게 아마도 ´최만리´라는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지금껏 인식되어온 최만리의 모습은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를 반대한 사대주의의 인물로 비쳐져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보면 최만리의 또다른 면모를 엿볼수 있습니다. 따라서 최만리라는 인물을 추적해 보는것도 그 진실을 찾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최만리는 아쉽게도 생년은 미상이고, 1445년(세종 27년 乙丑) 10월 23일 별세 하였고, 1414년(태종14년 甲午)에 사마시에1419년 (세종1년 己亥)에 문과에 급제한후 홍문관에 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대략 1400년을 전후해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국조방목]에 의하면 최만리의 본관은 해주인데 해주 최씨의 시조이자 고려시대때 해동공자로 칭송받던 ´최충´이 바로 최만리의 12대조라고 합니다. 그리고 최만리의 아버지 휘자는 ´최하´(예빈시소윤공)라고 합니다. 본시 학문이 깊었던 최만리는 집협전에 들어가 ´박사´가 되고 다시 직제학을 거쳐 1439년에는 강원도 관찰사가 됩니다 이듬해인 1440년 최만리는 집현전 부제학에 제수되면서 다시금 서울에 올라오게 됩니다. 그후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의 품계)에 봉해지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고 된 것으로보아 그의 인품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상이 국조방목에 나타난 최만리에 관한 개괄적인 기록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사대주의자로 낙인찍히게 된 원인을 제공한 최만리의 상소문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최만리의 상소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가 완성된 1443년의 이듬해인 1444년 연초에 올려졌다고 합니다(세종실록 1444년 2월20일자 기록) 그런데 여기에 실린 최만리의 상소문을 보게 되면 최만리는 먼저 서두에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왕의 업적이 ´지극히 신묘하여 사리를 밝히고 지혜를 나타내심이 천고에 뛰어난 업적임´을 경하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는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했다는 기존의 우리인식과는 분명 대치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최만리는 이 상소에서 몇가지 우려를 지적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러한 최만리의 우려가 그에대한 우리의 인식이 왜곡되게 한 원인제공이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최만리가 지적한 우려는 첫째 훈민정음을 쓰노라면 한문을 사용하지 않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백성이 장차 중국의 예법을 모르게 될 것이니 그 점이 걱정스럽다는 것. 둘째 훈민정음 창제는 집현전의 고유업무인데 동궁(문종)과 함께 집현전의 소장학자들이 국사를 논의하는 ´의사청´에 불려가 일을 처리하는데에 대한 불평. 셋째 음운학상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 사이의 견해차에 대한 설명 넷째로 세종대왕의 건강악화에 대한 심려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로 인해 건강이 극도로 악화 되었다고 합니다 훈민정음 창제를 위해 몸을 거의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때에 시력이 나빠진 세종은 자주 휴양을 떠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훈민정음 관계 자료만큼은 꼭 챙겨서 떠났다고 합니다. 최만리는 특별히 이점에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것으로 비쳐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최만리에 대한 인식을 하게된 결정적인 단서가 된게 김윤경(1894 ~ 1969)의 저서 [조선 문자및 어학사]라고 합니다. 김윤경은 이 책에서 최만리를 ""한글 창제를 반대한 저능아의 발광""이라고 혹평했고 바로 이러한 김윤경의 평가가 우리사회에 그대로 이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최만리의 상소문에 나타나는, 한문사용의 부재로 인한 중국문화와의 단절과 중국의 제도를 버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것은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려한다면 그때의지식인으로서 충분히 가질수 있는 생각이라고 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새로이 엿보게 되는 것은 최만리는 분명 훈민정음 창제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는 점 그리고 훈민정음 창제 사업으로 인해 지나치게 세종의 건강이 악화되자 이를 훈민정음 창제는 곧 세종의 건강악화로 단순화 시켜 인식한 최만리의 확대해석이 오해의 소지를 남겼다는 점 등이 아닐까 합니다. 부연해서 우리는 흔히 훈민정음을 비하하는 말로 ´언문´이라는 표현을 써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이´언문´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다름아닌 세종 자신이라고 합니다.(세종실록 25년 12월30일자) 그래서 훈민정음의 보급을 위해 만든 관청의 이름도 ´언문청´이었다고 합니다. (세종실록 28년 11월8일자) 이를 종합해 보면 ´언문´이라는 말은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봐와는 달리 훈민정음을 비하하는 말이 아님을 알수가 있습니다.
[한국사 새로 보기(신복룡 지음) - 풀빛 발간 참조
문학박사 황재순(시교육청 장학사)
한글은 태어날 때부터 불쌍하게 태어났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글은 세종 시절에 어떤 실패한 정책의 부산물로 태어났다.
당시 세종의 개인적인 꿈은 한자의 한국식 발음을 모두 중국식 발음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중국의 한족이 몽고족인 원나라를 몽고로 쫓아내고 명나라를 세웠는데, 명나라에서는 그동안 몽고족에 의하여 망가진 한자 발음을 버리고 한족 고유의 한자 발음을 되찾고자 ""운회(韻會)""라는 책과 ""홍무정운(洪武正韻)""이라는 책을 펴 낸 바 있다. 세종은 그것이 부러웠고 이 기회에 우리도 모든 한자 발음을 중국식으로 바꾸어 국제화, 세계화에 앞장서고 싶었다.
그래서 세종은 이 두 책을 우리 말로 번역하려고 마음 먹었는데, 한자의 정확한 발음을 표시해 낼 수 있는 발음기호 같은 것이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기존의 한국식 발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한자만으로는 새로운 발음을 표시해 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종이 직접 집현전으로 가서 개인적으로 새로운 발음기호의 제작을 부탁한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부탁한 까닭으로 승정원일기에는 기록도 안 되어 있다. 당시에 집현전 책임자는 부제학 최만리였다. (대제학으로 정인지가 있었으나 당시 집현전 대제학은 겸직이었고 명예직이었기 때문에 실제 집현전의 업무는 하지도 않았다)
당시 최만리는 조선에서 가장 존경 받는 선비이자 학자였다. 공직생활 20 여년을 아무 이권도 없는 집현전에서만 근무한 진정한 선비였다. (중간에 사또로 한 번 발령 난 적이 있으나 집현전 일이 많아서 6개월 늦게 부임해서는 6개월 만에 집현전으로 다시 돌아온 적이 있다)
당시에 발음기호 즉 한글 개발 작업은 최만리 지휘하에 착착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집현전 귀신인 최만리가 그 일을 모를 리가 없고 세종의 신임 또한 두터웠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종합해 보건대 최만리가 한글 개발 실무팀의 대장이었음이 분명하다.
최만리 이하 집현전의 학자들은 세종이 새로운 옥편에 사용할 발음기호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구나 하는 정도로 이해하였고, 세종의 속셈이 우리 나라의 한자 발음을 명나라 한족의 중국어 발음으로 바꾸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따라서 집현전 학자들은 최만리의 지휘하에 순조롭게 발음기호를 하나하나 만들어 갔고, 드디어 1443년 음력 12월에 완성이 되었다. 이 때만 해도 이 글자가 얼마나 대단한 글자인지 그 진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세종도 최만리도 그저 이 글자가 나중에 다른 책을 쓰기 위한 소도구 정도로만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어디에도 날짜를 기록해 둔 사람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날짜도 없이 12월 기록 맨 끝에 추가로 기재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약 한 달 뒤에 세종은 중국식 한자발음 사전에 해당하는 ""운회´라는 책의 대대적인 번역사업 계획을 발표한다. 세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편찬위원 명단에 올랐다.
여기에 최만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집현전 학자들이 발끈하였다. 오랫 동안 써 오던 우리 나라식 한자 발음을 버리고 왜 중국식 발음으로 하느냐 하는 것이 불만의 요지였다. 당시 집현전 학자의 상당수가 세종의 새로운 음운정책에 반대하였고 세종에게 정식으로 상소문을 올리기로 하였다.
그래서 집현전 학자들이 공동으로 상소문을 써서는 최만리의 이름을 맨 위에 올려 놓았다. 이걸 보고 이번에는 세종이 발끈하였다. 그렇게 믿었던 최만리가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당장 그 일당을 잡아서 가두라 하였다. 그 때가 저녁 나절이었다.
최만리에게 직접 하문한 내용은 바로 이 한 마디였다.
""운(韻)에 대해서 뭘 아시오?""
<<중국어에서 운이란 발음에서 모음부분 이하를 말하는 것으로(산, 간, 만 발음에서의 [an] 발음) 한시를 쓸 때에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며, 중국 본토 발음인가 사투리 발음인가 하는 것을 가늠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세종은 이 기회에 정말 한자 문화권의 후진성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고, 최만리는 갑작스러운 발음 변동에 대한 대규모 혼란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최만리는 ""지금까지 힘들게 만들었던 그 발음기호들이 겨우 이런 일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인가"" 하면서 홧김에 발음기호(한글)에 대한 비판도 몇 마디 곁들였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되어 최만리가 한글창제 반대의 선봉에 섰다느니 별별 이야기가 다 나온다. 분명히 말하지만 한글 창제과정에서는 아무도 반대한 사람이 없었으며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위 상소문은 한글 창제 한참 뒤에 나온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세종은 사무실에서 투덜투덜 밤을 새웠고, 최만리, 신석조, 정창손, 하위지 등 집현전 학자들은 의금부 감옥에서 투덜투덜 밤을 새웠다. 날이 밝자 세종은 이들을 거의 다 석방하였다. 대학자들을 마냥 가두어 둘 수는 없었다. 여기서의 하위지는 나중에 사육신의 한 명이 된다. 정창손만을 파직시킨 것으로 보아 이 상소문의 책임 집필자는 최만리가 아니라 정창손일 가능성이 많다. 이 정창손은 나중에 영의정을 세 번씩이나 역임하는 대정치가가 된다.
그러나 최만리는 단단히 화가 났다.
""당신 같은 임금과는 일 못하겠소""
사표를 내고는 출근도 안 하고 집에 콕 박혀서는 아프다면서 생전 나오지도 않았다. 세종은 다급해졌다.
""집현전 부제학 자리는 항상 비어 있소. 언제든지 나오고 싶을 때에 나와 주시오""
최만리는 끝내 안 나왔고, 그로부터 1년 반인가 뒤에 세상을 뜬다.
최만리는 집현전 장기근속자답게 엄청 가난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더 존경했다. 세종조 청백리가 모두 15명인데 최만리가 서열 두 번째로 올라 있다. 세종 시절 청백리의 첫째는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한성부윤 ""정 척""이라는 분이었고 최만리 다음 서열로 청백리에 오른 분은 그 유명한 ""황 희"" 정승이다. 청백리에 오른 최만리는 역대 왕들의 위패가 있는 종묘에서 세종과 함께 모셔지고 있다.
그러나 해주 최씨 최만리는 어느 한글학자의 한번 실수로 한글 창제를 끈질기게 반대한 주모자로 오인되고 있다. 그 한글 학자는 일제시대의 일본학자 ""고쿠라 진페이""가 쓴 논문의 일부를 확대 해석하여 최만리를 엄청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최만리는 억울하다. 최만리 후손 해주 최씨는 조만간 최만리 복권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현재까지의 자료로는 최만리가 한글창제팀장으로 활약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기 때문이다. 최만리에 대한 상세한 논문은 이미 1950년대에 이숭녕 박사에 의해서 두 편인가 발표된 것이 있다.
그런데 기존의 선입관들이 너무 강하게 작용하여 아직도 많은 국사 책에서 한글창제를 끈질기게 반대한 사람이 많은 것으로 되어 있다. 조만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현재 가장 시급한 일은 최만리라는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비판하고 있는 중학교 국어 교과서부터 빨리 고치는 일이다.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도 ""나쁜 최만리""가 들어갈 뻔 하였으나 마침 그 때 필자가 교과서심의위원으로 있던 때여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다행히 뺄 수 있었다.
세종의 소원이었던 한자발음의 중국화 정책은 최만리를 숭배하는 많은 선비들의 외면으로 실패로 끝났다. 세종의 정책이 성공했더라면 지금 우리나라의 한자발음이 중국어의 한자발음과 같아졌을 것이다. 어쨌든 중국어의 정확한 발음을 귀로 확인하기 위하여 요동으로 귀양 와 있던 명나라 한족 출신 관리를 만나려고 요동으로 열 몇 번이나 출장 갔다 온 성삼문만 엄청 고생했다.(성삼문의 출장 목적은 훈민정음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종으로서는 애써 만든 발음기호까지 버리기는 아까웠다. 그래서 ""어린 백성이... "" 어쩌고 하는 서문을 붙여서 백성용 글자로 반포하기로 하였다. 그것이 최만리 사후 1년 반 뒤의 일이었다. 이 글자들의 명칭은 훈민정음이라 하였다.
이렇게 하여 드디어 훈민정음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그러나 배우기가 너무너무 쉬워서 별도의 교육기관이 없이도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었다. 이것이 훈민정음이 가진 최대의 장점이다. 수천 년 전에 만든 지구상의 모든 글자를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최신 모드로 만들어진 글자가 바로 우리 나라 한글이다. 어찌 우리 한글을 아주아주 옛날에 만든 다른 나라의 구식 글자와 비교할 수 잇겠는가?
너무 쉽게 만든 것도 탈이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한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도 큰 수치로 생각하였고 모든 국가의 공식장부에서 철저히 외면 당하였다. 그래서 서민들과 여자들 사이에서만 비공식적으로 전승되었다.
여자들끼리만 전승되던 한글은 연산군의 모친 윤비가 죽는 데에 크게 공헌을 세웠다고 하여 효자 연산군에 의하여 크게 낭패를 본 적도 있다.
어쟀든 조선 시대의 공식 문자는 여전히 한자로만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한글이 우리 나라의 공식적인 글자로 승격되었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한글을 우리 나라의 공식 글자로 승격시키는 데에는 1890년대에 일본의 힘이 가장 결정적인 것이었다.
일본이 우리 한글의 우수성에 감동하였기 때문에 그리 해 준 것은 아니고, 우리 나라를 어떻게 해서든 중국과 떼어 놓겠다는 전략적 필요성이 그 이유였고, 한글을 주로 사용하는 서민들의 힘을 강화시켜 기존 우리 양반들의 발언권을 축소시켜 놓자는 것이 또다른 이유였다.
물론 그 전에 신부나 목사들이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가 되어 ""평등과 자유""라는 무기를 들고 우리 나라 서민들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하여 서민들의 글자인 한글을 사용한 성경을 보급한 것도 때늦은 한글 발전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한글 성경 때문에 우리 나라의 민심이 적지 않게 흔들렸고 그 빈틈을 일본이 적절히 잘 활용한 셈이었다. 이 때 일본이 조금만 더 약하게 나왔다면 우리 나라도 저 동남아나 아프리카처럼 유럽이나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일본은 우리 나라에 독립협회도 만들어 주고 독립문도 세우게 하고 독립신문도 창간되게 하여 신문사 윤전기용 한글 활자를 무제한 제작하여 우리 나라에 보급하였다. <<1890년대만 해도 ""독립""의 개념은 ""중국으로부터 독립했고 우리도 황제의 나라가 되었다""라는 개념이었다. 일본은 이 때에 우리 나라에 심어 준 ""독립정신"" 때문에 나중에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덕분에 우리 나라는 갑자기 한글시대로 급속하게 변해 갔다. 한글 창제 450년만에 맞이한 때늦은 한글시대의 새로운 주인공은 최남선, 이광수 등 중인계급의 후예들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1940년대 초에 내선일체인지 뭔지 때문에 3, 4년간 한글을 안 써도 되게 해 주는 해프닝도 있었다. << 앞으로 조선 사람들을 절대로 차별대우하지 않겠다.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어도 좋고, 국어를 일본어를 써도 좋다. 그러니까 완전히 일본 사람들과 똑같은 대우를 해 주겠다는 말이다. 아때? 좋지? 근데말이야... 이제 완전히 일본 사람 되었으니 젊은 놈들 우리 일본 군대에 좀 보내 줄래?... 라는 속셈에서 나온 조치였다.>>
그러니까 이상의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 보면
한글은 세종의 잘못된 정책의 부산물로 태어났고, 최만리는 억울하며, 일본의 침략준비 수순에 의하여 우리 나라의 공식적인 글자로 재탄생하였으나. 그 품질은 가장 최근 모드로 만든 것이니만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현재 해주최씨 에서는 최만리선생의 복권운동을 벌이고 한글학회등 서한, 청와대 민원, 국회 과거역사진상위원회 구성 촉구, 어학사저자 김윤경의 훈장박탈, 친일파로 등재 또한 갑자상소를 잘 모르고 편집하여 이를 배포한 학자들을 상대로 소송진행중에 있습니다. 위의 내용을 읽으셨다면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요?
가장 중요한 대목 입니다. ""어느 한글학자의 한번 실수로 한글 창제를 끈질기게 반대한 주모자로 오인되고 있다. 그 한글 학자는 일제시대의 일본학자 ""고쿠라 진페이""가 쓴 논문의 일부를 확대 해석하여 최만리를 엄청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현재 해주최씨 에서는 최만리선생의 복권운동을 벌이고 한글학회 김윤경 어학사원본요청, 청와대 민원, 국회 과거역사진상위원회 구성 촉구, 어학사저자 김윤경의 훈장박탈, 친일파로 등재 또한 갑자상소를 잘 모르고 편집하여 이를 배포한 학자들을 상대로 소송진행중에 있습니다. 위의 내용을 읽으셨다면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