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한글에 관련된 내용에는 늘 빠짐없이 등장되어 역사가 왜곡되고 있습니다. 우리 해주최씨의 위대하신 선조님의 업적에 대하여 우리 해주최씨는 모두 숙지하시어 해주최씨 15세조 부제학공 최만리(崔萬理)선조님의 잘못된 역사관을 바로잡기에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선조님에 대하여 누군가가 이야기를 할 때에는 우리 해주최씨가 우리선조님에 대한 내용을 잘 모르고서야 대화를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적어도 우리 해주최씨문중에서 만큼은 우리의 선조님에 대하여 잘 모르고 답변을 피하거나, 상대방의 이야기에 답변을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하여 대변을 하여야 지금 ""역사바로잡기위원회"" 에서 추진중인 부제학공에 대한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지난 2006년 8월 대전 대덕국회의원인 김원웅 의원의 부제학공 폄하발언과 관련하여 우리 해주최씨종친 모두가 힘을 합쳐 결국 대전일보의 공개사과보도와 김원웅의원에게 사과를 받아 냈습니다.
이 때 종친 여러분의 협조를 구하기 위하여 메일, 전화등으로 독려를 하였습니다. 한 종친의 말 입니다. ""부제학공에 대하여는 상세히 모르며, 그렇게 배워 왔는데 지금와서 아니라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이미 세상사람들이 ""한글창제를 반대한 사람"" 으로 인식되어 있는것을 우리 몇명이서 무슨 역사를 바로잡겠느냐?"" 저는 말문이 막혔으며, 과연 이분이 진정한 우리 해주최씨인가? 라는 생각에 ""알겠다.""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단 한사람의 편견을 바꿀수 있다면, 한사람이라도 우리가 알고있는 내용을 전달할 수만 있다면, 언제가는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도 모든사람의 생각이 학교에서 전달된 내용만을 생각하고 있지 않으며, 부제학공에 대한 생각이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신분도 많다는 점을 느꼈기에 반드시 이룰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우리의 선조를 우리가 모르면서 다른 편견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에 부제학공 최만리선조님에 대한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고령신씨문중의 예를 볼 때, 수양대군의 왕위찬탈(王位簒奪)에 가담한 점에서 후세에 비난을 받은 신숙주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였는가? 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고령신씨에서는 여러분야로 접속을 시도하여 문화광광부에서는 2002년 ""이달의 문화인물"" 로 선정이 되었고, ""한국어문학학회""에서는 세미나까지 열려 새롭게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고, 여러 학자의 논문발표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덕분으로 현재 인터넷 블로그, 지식, 카페 등에는 예전에 우리가 알고 있었던 내용보다는 긍정적으로 몰고가는 새로운 내용의 글을 많이 볼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선조이신 부제학공 최만리선생께서는 정권에 향한 배신을 하지 않았으며, 단지 ""언문창제반대 상소문""을 수명이 합동으로 올렸다는 이유로 후세에 ""한글창제반대""에 주모자로 오인되어 계속하여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한 폄하발언, 기타 언론등에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의 왜곡이라는 점 입니다.
잘 모르시고 계신 종친 께서는 다음의 글을 복사를 하시어 숙지하시기 바랍니다. ----------------------------------------------------------------- 최만리(崔萬理) ?∼1445(세종 27).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명(子明),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 고려시대 해동공자로 불리던 최충(崔충)의 12대손이며 하(荷)의 아들. 1419년(세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그 이듬해 집현전박사로 임명되었다. 과거에 두 번 급제 하시고 그뒤 집현전학사를 거쳐 그 실무책임자인 부제학에까지 올랐다. 세종대왕과는 각별한 사이로 총애를 받았다.
1427년 3월 교리로서 문과중시에 급제하였고, (과거 2회 급제) 그해 7월에 응교에 올랐으며, 1437년 직제학, 1438년 부제학, 1439년 강원도관찰사, 1440년 집현전부제학으로 복귀하였다. 그뒤 1444년에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반대 상소문제로 즉일 친국을 받고 다음날 석방, 복직되었으나 사양하여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주] 반대상소문-직제학(直提學) 신석조(辛碩祖)·직전(直殿) 김문(金汶),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부교리(副校理) 하위지(河緯之)·부수찬(副修撰) 송처검(宋處儉), 저작랑(著作郞) 조근(趙瑾)과 합동 상소문. 여기에서 만일, 반대상소문제로 세종과의 상당한 마찰이 있었다면 정창손만 파직(罷職)시키고, 김문(金汶)을 국문(鞫問)에 부쳤으며,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고, 다시끔 부제학공을 복직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종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세종조의 청백리 [15명] 정척 : 진주 - 판윤, 최만리:해주 - 부제학, 황희 : 장수 - 영의정, 맹사성:신창 - 좌의정 , 이석근:전주 - 익평군, 홍계방:남양 - 참의 , 이정보:경주 - 관찰사, 황효원:상주 - 좌찬성. 김장 : 광산 - 장령 ,류관 : 문화 - 영의정, 류겸 : 진주 - 좌참찬, 민불탐:여흥 - 주부 박팽년:순천 - 승지, 이지 : 경주 - 판관, 류염 : 진주 - 이판
[주]청백리(淸白吏)-조선 시대 조정에 의해 선정된 청렴결백한 벼슬아치를 가리키는 말로 세상의 바른길을 장려하고 청조(淸操)를 진흥시키기 위해 제정한 제도로 청백리로 녹선(錄選)되면 품계(품階)가 오르고 그 이름이 기록에 남아 추앙을 받았으므로 그 종중과 자손들이 큰 자랑으로 삼았다. 선출 방법은 일정하지 않았으나 대략 의정부(議政府), 육조(六曹), 한성부(漢城府)의 2품 이상의 관원과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의 수직(首職)들의 추천에 의하였다. 이 제도는 조선조에 관리들 중에서 청렴결백한 사람만을 선발하여 후세에 길이 거울삼게 했던 관기숙정(官紀肅正)을 위한 제도였다. 여기에 선발되기 위하여는 엄격한 자격 심사의 심의를 거쳐 임금의 재가(裁可)를 얻어야 했다. 또 녹선(錄選)이 되면 그 자손들도 부조(父祖)의 음덕(蔭德)을 입어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특전도 주어졌다. 그러다 숙종 이후로는 이들 청백리의 자손이 너무 불어나 삼상(三相)과 고관이 추천하여 대개 5명 정도가 특채 등용되었는데, 그럼으로써 청백리가 많이 난 씨족들은 그것을 큰 자랑으로 삼았다.
현재도 각 성씨 문중에서는 자신의 선조가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면 여지없이 소개가 되고 자랑하고 있는데, 우리 부제학공께서는 청백리에 녹선되시고도 비난을 받고 있어야 하니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세간에는 부제학공께서 엄격한 심사를 거처 청백리(淸白吏)로 녹선(錄選)된 소위 관리들의 귀감 이었었다는 것은 별로 알려 지지 않고 있다. 청백리로 뽑힌사람들은 조선조 500 년동안 모두 215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 청백리 하면 반드시 가난 하게 살았다고 인식하지만 그들은 결코 관직을 치부의 수단으로 삼는 오리(汚吏)와는 다른 삶을 살아 왔을 뿐이지 근검을 생활 신조로 살아 오면서 명예를 더럽히지 않고 생활인으로서 그리 궁핍하게 만은 살아 오지 않은 떳떳한 사람들이다. 요사이 청백리라는 말이 새삼 그리워 지는것은 정치권의 정치 자금 으로 온통 세상이 시끄러워지는 것이 보기 딱하며, 오히려 이 같은 일부 깨끗하지 못한 정치인들의 입에서 청백리이신 우리의 선조 부제학공께서 오르내리고 있다니 더욱 더 억울한 일이다. 청백리라는 글자를 곰곰히 되 씹어 보면 한자의 청(淸)자는 맑을 청자이고 백(白)자는 흰백자이며 리(吏)자는 요사이 나랏일을 다스리는 관리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지금으로 말하면 국민으로 부터 선출 되었든 행정 관청으로 부터 시험에 의해 임명 되었든 우리네 백성들의 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들 중에 자리를 악용 하거나 직권을 남용해 사리 사욕을 취하는 부정이나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을 오리(汚吏)라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조선 시대에서는 청백리라는 이름으로 녹서 했던 것이다
부제학공 께서는.. 부정과 타협을 모르는 깨끗한 관원으로서 일관하였으며 진퇴가 뚜렷하였다. 집현전의 실무책임자인 부제학으로서 14차에 걸쳐 상소를 올렸다. ◆ 불교배척 상소 6회, 1, 세종 21년 기미(1439, 정통 4) 4월 19일(병신)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흥천사의 역사와 안거회에 대해 상소하다. 2, 세종 23년 신유(1441, 정통 6) 윤 11월 10일(계유) 사리각 경찬회에 관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의 상소문. 3, 세종 23년 신유(1441, 정통 6) 윤 11월 11일(갑술) 사리각 경찬회에 관해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아뢰다 . 4, 세종 23년 신유(1441, 정통 6) 윤 11월 14일(정축) 사리각 경찬회에 관해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상소하다. 5, 세종 23년 신유(1441, 정통 6) 윤 11월 17일(경진) 흥천사 사리각 경찬회를 파하기를 청하는 최만리의 상소문. 이때에 수찬(修撰) 이영서(李永瑞)가 시(詩)를 짓기를, “금란(金란)에 대죄(待罪)한 지 이미 십년인데 다시 충분(忠憤)을 못이겨 눈물지누나. 충성은 사도(斯道)를 붙들려고만 하거니 귀양길 8천 리를 어찌 두려워하리.” 하였다. 6, 세종 23년 신유(1441, 정통 6) 윤 11월 19일(임오) 최만리 등이 경찬회의 일로 파면시키기를 청하다.(스스로 파면을 요청하는 상소문) 불교배척 상소의 대부분은 흥천사(興天寺)의 사리각 중수 및 경찬회(慶讚會)의 혁파를 청하는 것이었고, [주] 경찬회(慶讚會)-법당(法堂)이 새로 낙성(落成)되거나 불상(佛像)이 새로 조성되면 그 기념으로 여는 법회(法會). ◆첨사원(詹事院) 설치 반대상소가 3회 1, 세종 24년 임술(1442, 정통 7) 8월 26일(계축)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의 첨사원 설치를 반대하는 상소문 2, 세종 25년 계해(1443, 정통 8) 4월 19일(갑진)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세자가 정사를 섭행하도록 한 것과 남면하여 조회를 받는 것에 대한 부당함을 상소하다 3, 세종 25년 계해(1443, 정통 8) 4월 20일(을사)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세자가 남면하여 조회를 받는 것에 대한 부당함을 아뢰다 첨사원 설치를 반대한 상소는 세종이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에게 섭정시키려 하므로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이었다. ◆일본과의 교역에서 석류황(石硫黃)의 대가를 지나치게 후하게 지불한 것에 대한 책임추궁, 세종 19년 정사(1437, 정통 2) 7월 19일(정미) 최만리 등이 당상관에 배징된 포목을 징수하지 말도록 건의하다 ◆진사시에서 시(詩)의 출제법이 잘못됨을 지적 세종 20년 무오(1438, 정통 3) 6월 11일(계해) 최만리 등이 시학을 통한 진사 시험을 강화할 것을 상소하다 ◆이적(李迹)의 사형 결정이 모호하다고 감형을 주장한 것과 사직상소 및 갑자상소(언문조어논고)가 있다. 세종 20년 무오(1438, 정통 3) 11월 2일(임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이적의 일을 다시 의논하기를 청하다.
이 같은 상소문의 내용으로 볼 때, 부제학공께서는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 관철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상소문을 올리는 부정과 타협을 모르고 상소문 이외에도 세종께 상당히 많은 직언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부제학공께서는 훈민정음이 완성될 때까지 세종의 뜻을 잘 받들어 반대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세종은 훈민정음을 완성하고 비밀리에 궁중의 의사청(議事廳)에 최항(崔恒) 이하 집현전 소장학사와 동궁·진평대군(晋平大君) 등을 참가시켜 원나라의 웅충(熊忠)이 엮은 《고금운회거요 古今韻會擧要》의 자음을 한글로 달아 일대 자음의 개변운동을 하려 하였다. 세종은 당시 우리나라의 한자음이 체계없이 사용되는 것이어서 어느 정도 중국체계에 맞도록 새 운서를 편찬하여 당시 한자음을 개혁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에 그는 집현전의 중진학자들과 함께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것이 유명한 ""갑자상소(언문조어논고)"" 이었다. 이 상소문은 여러 학사의 합작으로 보이며, 조목에 따라서는 한글창제의 불필요성, 한글의 무용론을 주장한 것으로 사대주의적 성향이 짙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진의는 세종의 한자음 개혁에 반대한 것이 된다. 즉, 세종의 최만리에 대한 친국내용을 보면, “내가 만일 이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을 것이냐.”라고 한 것을 보면 최만리등의 상소는 《고금운회거요》의 번역사업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고금운회거요》의 번역사업은 뒤에 《동국정운》의 사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중국에서 《홍무정운 洪武正韻》이 실패작임과 같이 우리의 《동국정운》도 그 한자음이 실시될 수 없어 실패작이라 한다면, 그의 《고금운회거요》 번역사업의 반대상소 견해는 그러한 의미에서 정당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소문의 내용이 사대주의라고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당시 지배층이 일반적으로 사대주의적 경향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그에 대한 평가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본 내용은 세종실록(世宗實錄), 세종대왕의 학문과 사상(世宗大王의 學問과 思想) 이숭령(李崇寧), 亞細亞文化社, 1981) 최만리연구(崔萬理硏究) 이숭령(李崇寧)저 , 李相佰博士華甲紀念論文集, 1964) 집현전관의 언관화(集賢殿官의 言官化) 최희승(崔承熙, 朝鮮初期言官·言論硏究, 서울大學校出版部, 1983).〈李崇寧〉 등의 내용을 발췌하여 주요부분만을 재작성한 내용 입니다.
※지난 2006년 8월 김원웅의원 폄하발언에 대하여 항의시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신 종친여러분. 특히, 최태범, 최의식, 최이환, 최진남, 최재영,최완호,최종대,최창균,최정수,최미순,최원,최정일, 최종수,최성중, 이최경환, 최재원, 최태화, 최우황,최정광, 최재훈,최영문,최영일,최종춘,최윤정,최명근,최상섭,최일구,최영우,최영섭,최일덕, 최석환,최원수, 최정윤,최재웅, 최용채,최광식,최화섭,최정섭,최종훈, 최광대,최재봉,최대식,최경완,최성우,최성조, 최영철, 등 (이하 생략)종친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이 일은 김원웅의원의 사과를 받았다고 하여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혹시라도 이글을 보신다면 연락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협조가 필요한 시기 입니다.
최현호
많은 사람들이 부제학할아버지에 대해 잘못알고 있음을 알았고 저 또한 친구들에게 이러한 사실로써 한명한명 고쳐나가겠습니다. 고생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