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우리 선종(宣宗)이 서교(西郊)에서 대규모로 군대를 사열할 적에 내가 이웃 친구 비산(萆山)과 함께 그윽이 엿보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구경을 끝내었다. 그런데 이윽고 들으니, 호령을 하며 추창하고 또 벽제(辟除)를 하므로, 길 곁의 빈 집으로 피하여 들어갔다. 이때 관동(冠童) 수십 인이 먼저 느린 걸음으로 소로(小路)를 따라 왔는데, 옷차림이 매우 분란(紛亂)하여, 혹은 소매를 걷은 자, 웃통을 벗은 자도 있었고, 또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거리낌없이 말을 하며 시끄럽게 떠드는 자도 있어, 마치 길들지 않은 망아지떼가 구유통에 뛰어올라서 서로 짓밟고 물어 뜯고 하는 모양과 같았다. 이때에 보니, 그 사이에 한 소생(小生)이 있어 봉안(鳳眼)이 별처럼 빛나고 인품이 침중하고 조용했는데, 그가 반열에서 나와 나에게 읍(揖)을 하자, 동행한 사람들이 모두 흘겨보았다. 그리하여 나와 잠깐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 그는 시선을 낮추고 말을 천천히 하여 마치 뜻이 있는 사람 같았으므로, 내가 마음속으로 그를 이상하게 여기었다. 그래서 그의 팔을 끌어당기며 누구냐고 물으니, 친구가 말하기를,
“자네가 모르는가? 이 사람이 세상에서 신동(神童)으로 일컬어진 최씨(崔氏)의 아들 전(澱)이라네. 이 사람은 9세에 집을 하직하고 해주(海州)에 유학하여 율곡(栗谷)에게서 시사(詩史)를 수학하였는데, 글씨는 회소(懷素)를 주급하고 시(詩)는 청련(靑蓮) 과 유사하며, 음률(音律)은 여사(餘事)이고 그림 그리는 일도 정통하여, 거문고ㆍ휘파람ㆍ피리ㆍ젓대의 연주와 매화ㆍ대ㆍ갈대ㆍ기러기의 묘사(妙寫) 등 모든 곡예(曲藝)에 참으로 그 극치를 이루어 옛 작자(作者)의 유운(遺韻)이 있으니, 후일에 우리 삼군(三軍)을 장설(張說)하여 천하의 맹주(盟主)가 될 사람이 바로 여기에 있네.” 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해인 을유년에 진사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로부터 5년째인 기축년 겨울에 어떤 사람이 그의 부음(訃音)을 전해 왔으므로, 나는 상심이 되어 어찌할 줄 몰라서 마치 깊은 못에 장주(掌珠)를 떨어뜨린 것 같았다. 그런데 또 그로부터 22년 뒤에 그의 아들 유해(有海)가 그 가장(家狀)을 가지고 이 노부(老夫)를 지나치게 좋아하여 찾아왔다. 가장을 상고하건대, 최씨(崔氏)는 해주(海州)에서 나와 망족(望族)이 되었는데, 고려 때 문헌공(文憲公) 충(冲)은 작위가 총재(冢宰)에 이르렀고 당시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일컬어졌다. 그 후로 휘 정(埥)은 예조 좌랑으로 졸관하였는데, 이분이 사헌부 감찰 휘 문손(文孫)을 낳았고, 감찰은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으로 병조 판서에 추증된 휘 경(瓊)을 낳았으며, 도정은 위원 군수(渭原郡守) 휘 여우(汝雨)를 낳았고, 군수는 상주 이씨(尙州李氏)에게 장가들어 융경(隆慶) 무진년에 군(君)을 낳았다. 군은 막 나서부터 신령한 싹이 이미 빼어나서 순수하게 그 빛을 내는 것이 마치 밝은 달이 광휘를 떨치는 것 같았다. 가인(家人)이 닭을 잡을 적에는 그 소리를 듣고 측은하게 여겨 닭고기를 물리치고 먹지 않았다. 가형(家兄)이 권학(勸學)하면서 학문에 힘쓰지 않는다고 종아리를 치려고 할 적에는 문득 스스로 회초리를 가져다 주어 오직 공손한 태도로 벌을 받았고, 형이 죽음에 미쳐서는 수척한 모습으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예에 지나치게 심상(心喪)을 실천하였다. 나이 14세에 공시(貢試)에 합격하였고, 과거에 응시했을 적에는 율곡(栗谷)이 고관(考官)이 되었으므로, 율곡과 사제(師弟) 관계라는 것을 혐의롭게 생각하여 시를 지어 놓고도 끝내 올리지 않으니, 들은 이들이 은덕(隱德)이 있음을 더욱 알게 되었다. 자람에 미쳐서는 우뚝하게 도(道)를 지향하는 뜻이 있어 몸을 깨끗이 하고 뜻을 경계하여 잘못된 말은 두 번 다시 하지 않았고,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는 모난 태도를 볼 수 없었다. 일찍이 심의(深衣)와 복건(幅巾)을 만들어 입고서 혼자 한가히 있을 적에도 항상 공경하여 세속의 습관을 닦아 없애고, 경서(經書)의 뜻을 분석하고 추향(趨向)의 의지를 변별하였으며, 혹은 팔을 베고 옷을 입은 채로 자기도 하고 혹은 밤새도록 조용히 앉아 있기도 하였으므로, 처자(妻子)들이 일찍이 군의 게으른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일찍이 도가서(道家書)를 보고는 마음속으로 좋아하여 만일의 기대를 품었었는데, 군이 작고하던 해에는 문경(聞慶)의 양산사(陽山寺)에 들어가 문을 닫고 깊이 들어앉아서 밤잠을 자지 않고 《주역(周易)》을 읽다가 인하여 질병을 얻어서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나이 겨우 22세였다. 아, 짧도다. 그 당시 친구로서 군에게서 학업을 고거(考據)하여 소득을 취한 사람으로 말하자면, 현재 대종백(大宗伯)으로 있는 신공 흠(申公欽)은 방례(邦禮)를 관장하여 천인(天人)의 질서를 펴고 있고, 대사도(大司徒)로 있는 황공 신(黃公愼)은 방부(邦賦)를 관장하여 만민(萬民)을 호적(戶籍)에 올리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치리(治理)에 정명(精明)하여 조신(朝臣)의 앞자리에 의표(儀表)가 되었으므로, 장차 천하에 일컬어 말하기를,‘본조(本朝)에는 명사(名士)가 많다’고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다행히 하늘이 군에게 수년(數年)만 더 빌려 주어, 의(義)가 더욱 정밀해지고 인(仁)이 더욱 익숙해져서 이상의 두 군자(君子)와 함께 한시대에 포부를 활발히 펴게 되었더라면 그 수립한 바가 어떠했겠는가. 군의 자는 언침(彦沈)이다. 배(配)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군수 홍점(鴻漸)의 딸이요 낙봉 선생(駱峯先生) 광한(光漢)의 손녀로 군과 동년생(同年生)인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소학(小學)》등의 글을 꽤 알았다. 그래서 이미 미망인(未亡人)으로 자처하여 머리를 깎고 죽 한 모금씩만을 마시다가 끝내 이때문에 작고하여 양주(楊州)의 감파(紺坡)에 장사지냈다. 군을 처음에는 용진(龍津)에 장사지냈다가 무신년 10월에 감파로 이장(移葬)하였다.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바로 나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 또한 유술(儒術)을 좋아하니, 하늘이 장차 이로써 보상을 하려는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有有之而不施者 속에 간직하고도 쓰지 못하는 자는 있으나 無無之而能施者 간직한 게 없고도 능히 쓰는 자는 없나니 無而妄施者灾也 간직한 것도 없이 망령되이 쓰는 것은 재앙이요 有而能施者宜也 간직하고서 능히 쓰는 것은 타당한 일이로다 嗚呼崔君之有 아 최군이 간직하게 된 것은 天若將以有爲也 하늘이 장차 큰 일을 하려는 듯했는데 其止於斯者 여기에 그치고 말았으니 竟歸之誰歟 끝내 이를 어디로 돌릴 건고
주1) 회소(懷素) : 당(唐) 나라 때의 고승(高僧)인데, 특히 초서(草書)에 뛰어났었다. 주2) 청련(靑蓮) : 당 나라 때의 시인(詩人)으로 별호가 청련거사(靑蓮居士)인 이백(李白)을 가리킨다.
상기 묘갈명은 최전(崔澱)공의 묘갈로 최유해(崔有海)공의 아버님 비문이 백사집에 있길래 올렸습니다. 참조하시지요. 첨언하면 본 홈피에 고어한자가 깨지네요. 고어 한자의 폰트를 규장각등에서 다운 받아다가 깔면 글자가 안 깨질텐데... 고령신가 신경식 올림
최재만
이렇게 우리가문의 기록을 여기에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위 기록은 이미 확보하고 있는 기록이지만 관심있게 살펴주셔거 감사드립니다.
2007-01-29
岡林
해최의 묘지명, 묘갈명은 현재까지의 문집등에 나와 있는 것은 거의 알고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혹여 모르는 것이 잇을 수 있사오니 가정에서 알고 계시는 것들이 있다면 이렇게 게시판에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