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 문 -----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에 있는 백련사는 다산초당(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을 관광하신 분들이 산길을 걸어서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많은 분들이 그냥 가버리는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백련사는 우리의 가문과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 까요? 첫째는 바로 문청공(8세)입니다. 문청공께서는 왕명을 받아 원묘국사비문을 찬하셨던 것입니다. 백련사에는 원묘국사 비등 여러가지 비가 있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이 비문밖에 없답니다. 이 비는 조선 숙종 7년 (1681년) 5월에 세운비이고 백련사의 중수. 원묘국사의 행적, 백련결사에 대한 내용의 비랍니다. 이 비문에 의하면 문청공이 왕명을 받들어 지은 비가 있었으나 유실되고 귀부(거북모양의 받침돌)만 남아 잇어 비를 세우면서 옛것을 사용한 사실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조선 세종때의 승 행호입니다. 행호대사가 백련사를 중수한 내용은 당시의 윤회가 지은 백련사 중수기에 나오는 바이나 행호대사가 문헌공의 후손임을 밝히고 있으나 우리의 족보에는 그 사실이 없습니다. 세종실록을 보면 행호대사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고 세종으로부터도 상당한 대접을 받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전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용소리 신기부락의 집성촌 및 명곡서원 , 도암면의 백련사가 있으므로 남도답사 일번지 강진군을 들르시면 꼭 우리 가문과 연관된 이 두곳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사진은 2007. 2. 15 .촬영한 것이며 동일 영암 동계사를 방문하였으나 다음 기회에 찾아가는 방법등을 기술하겠습니다.) --------------------------------------------------------- 청년국장(cyg3850) http://memolog.blog.naver.com/cyg3850/14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寺)
동백과 당후박나무 숲에서 동박새 지저귀는 백련사 오르는 길 (2005.3.26.)
만덕산은 409m의 부드러운 육산이다. 동백꽃과 당후박나무를 비롯한 각종 나무들이 부드러운 그늘을 만들어 주는 흙길을 걸으며, 나뭇가지를 비집고 쏟아지는 남도의 햇살을 가슴으로 받아 오래된 절집 마당에 부려놓을 수 있는 서정의 산이다. 엉클어진 마음을 곱게 빗질해주는 다스한 손길을 전신으로 감각하는 산이기도 하다.
멀리 구강포 바다가 보인다.
처사와 보살 몇이 배추를 다듬고 있다.
저 모서리에 앙증맞은 탑 하나가 아기처럼 서 있다.
백련사는 만덕사로 불렸으며 신라 문성왕 1년(839)에 무염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무염선사라면 선종 구산선문 가운데 충청남도 보령의 성주산문을 개창한 그 스님이다. 그 후 절이 없어지고 빈 터만 남았는데, 고려 후기 무신 정권 시절에 요세(1163-1245)가 중창하고 천태종의 수행결사인 백련사의 터전으로 삼으면서 대단한 거찰이 되었다. 백련사(白蓮社)는 수선사(修禪社 순천 조계산 송광사에 자리잡았던 조계종의 정혜결사)와 함께 고려 후기 불교 수행결사의 양 갈래를 이룬다.
요세는 희종 7년(1211)부터 만덕산의 ´옛 신라 절터´에 절을 짓기 시작하여 고종 3년(1216)에 80여 칸의 절집을 완성하고 1232년 처음으로 보현도량(普賢道場, 천태종에서는 법화경을 기본으로 삼는데 법회참회의 주존이 보현보살이므로 보현도량이라 했다)을 열어 수행결사의 체계를 세웠다. 이때부터 백련사라는 결사 명칭도 사용되었다. 이후 백련사는 조계종 지눌의 수선사에 못지 않게 대단한 성황을 이루었으며 최씨 정권과 밀접한 유대를 가졌다. 요세를 만덕산으로 불러들이고 후원한 최표와 최홍이 이미 최씨정권과 끈이 닿는 강진의 실력자들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지눌의 수선사가 돈오점수(頓悟漸修)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수행의 요체로 삼았던 반면, 요세의 백련사에서는 참회하여 죄를 멸하는 참회멸죄(懺悔滅罪)와 정토에 태어날 것을 바라는 정토구생(淨土救生)에 전념했고 염불선을 수행의 방편으로 했다. 이는 교화의 대상에 대한 의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수선사가 어느 정도 높은 근기를 가진 중생을 대상으로 했다면, 백련사는 ‘근기가 낮고 업장이 두꺼워서 자력으로는 도저히 해탈할 수 없는 범부’를 교화의 대상으로 하여 좀더 대중적인 면이 강했다.
요세는 83세로 입적한 후 국사로 책봉되었고 시호를 원묘(圓妙)라 했다. 요세가 법화도량을 연 이후 120여 년 동안 이 절은 백련결사의 중심으로 번창하면서 8명의 국사를 배출했다.
고려왕조 말기에 왜구들이 자주 우리나라를 침범할 때 바닷가에 바싹 붙어있는 이 절도 큰 피해를 입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태종때 조계종 자복사(資福寺) 24사에 속하는 등 명맥은 유지했으나 척불론이 강했던 당시였으므로 사세는 미미했을 것이다. 세종 12년(1430)년에 이르러 천태종의 종장인 행호선사가 세종의 둘째형인 효령대군의 지원을 받아 절을 복구하기 시작, 6년에 걸친 불사 끝에 비로소 옛모습을 찾게 되었다. 행호선사는 왜구에게 당했던 옛일을 거울삼았던지 절을 둘러 긴 토성을 쌓아 놓았다. 그 토성은 지금 둔덕처럼 뭉그러졌지만 여전히 행호토성으로 불린다.
그 후 효종때도 몇몇 건물이 중수 되었지만 영조 36년(1760)에는 큰불이 나서 대웅전, 만경루 등 대부분의 건물이 타버렸고 불상만을 겨우 건져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백련사는 그후에 중창된 모습이다. 조선시대에도 백련사에서는 8명의 대사가 배출되었다. 그 가운데 여덟 번째가 바로 다산 정약용과 교류하던 혜장선사 아암이다.
백련사 대웅보전. 높은 축대 위에 세워진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이다. 정면에 계단이 없고 옆으로 빙 돌아서 법당에 출입하도록 되어있는 점이 특이하다. 광주의 모 고등학교 간부학생들이 수련회 일정으로 와서 대웅전을 둘러보고 있다. 현판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다. 이광사(1705-1777)는 여기서 가까운 신지도에서 귀양살이로 말년을 보냈다.
대웅보전 내부 인등 위의 백련사(白蓮社)라는 글씨가 이곳이 결사의 본거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백련사 사적비의 돌거북
비석은 숙종때 것이지만 돌거북은 고려시대 것이다. <만덕사지>에 따르면 원래 이곳에는 고려의 문필가 최자가 비문을 지은 원묘국사의 부도비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비신이 언젠가 훼멸된 후 돌거북과 머릿돌만이 남았다가 나중에 이렇게 사용된 것이다. 고려 돌거북은 점잖게 수염을 늘어뜨리고 두 눈을 씩씩하게 부릅뜨고 아래윗니를 맞물고 있다. 여의주를 물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백련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역시 동백숲이다. 절을 에워싸고 1,500여 그루가 자라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절 앞의 숲도 대단하지만 백련사 사적비에서 더 서쪽으로 즉 다산초당 가는 길쪽 행호토성 너머에 펼쳐지는 동백숲은 더욱 장관이다. 연인 한 쌍이 동백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