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저는 해주최씨 청년국장 영림 최영길 입니다. 귀하께서 우리 선조님이신 세종조 집현전 부제학이시며, 세종조 청백리 제 2 호 로 녹선이 되신(휘)만리 공 을 두고 백면서생이라 지칭 하신것에 대하여 대학교수라는 분께서 부제학을 부재학으로 표기를 한것도 모자라 남의 집안에서 추앙받으시는 선조님에 대하여 함부로 白面書生 으로 표현을 할정도의 자격이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한낱 대학의 교수 따위 주제에 논문도 논문답지 않은 공상소설같은 글을 써놓고 자아도취 되여 수삼년 한글에 관련된 학술회에 내어놓고 기고 만장 하여 설파 하셨는데 느닷없이 우리 해주최씨 문중에서 태클이 들어가니 가당치 않다는 것인지요? 아래에 백면서생이란 뜻이 있어 첨부하여 드리니 그뜻을 정확하게 아시고 써먹도록 하시고 다시금 청하건데 가만히 계시는 남의 선조님은 더이상 해꼬지 하지 마시고 교수면 교수 답게 학자로서 잘못된 부분에 대하여 정중히 공개 사과 하시길 거듭 촉구 하는 바입니다. 더이상 귀하의 논문에 대하여 우리 해주최씨 일문은 관심도 없으며 단 그글중에 우리 문중에 추앙받으시는 부제학이신 (휘)만리공에 대한 부당한 폄훼 발언에 대하여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 하는 바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귀하의 입지는 그만큼 좁아질수 밖에는 없을것 입니다. 해주최씨 전국 30만 종친의 탄원서를 준비 중에 있다는 것을 알려 드립니다. 법적 대응 조치의 일환 입니다.
해주최씨 대종회 청년국장 겸 부제학공 후손 종회 후손 영림 최영길 드림
백면서생 [白面書生] 요약 글만 읽어 얼굴이 창백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글만 읽어 세상 물정에 어둡고 경험이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 백면랑(白面郞)이라고도 하는데 《송서(宋書)》〈심경지전(沈慶之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남북조시대에 남조(南朝)의 송(宋)나라와 북조의 북위(北魏)는 강남(江南)의 사진(四鎭)을 둘러싸고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화의하는 외교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북위의 태무제(太武帝)는 북쪽을 무력으로 통일한 다음 유연(柔然)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서역(西域) 여러 나라와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러자 송나라 제3대 문제(文帝)는 남쪽의 임읍(林邑)을 평정하여 북위와의 일대 결전에 대비하였다.
449년에 북위의 태무제가 유연을 선제 공격하자 송나라의 문제는 이때가 숙적 북위를 공격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여 문신들과 북위를 공격할 구체적인 방법을 논의하였다. 이때 무관인 심경지는 이전에 결행한 북벌 출병의 전례를 들어 출병을 반대하고 다음과 같이 올바른 말을 하였다. “폐하, 밭갈이는 종에게 물어보고, 베를 짜는 일은 하녀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지금 폐하는 적국을 공격하려고 하면서 백면서생과 도모하면 어찌 적을 이길 수 있겠사옵니까[田事可問奴 織事可問婢 今陛下 將欲攻敵國 與白面書生謀之 事何由濟].”
그러나 문제는 심경지의 말을 듣지 않고 문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출병을 강행하였다가 대패하였다. 심경지의 말에서 유래한 백면서생이란, 얼굴이 검은 무관과 대비하여 집 안에서 책만 읽어 창백한 얼굴의 문신들을 가리키며, 말로만 떠들고 전혀 경험이 없는 사람 또는 초년생을 비꼬아서 하는 말이다. 출전 경험이 많은 심경지는 비록 글에는 능숙하지 못하지만 어릴 때부터 무예를 연마하여 그 기량이 뛰어났다. 10세 때 동진(東晉)의 장군 손은(孫恩)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사병(私兵)들을 이끌고 반란군을 진압할 정도였다. 40세 때는 이민족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이후에도 혁혁한 전공을 세워 건무장군(建武將軍)에 임명되어 변경 수비군의 총수로 부임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