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고려의 禮制는 高麗史 禮志에 정리되어 있다. 이것은 詳定古今禮 를 비롯해 周官六翼, 式目編錄, 蕃國禮儀등의 자료를 참고로 하여 정리한 것이다.
1) 그러나 이들 서적의 내용이 고려사예지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 불분명하다. 더구나 이 자료들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며, 단지 일부의 내용만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고려의 예제는 고려사예지를 통해 연구되어 왔다.
2) 그러나 고려사는 조선초의 역사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이를 가지고 고려시대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정밀한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고려사 가 고려의 사회상을 얼마나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은 고려 당대 사료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따라서 상정고금례 주관육익 식목편록등에 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3) 현재 상정고금례에 대한 연구는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졌다. 먼저 상정고금례는 조선시대 五禮의 선구적 작업으로서 고려의 요소가 가미된 禮書였으며, 그 내용과 구조를 따라 고려사 예지가 편찬되었다고 한다.
4) 이에 나아가 이 책의 편찬 시기와 의도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졌다. 이 연구에 따르면 상정고금례는 崔允儀가 平章事를 역임한 의종 9년에서 16년에 이르는 기간에 국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편찬되었다고 한다.
5) 한편, 상정고금례는 고려의 국가제사에 대한 연구에서도 주목되었다. 이에 의하면 고려의 국가제사에 있어 중요한 것은 宗廟, 社稷, 文宣王廟 등의 유교제사, 그리고 道敎의 醮祭, 山川 祭祀, 城隍祭 등이 있는데,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빈번히 거행되었고 그 비중에 있어서도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서 상정고금례의 일부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6) 이상의 연구 결과에 따라 현존하지 않는 상정고금례의 실상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몇 가지 점에서 해명해야 할 문제가 아직 남아 있는 실정이다. 우선 상정고금례의 편찬이 언제 이루어졌는지가 보다 자세하게 밝혀져야 할 것이다. 현존하는 사료에 의하면 이 책의 편찬 시기는 인종대와 의종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의종 9년~16년 사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이러한 성과에 따라 이제는 자료의 세밀한 분석과 새로운 사료의 발굴을 통해 편찬 시기를 구체적으로 해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편찬 참여자에 대해서도 더 논의할 필요가 있다. 상정고금례는 최윤의의 주도 아래 ‘17臣’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재의 연구에서는 최윤의에 대해서만 주목하였을 뿐 이들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이에 편찬 참여자로 崔均이 참여하였음을 새롭게 밝혀보고자 한다. 그 다음으로 해명해야 할 것은 상정고금례의 내용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은 고려사의 志를 편찬할 때 기본 자료로 이용되었으며, 조선초의 예제 정비 과정에서도 자주 참고되었다. 따라서 그 내용의 일부가 고려사 志와 朝鮮王朝實錄에 실려 있다. 이를 통해 상정고금례의 내용을 복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연구들은 고려사 志의 어떤 부분이 상정고금례을 인용한 것인지 주목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 책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되어 있는 기사 중 그 일부만을 소개하였는데, 더 살펴본 결과 모두 26가지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새로이 밝혀진 내용을 통해 이 책이 어떤 성격을 가진 禮書였는지 파악해보고자 한다.
Ⅱ. 상정고금례의 편찬 시기
詳定古今禮의 편찬 시기는 사료에 따라 혼동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이 참고된다.
① 本朝는 건국한 이래로 禮制를 손익함이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한 번 뿐이 아니었으므로 이를 병폐로 여긴 지 오래 되었다. 인종 때에 와서 비로소 평장사 최윤의 등 17명의 신하에게 명하여 고금의 서로 다른 예문을 모아 참작하고 절충하여 50권의 책을 만들고 그것을 詳定禮文이라고 명명하였다. 그것이 세상에 행해진 뒤에는 禮가 제 자리에 귀착되어 사람이 의혹되지 않았다.
7) ② 의종 때에 이르러 평장사 최윤의가 상정고금례 50권을 찬하였으나 闕遺됨이 오히려 많다. 다른 문적들은 두 번이나 병화를 겪어 십분의 일이만 남아 있다. 이제 史編과 詳定禮에 의거하고, 아울러 주관육익 식목편록 번국예의등의 책에서 채록하여 吉凶軍賓嘉禮의 五禮로 나누어 편찬하여 禮志를 만든다.
8) ③ 의종조에 평장사 최윤의가 祖宗 憲章을 수집하고 唐의 제도에서 채택하였다. 詳定古今禮는 위로는 국왕의 면복, 輿輅 및 儀衛, 鹵簿, 아래로는 백관의 관복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기재하였으니 당대의 제도가 갖추어졌다.
9) ①에서 이규보는 상정고금례의 편찬이 인종 때였다고 하여 ②의 고려사편찬자와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10) 이규보는 상정고금례의 편찬과 가까운 시기의 인물이고, 이 책을 다시 간행하면서 밝힌 내용이므로 신빙성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조선초의 예제 정비 과정에서 상정고금례는 주요한 참고 자료였으므로고려사편찬자의 견해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이들 견해에서 공통되는 점은 상정고금례의 편찬이 평장사 최윤의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편찬 시기는 최윤의의 활동 시기와 관련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최윤의는 대대로 고위직을 지낸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11) 그의 고조는 중서령 崔충이고, 증조는 중서령 崔惟善이었다. 祖는 중서시랑평장사 崔思齊, 父는 금자광록대부 崔약이었다. 그는 인종 6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入仕하였다. 그의 생애와 주요 官歷을 살펴보면 <표 1>과 같다.
<표 1>에 나타나 있듯이 최윤의는 인종조에 중요한 관직을 거의 맡지 못했으며, 의종대에 이르러서야 고위직에 올랐다. 즉 그의 주요 활동 시기는 의종대였다. 그가 평장사를 역임한 시기는 의종 9년에서 16년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최윤의에 의해 상정고금례가 편찬된 시기를 이때로 추정한 것은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12) 그리고 이 책을 자료로 하여 편찬한 고려사 예지의 기준이 의종대임을 볼 때 그러한 추정을 가능케 한다.
<표 1> 최윤의의 생애와 주요 관력
시기 역 임 관 직 참 고 전 거
숙종 7년(1102) 生 묘지명 인종 6년(1128) 監門衛錄事 과거 합격 묘지명
인종 8년(1130) 太學博士 묘지명
의종 2년(1148) 中書舍人 國子試 試員 高麗史 選擧 2
의종 5년(1151) 御史大夫 同知樞密院使 묘지명, 절요
의종 6년(1152) 知樞密院事 절요
의종 7년(1153) 禮部尙書 判御史臺事兼太子太傅 묘지명
의종 8년(1154) 知門下省事 知貢擧 高麗史選擧 1
의종 9년(1155) 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判尙書吏部事 兼西京留守使 묘지명
의종 10년(1156) 守太尉 集賢殿太學士 묘지명
의종 11년(1157)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묘지명
의종 15년(1161) 判尙書吏禮部事 監修國史 묘지명
의종 16년(1162) 門下侍郞平章事 묘지명
의종 16년(1162) 8월 卒 묘지명, 절요
* 묘지명高麗墓誌銘集成,절요=高麗史節要
고려사 길례의 太廟 儀에서 ‘태조, 혜종, 문종, 예종, 인종’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 神主는 의종의 先代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이 의례는 바로 의종 당시를 기준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고려사길례 別廟의 細注에 의하면 “의종 때 太廟는 太祖, 惠宗, 顯宗, 文宗, 順宗, 宣宗, 肅宗, 睿宗, 仁宗으로 하고, 別廟는 定宗, 光宗, 景宗, 成宗, 穆宗, 德宗, 靖宗으로 하였다”고 하였으므로 別廟享도 의종조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결국 ①의 주장은 신빙성에 의문이 가며, ②의 견해가 더 타당해 보인다. 이처럼 상정고금례는 의종대에 편찬된 것이 확실해 보이는데, 그 시기는 의종 9년에서 16년 사이로 추정된다. 그런데 다음의 자료를 보면 상정고금례의 편찬 시기가 명확히 드러난다.
④ 명종 18년 2월 임신일에 制하기를, “樂工이 소속에서 도피하여 마음대로 다른 곳에 속한 자는 본업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였다. 史臣이 이르기를, “樂의 결함과 혼란이 막심하다. 太常에서 근자에 선왕 때에 시행하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할 것을 청하여 결재를 받았으나 有司에서 지연시키고 시행하지 않았다. 識者들이 한탄하여 이르기 를, ‘이 樂은 송나라에서 제작한 新樂으로 예종께 선물로 보낸 것이다. 본래 송 태조 가 제정한 음악은 아니며, 이 악을 사용한 지 얼마 안되어 송나라가 어지러워졌다. 더욱이 辛巳年에 우리나라의 儒臣과 미친 樂師들이 함부로 개작한 탓에 次序가 드나 들며, 그 상하가 뒤섞여 어지러워졌다. 그리고 간 척 약 적 등 악기의 盈縮이 같 지 않아 착오가 발생하게 되었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13) 이에 따르면 악공들의 소속이 문란해지자 명종은 이들을 본업에 충실하도록 조처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史論이 기재되어 있다. 이 사론에서 주목되는 것은 “辛巳年에 우리나라의 儒臣과 미친 樂師들이 함부로 개작한 탓에 次序가 드나들며, 그 상하가 뒤섞여 어지러워졌다”라고 지적한 내용이다. 명종 18년 2월 임신일의 편년 기사에 이어 기록된 이 사론은 明宗의 實錄에 있었던 것을고려사를 편찬할 때 전재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辛巳年”은 명종 18년(1188) 이전의 사실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宋의 新樂은 大晟樂을 말하는데, 이것을 도입한 시기는 예종 11년(1116)이었다. 이렇게 볼 때 “辛巳年”은 의종 15년(1161년)에 해당한다. 그리고 <표 1>에서 보듯이 의종 15년은 최윤의가 평장사로서 判尙書吏禮部事 監修國史를 역임하고 있을 때이다. 이렇게 볼 때 사론에서 “우리나라의 儒臣과 미친 樂師들이 함부로 개작”했다고 한 표현은 상정고금례의 편찬 사실을 말한 것이다. 결국 상정고금례는 의종 15년에 평장사 최윤의의 주도로 편찬된 것임이 분명해진다.
Ⅲ. 상정고금례의 편찬 참여자
상정고금례의 편찬을 맡은 崔允儀는 최충의 후손이라는 가문 배경을 볼 때 儒學을 家學으로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문한직과 지공거를 역임한 경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교경전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을 것이다. 사람됨이 剛明하고 大節이 있었으며, 재주와 학식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14)고 한 평가는 최윤의의 인품과 학식이 뛰어남을 말해준다. 이런 점때문에 상정고금례편찬의 책임을 맡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최윤의는 의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있었다. 金存中이, “태자는 어리고 종친은 강성하여 분수 밖의 일을 마땅히 兩府의 재상을 선택하여 동궁의 사부를 삼으소서”라고 건의하자 庾弼을 太師로 삼고, 崔允儀를 太傅로 삼았다.
15) 그리고 의종 12년에 최윤의는 국왕의 명에 따라 白州의 풍수를 살펴보았는데, 그는 돌아와 아뢰기를, “산세가 모여들고 물이 순하게 흘러 궁궐을 세울 만하다”고 하였다.
16) 이에 의종은 최윤의를 李元膺과 朴懷俊 등과 함께 白州에 별궁을 창건하게 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中興闕과 大化殿이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최윤의와 의종의 사이가 매우 각별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더구나 사후에 의종의 배향공신이 된 사실로 볼 때 의종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최윤의는 상정고금례편찬에 대한 책임을 맡았던 것이다. 한편, 이규보의 新序詳定禮文跋尾에 의하면 최윤의는 ‘17臣’과 상정고금례를 편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자료 ④에 의하면 이들은 儒臣과 樂師이었다고 한다. 아마 이들은 文翰職과 大樂署 같은 관아에 속한 관원이었을 것이다. 이들 중 최윤의와 함께상정고금례의 편찬에 참여한 인물로 崔均이 확인된다.
최균은 인종조에 등제하였다. 나중에 승진하여 少府注簿가 되었는데, 이때 재상 최윤의가 왕지를 받들어 文士를 뽑아 禮儀를 상정하게 되자 최균은 소부주부로서 제일 먼저 선발되었다.
17) 고려사길례의 太廟儀 에서 ‘태조, 혜종, 문종, 예종, 인종’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 神主는 의종의 先代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이 의례는 바로 의종 당시를 기준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고려사 길례 別廟의 細注에 의하면 “의종 때 太廟는 太祖, 惠宗, 顯宗, 文宗, 順宗, 宣宗, 肅宗, 睿宗, 仁宗으로 하고, 別廟는 定宗, 光宗, 景宗, 成宗, 穆宗, 德宗, 靖宗으로 하였다”고 하였으므로 別廟 享 도 의종조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결국 ①의 주장은 신빙성에 의문이 가며, ②의 견해가 더 타당해 보인다.
이처럼 상정고금례 는 의종대에 편찬된 것이 확실해 보이는데, 그 시기는 의종 9년에서 16년 사이로 추정된다. 그런데 다음의 자료를 보면 상정고금례의 편찬 시기가 명확히 드러난다.
이에 따르면 최균은 소부시의 주부로서 상정고금례의 편찬에 참여하고 있다. 종7품의 낮은 관품을 가졌지만 ‘文士’로 표현된 것을 보면 그는 학식 있는 관료였을 것이다. 그의 官歷을 보면 <표 2>와 같다.
<표 2> 崔均의 官歷
시 기 역임 관직 참 고 전 거 인종대 登第 高麗史列傳12 崔均 의종 15년(추정) 少府主簿 高麗史列傳12 崔均 의종 16년(추정) 閤門祗侯 高麗史列傳12 崔均 명종 즉위년(1170) 戶部員外郞 高麗史列傳12 崔均 명종 3년(1173) 內侍郎中 金 賀 高麗史 世家 명종 4년 禮部侍郞 高麗史列傳13 趙位寵 명종 4년 東北路都指揮使 조위총의 亂 때 高麗史 列傳13 趙位寵 명종 4년 卒 高麗史 列傳12 趙位寵 禮部尙書 追贈 高麗史列傳12 崔均 尙書左僕射 加贈 高麗史列傳12 崔均
인종대 등제한 최균은 의종대에 이르러서도 하급 관료에 머무르고 있었다.상정고금례의 편찬 당시 그는 종7품의 소부주부로 있었다. 그러나 그는 최윤의에 의해상정고금례의 편찬 사업에 발탁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무엇보다 그의 뛰어난 자질 때문이었다. 최균은 全州人으로 어려서부터 재주와 학문이 매우 뛰어났다. 侍郞 朴椿齡이 完山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聯句로써 시험하였을 때, 그는 崔陟卿 崔松年과 함께 뽑혔다. 이후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이름난 선비가 되어 完山 三崔라고 불리워졌다.
18) 이렇게 볼 때 최균은 의종 당시에 이름난 文士였음이 분명하다. 이에 최윤의는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상정고금례의 편찬에 참여시킨 것이다. 그리고 최윤의가 최균을 크게 신임하고 있었던 것은 다음의 사실이 잘 말해준다. 의종 16년 최윤의가 병이 들자 의종은 사람을 보내어 위문하였다. 이때 그는, “나라의 두터운 은덕을 입어 位는 將相을 갖추었고 子壻에 이르러서도 아울러 빛나고 높은데 거하니 더 바랄 바가 없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크게 쓸 사람은 오직 최균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종은 최균에게 閤門祗候(정7품)를 제수하였다.
19) 이처럼 최윤의가 의종에게 최균을 천거한 것은 상정고금례의 편찬을 계기로 맺어진 돈독한 관계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최윤의의 뜻을 받아들여 최균을 閤門祗候로 제수한 것은 상정고금례의 편찬에 참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의종의 배려가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처럼 상정고금례의 편찬에는 최윤의가 책임을 맡고, 최균 등 여러 文士들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들 이외에 편찬에 참여한 인물은 더 이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더욱이 상정고금례의 편찬 사실은 고려사 세가나 고려사절요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이유는 명종대에 편찬된毅宗實錄이 부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의종은 史官의 임무에 대해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의종 11년 1월, 敬天寺에 행차하였을 때 有司가 행재소가 좁다는 이유로 사관을 물러가도록 청하자 의종은, “사관은 나의 말과 행동을 기록하니, 잠시도 떠나게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20) 이것으로 보아 의종대의 기록은 충실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명종대에 편찬된 毅宗實錄에 있었던 것 같다. 상장군 崔世輔를 同修國事로 삼고, 장군 崔連과 金富를 함께 예부시랑으로 삼았는데, 세 사람은 모두 武官이었다. 무관이 儒官을 겸한 것은 이때에 시작되었다. 어떤 사람이 重房에 호소하기를, “修國史 문극겸이 의종이 시해 당한 사실을 그대로 바로 썼는데, 주상을 시해한 것은 천하의 大惡입니다. 마땅히 무관으로 하여금 수국사를 겸임시켜 사실을 바르게 쓰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문극겸이 이 말을 듣고 두려워서 왕에게 비밀히 아뢰니, 왕이 무신의 뜻을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옛 제도가 아님을 미워하여서 이에 同修國事로 삼았더니, 최세보가 청하지도 않고 事자를 史자로 고쳤다. 이로 말미암아 毅宗實錄이 누락되고 간략하게 되어 사실과 틀린 것이 많았다.
21) 무신정변을 일으킨 무신들은 무관을 수국사로 임명하여 의종 弑逆의 사실을 숨기려고 하였으며, 이로 인해 의종실록은 소홀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의종실록은 의종에 대한 부정적인 서술, 의종 치적에 대한 고의적인 누락과 부실한 기록 등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22) 그리고 의종실록에 수록된 것으로 짐작되는 史論을 보면 의종의 무능과 奸臣의 전횡을 지적하고 있다.
23) 결국 의종실록은 사료로서 그 가치가 의심되는데, 이러한 이유로 의종의 최대 치적인 상정고금례의 편찬에 대한 정황이 상세히 전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상정고금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사료 ④에서 “儒臣과 미친 樂師들이 함부로 개작한 탓에 次序가 드나들며, 그 상하가 뒤섞여 어지러워졌다”고 매우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무신집권기에 있어 상정고금례를 매우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상정고금례는 상하관계를 禮로 규정한 儀禮書였기 때문에 무신정권기에는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참여자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신정변으로 인해 문신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아마 상정고금례에 참여한 문사들은 거의 무신정변의 와중에 해를 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윤의는 의종의 배향공신이었다는 점, 최균은 조위총의 난으로 사망했다는 사실 때문에 고려사열전에서 상정고금례의 편찬 사실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Ⅳ. 상정고금례의 내용
의종대에 완성된 상정고금례는 고려 예제의 기본 자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高宗代에 이르러 상정고금례를 인쇄하여 諸司에 간직하게 한 것은
24) 이 책이 고려 예제의 전형이었음으로 이를 준수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상정고금례는 고려사 志를 편찬하면서 주요 자료로 이용되었고, 조선초의 예제 정비과정에서도 중요한 참고 자료였다. 그러나 상정고금례는 전해지지 않아 그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단편적으로 전해오는 내용을 통해 상정고금례의 특성을 분석할 수밖에 없다. 먼저 고려사 志에서 의종대에 상정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의례를 보면 <표 3>과 같다.
고려사 지에서 의종대에 상정한 것으로 표기된 이들 의례는상정고금례를 근거로 한 것임이 분명하다. <표 3>에 따르면 의종대에 상정된 의례는 태묘 의례(1~3)와 연등회(12, 17), 팔관회(13,18) 등의 불교의례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서경과 남경 순행에 대한 儀仗(14,15,19)과 儀衛(10,11)도 있다. 또한 여기에는 雅樂(3), 鹵簿(9,16,20), 服飾(4~8)이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상정고금례는 국가제사, 불교행사, 음악, 의장, 노부, 복식 등에 대해 종합적으로 규정한 儀禮集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악, 의장, 노부 등은 고려사에서 樂志나 輿服志에 기재되어 있으나, 이것들은 五禮 중에 吉禮와 嘉禮에 해당하는 儀式들이다. 아악, 의장, 노부 등은 世宗實錄 五禮나 國朝五禮儀에도 吉禮와 嘉禮로 편입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詳定古今禮에 있는 이들 儀式은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그 내용에 따라 악지나 여복지로 분류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의종대에 상정된 사실을 직접 기재하지는 않았지만 고려사지에 수록된 여러 의식들도 상정고금례에서 전재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예지의 내용은 상정고금례 이외에도 주관육익, 식목편록,번국예의등의 자료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특히 예지의 연대기 자료는 史編에서 인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예지 서문에서 이들 자료를 참고하였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초의 예제 정비 과정에서 상정고금례는 주요 참고 자료 중의 하나였다. 따라서 상정고금례는 朝鮮王朝實錄을 통해 그 내용을 일부 살펴볼 수 있다. 이를 정리해보면 <표 4>와 같다.
<표 4>를 보면 고려사 길례의 의례는 상정고금례를 참고하여 작성한 것이 확인된다. <표 4>-7)을 보면 상정고금례의 時享太廟儀, 朔望太廟儀,拜陵儀에 관한 儀注를 언급하고 있다. 이 내용은 고려사길례의 것과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표 4>-9)에서는 상정고금례의 원구단 체제를 언급하였는데, 이것은 고려사 길례의 내용과 일치한다. 이렇게 볼 때 고려사 예지 길례의 일부 내용은 상정고금례를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사 예지는 상정고금례의 내용을 그대로 전재한 것은 아니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고려사 예지는 史編과 상정고금례를 기본 자료로 하고 이외에 주관육익,식목편록,번국예의등의 자료를 이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상정고금례의 내용이 고려사의 예지에 반영되지 않은 것도 확인된다. <표 4>-3) 6) 8) 11) 12) 16) 17) 23) 등은 고려사의 예지에서 확인되지 않고 있는 내용들이다. 따라서 고려사의 예지는 상정고금례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없다.
26 禮曹啓 宋制及前朝詳定古今禮 陪祀官 東西相向 (世祖實錄 卷5 2년 12월 임술) 高麗史 卷62 지16 吉禮中祀 籍田 親享儀
및 文宣王廟 視學酌獻儀
高麗史 卷66 지20 嘉禮 王太子加元服儀 吉禮中祀 籍田 文宣王廟
嘉禮 王太子加元服儀
<표 4>를 보면 상정고금례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 대략을 몇 가지로 지적해 볼 수 있다. 먼저 주요 내용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吉禮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는 辨祀, 牲牢, 齋戒 등 세종실록 오례의 서례와 국조오례의서례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丘壇, 太廟 儀禮, 祈雨祭에 관한 내용도 들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상정고금례는 길례, 즉 국가제사에 관한 儀禮集이라고 할만하다.
그리고 <표 4>에서는 鹵簿, 樂에 관한 내용도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상정고금례가 길례만이 아니라 국가의례에 관련된 사항도 포함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또한 服飾에 관련된 사항도 볼 수 있다. 더구나 자료 ③에서는 상정고금례에 국왕의 冕服, 백관의 官服에 관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太一과 같은 도교의례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도교의례인 醮禮는 고려사 예지 雜祀條에 기록되어 있는데, <표 4>-19)에서는 太一이 상정고금례에 등재되어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고려의 도교의례는 국가의례에 수용되어 있었다.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상정고금례는 국가의례 뿐 아니라 국가 전반에 걸친 제도와 문물을 기록한 종합적인 禮書라고 힐 수 있다.
한편, <표 4>에 나타나 있는상정고금례의 체제와 내용을 보면 고려사예지와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 고려사예지 길례가 祭禮의 規式이나 儀注에 관한 규정 사항을 개개의 祀祭 대상별로 서술하고 있음에 반하여,상정고금례에는 이와는 별도로 제사의 거행에 필요한 준비 절차 및 준비 사항에 관한 규정인 序例가 따로 있다.
25) 상정고금례의 이러한 내용 체계는 고려사 예지 길례와는 다르지만 세종실록 오례,국조오례의 와 일치한다. 이렇게 볼 때 세종실록 오례 와 국조오례의 체계는 바로 상정고금례의 형식을 따른 것으로 짐작된다. 둘째, 국가제사의 辨祀에 차이가 있다. 고려사길례에는 이른바 ‘雜祀’라는 항목이 있다. 여기에는 醮禮, 嶽海瀆, 名山大川, 纛祭 등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는 이들 국가제사를 大 中 小祀로 편제하지 않았다. 신라의 경우 三國史記 雜志 祭祀條를 보면 三山을 대사에, 嶽鎭海瀆을 중사에, 名山을 소사에 각각 등재하였다. 그리고 세종실록 오례 吉禮에는 名山大川을 소사로 하였고, 국조오례의 에서는 嶽鎭海瀆은 중사에, 名山大川 纛祭는 소사에 올라 있다. 그런데 고려의 국가제사는 이러한 사례와는 달리 대중소사로 등재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내용이 참고된다.
禮曹에서 山川 祀典의 제도를 올리기를, “삼가 唐나라 禮樂志를 살펴보니, 악진해독은 중사이고, 산림천택은 소사입니다. 文獻通考 의 宋制에서도 岳瀆을 중사로 하였고, 本朝에서도 前朝의 제도를 이어받아 산천의 제사는 아직도 등제를 나누지 아니하였습니다. 境內의 명산대천과 여러 산천을, 바라건대 古制에 의하여 등제를 나누소서”라 하였다.
26) 이에 따르면 조선 태종대까지 명산대천이 대 중 소사로 등재되지 않고 있었는데, 그것은 고려에서 명산대천을 대중 소사로 구분하지 않았던 제도를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前朝의 제도’는 바로 상정고금례를 기준으로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纛祭에 대해서는 예조에서 계하기를, “봄 가을의 纛祭를 대사 중사 소사에 구분하여 정하지 않았으니, 적당하지 못하므로, 여러 제사 의식 중의 소사의 예에 의하여 2일 동안 산재하고, 1일 동안 치재하고, 변두는 각각 여덟 그릇을 쓰며, 그 외의 드리는 제물과 의주는 그 전대로 할 것입니다.” 하였다.
27) 라 하여 纛祭도 ‘未分等第’, 즉 대 중 소사에 등재되지 않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렇듯 고려사예지 길례의 辨祀는 대사, 중사, 소사, 잡사로 되어 있는데 비해 상정고금례에는 잡사라는 항목을 두지 않았다. 고려사예지 길례에는 악해독, 명산대천, 독제 등을 ‘잡사’로 기재하고 있으나 상정고금례는 이들 제사를 ‘未分等第’라고 하였다.
28) 셋째로는 상정고금례와 고려사 예지 길례의 내용에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祭는 고려사 길례에 의하면 風師 雨師 雷神 靈星에 附記되어 있는 비해, 상정고금례에서는 풍사 우사 뇌신 영성과 분리하여 서술하고 있다(<표 4>-1) 참조). 고려사 예지 길례 소사의 의례에는 祭國門儀가 실려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祭는 독자적인 의례를 가진 국가제사로 생각된다. 따라서 풍사 우사 뇌신영성에 부기하여 마치 독립된 제사가 아닌 것처럼 정리한 고려사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사 예지는 상정고금례를 주로 참고하여 편찬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발견된다. 고려사 예지는 일부분에서 상정고금례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그 내용에 차이가 있다. 결국 고려의 예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고려사와 상정고금례를 비교 검토할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된다.
Ⅴ. 맺는말
상정고금례의 편찬 시기에 대해 고려사 예지와 여복지 서문에는 ‘의종조’라고 되어 있으나 이규보의 新序詳定禮文跋尾 에는 ‘인종조’라고 하였다. 그러나 최윤의나 최균의 활동 시기, 그리고 고려사 길례 태묘의 기준이 의종대인 점, 고려사에 의종대에 상정된 의례가 기록된 사실 등으로 보아 상정고금례의 편찬 시기는 고려사 예지와 여복지 서문에 따라 의종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상정고금례가 편찬된 구체적인 시기는 의종 15년(1161년)이었으며, 평장사 최윤의가 주도하고 최균 등 17명의 文士들이 참여하여 완성하였다.
상정고금례는 고려 예제의 典據가 되었으며, 이규보가 跋文을 쓴 무신집권기까지도 그 의례는 충실히 준수되고 있었다. 그리고 高麗史예지를 편찬할 때 상정고금례는 기본 자료로 이용되었으며, 이외에 주관육익 식목편록 번국예의 등의 여러 서적도 참고되었다. 그러나 현재 이들 서적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고려사예지는 고려의 국가 의례를 파악할 수 있는 최종 자료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상정고금례의 내용은 고려사 지와 조선왕조실록에 그 일부가 전해져 오고 있다. 그 내용을 통해 상정고금례의 특징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상정고금례에는 태묘 의례와 연등회, 팔관회 등의 불교의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西京과 南京 巡幸에 대한 儀仗, 鹵簿, 服飾 등이 기재되어 있었다. 따라서 상정고금례는 국가제사, 불교행사, 雅樂, 儀仗, 鹵簿, 服飾 등에 대해 규정한 儀禮集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雅樂, 儀仗, 鹵簿 등은 고려사 樂志나 輿服志에 들어가 있는데, 이들 내용은 五禮 중에 吉禮와 嘉禮에 해당하는 儀式들이다. 이 같은 사실은 高麗史를 편찬하면서 詳定古今禮 에 있는 雅樂, 儀仗, 鹵簿의 儀式을 그 내용에 따라 樂志나 輿服志로 분류하였음을 말해준다.
둘째로는 吉禮에서 辨祀 체계와 내용에서 다소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은 高麗史 편찬자들이 그들의 禮 관념에 따라 고려의 길례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詳定古今禮 는 유교의례와 불교행사, 그리고 도교의례가 함께 수록되어 있었다. 즉 고려시대에는 유교의례, 불교행사, 도교의례가 국가의례로 수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고려의 禮 思想이 유교, 불교, 도교를 기반으로 하였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고려가 불교를 기반으로 한 사회로서, 예제 운용에 있어 유교와 도교사상을 수용하였음을 보여준다. 결국 고려사회는 불교와 유교, 도교가 서로 융화되어 있었으며, 사상의 다원성을 지닌 시대였던 것이다.
주제어 : 상정고금례, 최윤의, 최균, 국가의례, 도교의례, 불교행사, 국조오례의
참고 문헌 東國李相國集 高麗墓誌銘集成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宗實錄 世宗實錄 世祖實錄 國朝五禮儀 金塘澤, 詳定古今禮文의 편찬시기와 그 의도 湖南文化硏究 21, 1992. 김인호, 金祉의 周官六翼 편찬과 그 성격 역사와 현실 40, 2001. 金澈雄, 고려 國家祭祀의 體制와 그 특징 韓國史硏究 118, 2002. 金海榮, 詳定古今禮와 高麗朝의 祀典 國史館論叢 55, 1994. 朴龍雲, 高麗時代 海州崔氏와 坡平尹氏 家門 分析 白山學報 23, 1977. 李基東, 金寬毅 韓國史市民講座 10, 一潮閣, 1992. 李範稷, 高麗史 禮志 분석 韓 劤停年紀念史學論叢 1981 ; 明知史論창간호, 1983 ; 韓國中世禮思想硏究,一潮閣, 1991. 河炫綱, 高麗 毅宗代의 性格 韓國中世史硏究,一潮閣, 1988. 許興植, 金祉의 選粹集 周官六翼과 그 價値 奎章閣 4, 1981. 黃秉晟, 高麗 毅宗代의 政治形態와 武人亂 慶熙史學14, 1987. 黃元九, 高麗史 禮志의 編年的 考察 李弘稙回甲論文集1969. ※ 이 논문은 2002년 11월 30일 투고 완료되어
2002년 12월 13일 편집위원회에서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2003년 1월 17일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2003년 1월 29일 심사위원 및 편집위원회 회의에서 게재가 결정된 논문임.
***상정 고금례 중에 하나의 례***
공복(公服) 고려·조선 시대에 관원이 조정에 나갈 때 입는 예복. 머리에는 복두(頭)를 쓰고, 곡령대수(曲領大袖)를 입고서 허리에 띠[帶]를 띠고 손에는 홀(笏)을 들고 화(靴)를 신었다. 【역사】 공복이 여러 가지 관복의 총칭으로 불리기도 하여, 복두에 곡령대수인 공복과 혼동되고 있다. 공복이란 용어는 신라 법흥왕(法興王) 때 처음 쓰인 말로, 그 형태가 곡령대수와는 다르나, 신라는 520년(법흥왕 7) 자의(紫衣)·비의(緋衣)·청의(靑衣)·황의(黃衣) 등 4색의 복색(服色)에 의한 공복제도를 제정하여 이를 신분별로 입게 하였다. 백제는 이보다 앞서 260년(고이왕 27)에 자의·비의 ·청의 등 3색의 복색에 의한 용복제도를 제정하고 계급에 따라 관식(冠飾)과 의대(衣帶)의 색을 달리하여 입었다. 고려에 들어와 960년(광종 11)에 비로소 4색 공복제도를 정했다. 즉, 원윤(元尹) 이상은 자삼(紫衫)이고, 중단경(中壇卿) 이상은 단삼(丹衫), 도항경(都航卿) 이상은 비삼(緋衫), 소주부(小主簿) 이상은 녹삼(綠衫)이었다. 현종(顯宗) 때 난리를 피해서 남쪽으로 피란할 때 기록이 없어져서 제도나 시행방법을 잘 알 수 없었던 것을 의종(毅宗) 때 최윤의(崔允儀)가 없어진 헌장을 모으고 당(唐)나라의 제도를 참고하여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를 제정하였다. 이때의 공복제도는 4품(四品) 이상은, 옷은 자색(紫色)에 홍정(紅)을 띠고 금어(金魚:금붕어 모양의 금빛 주머니)를 찼으며 상홀(象笏)을 들었다. 5,6품은, 옷은 비색(翡色)이고, 홍정(紅)에 은어(銀魚)를 찼으며 상홀을 들었다. 7,8,9품은, 옷은 녹색이며 목홀(木笏)을 들었으며 어(魚)를 차지 않았다. 조선의 태조는 건국한 해 12월에 관복(冠服)을 공복으로 입도록 하는 제도를 제정하였다. 1품은 홍포(紅袍)에 서대(犀帶)이고, 2품에서 판각문(判閣門) 이상은 홍포에 여지금대(枝金帶)이고, 3품과 4품은 청포와 흑각혁대(黑角革帶)에 상홀이고, 5품과 6품은 포와 띠가 3,4품과 같으나 목홀이며 7품 이하는 녹포에 띠와 홀이 5,6품과 같고, 화(靴)는 모두 흑색이었다. 이 제도는 1469년(예종 1)에 완성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이나 말기의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기록되어 있다. 【착용시기】 고려시대에는 여러 신하의 평상시의 집무복이 공복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상복(常服)이 집무복이었고, 공복은 종친과 여러 신하들이 경사스럽고 즐거운 대사(大事) 때나, 동지·성절(聖節)·정월 초하루·탄일 ·왕에게 표(表)를 올릴 때, 초하루와 보름날 임금을 뵙고 치하를 올릴 때 및 받은 은혜에 감사드릴 때 등에 입었다. 【복두】 공복 착용시 머리에 쓰는 모자로서 절상건(折上巾)이라고도 한다. 【의】 형태는 곡령대수(曲領大袖), 즉 옷깃은 둥글고 소매가 매우 넓은 포(袍)이다. 고려시대의 공복형태는 당시의 초상화를 보면 옷깃과 수구에 선(c)이 돌려져 있다. 조선시대의 공복형태는 선이 없는데, 이것은 명나라제도와 같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난리를 겪는 동안 없어진 관복(冠服)을 신하들이 다 갖출 수 없어서, 공복을 착용해야 할 경우에도 상복(常服)으로 대신하게 된 결과 점차 공복을 착용하지 않게 되어 《대전회통》에도 제도상의 기록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고, 현재 유품으로서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홀】 통일신라·고려·조선 시대에 여러 신하가 관복(冠服)을 입었을 때 손에 든 길이 한 자, 너비 두 치의 얄팍하고 길쭉한 것으로, 1품부터 4품까지는 상아, 5품 아래는 나무로 만들었는데,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다. 중국 서적 《석명(釋名)》 《석서계(釋書契)》에 의하면 왕세자·세손·왕후·비·빈 등을 봉할 때 가르치고, 타이를 말이나 여쭐 말이 있으면 홀에 써 두어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