副提學 公 (諱) 萬理 先朝님의 歪曲(왜곡)된 歷史(역사) 바로잡기 위원회를 구성하여 달라는 大宗會(대종회) 어르신들께 드리는 글
2006년 11월 17일
海(해)州(주)崔(최)氏(씨) (諱(휘))崔(최)萬(만)理(리)公(공)께서는 해방후 사학자인 김윤경이라는 학자의 한번 실수로 한글 창제를 끈질기게 반대한 주모자로 오인되고 있는것입니다. 그 김윤경이는 일제시대의 일본인 사학자 小(소)倉(창)進(진)平(평)(고쿠라 신뻬이)이 쓴 논문의 일부를 확대 해석하여 副(부)提(제)學(학)公(공)을 엄청 나쁜 역사의 죄인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중략) 崔(최)萬(만)理(리)는 억울하다. 崔(최)萬(만)理(리) 後孫(후손) 海(해)州(주) 崔(최)氏(씨)는 조만간 崔(최)萬(만)理(리) 復權(복권)運動(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현재까지의 자료로는 崔(최)萬(만)理(리)가 한글창제팀장으로 활약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기 때문이다.""(황재순 박사의 논문중에서 발췌)
***이중, 첫째는 ""崔萬理는 억울하다. 崔萬理 後孫(후손) 海州崔氏는 조만간 崔萬理 復權(복권)運動(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과연 황재순박사가 우리 海州崔氏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같은 논문을 작성 하였으며,
둘째는 ""海州 崔氏 崔萬理는 어느 한글학자의 한번 실수로 한글 창제를 끈질기게 반대한 주모자로 오인되고 있다. 그 한글 학자 김윤경이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사학자 小倉進平(고쿠라 신뻬이)이 쓴 논문의 일부를 확대 해석하여 최만리를 엄청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라고 하였는데 김윤경이는 과연 우리 海州崔氏와 무슨 원한관계가 있어 일본의 사학자가 쓴 논문을 일부확대 해석하여 지금까지 도 그대로 믿고 있으며 지금도 일부 한글학자들은 근거도 없는 역사의 기록을 마치 사실인양 그들 나름대로 해석을해가면서 까지 학생들을 가르키고 있으며 중학교 교과서에도 채택이 되어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이 에대하여 전혀근거가 없으며 세종의 업적과 한글의 우수성만을 강조하려는 의도인것 입니다)
참고로 말씀 드리자면 일본인 사학자 小倉進平(고꾸라신뻬이)의 논문은 동시대에 우리의 학자이신 양주동 박사(당시에는 영문학박사)에 의하여 철저하게 해부되여 갈기갈기 찢어졌으며, 현재에는 경상대학교(우리나라 국문학의 최고의 권위가 있는 대학교)의 국문학 교수로 계시는 려증동 박사님께서는 “배달글자” 라는 책자에서 무식쟁이 小倉進平이라 하였을정도입니다.
또한, 황재순박사는.. ""현재 가장 시급한 일은 崔萬理라는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비판하고 있는 중학교 국어 교과서부터 빨리 고치는 일이다.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도 ""나쁜 崔萬理가 들어갈 뻔 하였으나 마침 그 때 필자가 교과서심의위원으로 있던 때여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다행히 뺄 수 있었다."" 라고 까지 논문에 써놓았습니다.
이러한 학자들의논문내용을 비추어 볼때에, 가장 큰 현재의 피해자는 당연히 우리의 위대하신 先祖(선조)님이신 副提學公 諱(휘) 萬理 先朝(선조)님과 우리 海州崔氏 後孫(후손)들인 것입니다. 우리 海州崔氏 大宗會(대종회)에서는 이번사태(김원웅이의 망언)를 계기로 인하여 副提學公에 대한 歪曲(왜곡)된 歷史(역사) 를 바로 잡아야만 할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부한글 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천세만세에 인정하는 꼴이 돨것이며 영원히 副提學公先(선)祖(조)님께서는 歷史(역사)의 죄인으로, 우리 後孫(후손)들은 그 멍에를 지고갈수밖에 없는것입니다. 그러므로 大宗會(대종회) 어르신들께 간곡히 請願(청원) 하는것 입니다. 시기상으로 늦었지만 하루속히 副提學公에 대한 歪曲(왜곡)된 歷史(역사)를 바로잡기 전문 위원회를 만드시어 중학교 국어 교과서 (1학년 2학기)를 수정하여야만 할것입니다. 그리하여 앞으로는 이러한 폐단을 없애는것이 중요할것입니다. 현재의 상황을 잠깐 올려드리겠습니다. 저희들은 지난 김원웅이 의 망언에 대하여 성토하는 한편 청와대 교육인적자원부 및 국회 교육위원회에 副提學公에 대한 歪曲(왜곡)된歷史(역사)를 바로잡아달라는 진정을 하였습니다. 그 진정에대한 교육인적자원부의 답변전문입니다.***
중학교 국어 1-2 최만리 관련 답변입니다. (한국교원대학교 답변)
이 문제는 교과서 제재적 측면과 학습목표적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교과서 제재적 측면 - 현재 교과서에 실려있는 최만리의 반대 상소문은 집필진이 임의로 판단하여 거짓을 꾸며낸 것이 아닌, 실제 최만리의 반대 상소문을 사실적으로 요약한 것임. - 교과서 101쪽에도 ""최만리, 김문 등 상당수 관리들은""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특히 최만리가 당시 집현전 부제학으로서 반대 상소문을 올린 학자들의 대표격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교과서 102쪽의 ""최만리의 반대 상소""라는 글이름이 명백히 잘못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나, 학습자에 따라서는 다소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 인정되므로 차후 발행될 교과서에서는 ""최만리 등의 반대 상소""로 글이름을 수정할 예정임.
2. 학습목표적 측면 - 이 단원의 학습 목표는 ""글의 의도나 목적을 파악하며 읽고, 사실과 의견, 주장과 근거를 파악하며 읽는 것""으로, 실제 학습 활동 어디에도 한글 창제를 둘러싼 최만리의 주장이 옳고 그르냐는 등의 가치 판단을 요구하는 내용이 없음. - 오히려 교과서 102쪽에는 ""한자를 익혀 쓰는 것이 학문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와 같은 활동을 통해 학습자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음.(교사용 지도서 150쪽 참조)
3. 기타 - 그 밖에 ""최만리가 한글창제팀장으로 활약했다"" 는 등의 질의자의 주장은 보다 철저한 학계의 고증과 입장 정리가 있어야 할 것으로 사료됨. 어느 주장이 있다는 것만으로 교과서에 반영할 수는 없음. - 중학교 교과서 어디에도 ""나쁜 최만리""로 만들어 구체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곳이 없씀. ***답변의 내용으로 볼때 변한것은 한군데를 내년부터 수정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왜곡된 근원은 남겨두고 있기에 이렇게 대종회 어르신들께 전문위원회를 구성하여달라고 요청을 드리는것입니다.***
***그내용을 나열 하여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교과서 제재적 측면 - 현재 교과서에 실려있는 최만리의 반대 상소문은 집필진이 임의로 판단하여 거짓을 꾸며낸 것이 아닌, 실제 최만리의 반대 상소문을 사실적으로 요약한 것임. (실제와거리가 먼것은 아래 참고자료를 보시면 아실것입니다.)
***이글에서 잘못되였다고 하는것은 우리 副提學公께서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狀況(상황)과 모든 士類(사류)들이 올리는 上疏文(상소문)은 임금의 정책에 반대하는 직간인것을 부득이 反對(반대)上疏(상소)라 稱(칭)하는것이 잘못되였다고 생각되는데도 집필진이 임의로 판단하여 거짓을 꾸며낸것이 아닌 실제라 한것은, 古史(고사)의 識見(식견)이 없는 자들의 소행으로 밖에는 볼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甲(갑)子(:자)上(상)疏(소) 또는 諺(언)文(문) 造(조)語(어)論(논)攷(고)라 하여야 合當(합당)한것입니다.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이나 世宗(세종)實錄(실록)에 그어디에도 反對(반대)上疏(상소) 라는 문구는 없는것입니다.***
- 교과서 101쪽에도 ""최만리, 김문 등 상당수 관리들은""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특히 최만리가 당시 집현전 부제학으로서 반대 상소문을 올린 학자들의 대표격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교과서 102쪽의 ""최만리의 반대 상소""라는 글이름이 명백히 잘못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으나, 학습자에 따라서는 다소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 인정되므로 차후 발행될 교과서에서는 ""최만리 등의 반대 상소""로 글이름을 수정할 예정임.
위답변 내용을 보시면 최만리 반대상소 라는 글이름이 명백히 잘못되었다고는 생각되지않으나, 하였습니다 그리고 학습자에 따라서는 오해의 여지가 있을수 있는점이 인정 되므로 제목만을 崔萬理等의 反對(반대)上疏(상소) 로 修正(수정)한다 하였습니다. 이는 그들도 알고 있듯이 학습자들에게 마음대로 학생들을 가르킬수있는 빌미를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는것입니다. 歷史(역사)는 결코 歪曲(왜곡)되어서는 않되는것인데도 마음대로 학습자의 의도대로 학생들을 가르켜도 된다는것 이기에 이부분이 상당히 위험한 부분인것이며 결코 그리되어서는 않되는것입니다.
2. 학습목표적 측면 - 이 단원의 학습 목표는 ""글의 의도나 목적을 파악하며 읽고, 사실과 의견, 주장과 근거를 파악하며 읽는 것""으로, 실제 학습 활동 어디에도 한글 창제를 둘러싼 최만리의 주장이 옳고 그르냐는 등의 가치 판단을 요구하는 내용이 없음. ***답변 내용으로 보면 앞에서는 그냥 反對(:반대)上疏(상소)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글창제를 둘러싼 崔萬理의 主張(주장)이 옳고 그르냐는 등의 가치 判斷(판단)을 요구하는 內容(내용)이 없다고 운운 하였습니다. 직시 하여보면 副(부)提(제)學(학)公(공)께서 한글창제를 反對(반대)하신 것으로 要約(요약)이 됩니다. 이는 앞서 말씀 드렸듯이 古(고)史(사)의識(식)見(견)이 없는 무식한자의 소행으로 밖에는 볼수 없는것 입니다. 왜냐하면,***
世宗(세종) 25年(년) 癸亥(1443, 正統(정통) 8年(년)) 12月(월) 30日(일)(庚戌(경술)日(일)) 훈민정음을 창제하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諺文(언문) 28字(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篆字(전자)를 모방하고, 初聲(초성)·中聲(중성)·終聲(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文字(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轉換(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訓民正音(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 【원전】 4 집 533 면 【분류】 *어문학-어학(語學)
集賢殿 副提學 崔萬理 等 이 上疏(상소)하기를, “신 등이 엎디어 보옵건대, 諺文(언문)을 제작하신 것이 지극히 신묘하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운전하심이 천고에 뛰어나시오나, 신 등의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되는 것이 있사와 감히 간곡한 정성을 펴서 삼가 뒤에 열거하오니 엎디어 聖裁(성재)하시옵기를 바랍니다.(중략) ***두달이 지난다음에 올린 上疏文(상소문) 인것이 世宗(세종)實錄(실록)에 나와 있는 內容(내용)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일부한글 學者(학자)와 史學者(사학자)들은 한글 創製(창제)를 반대하였다고 하였을까요? 이는 甲子(갑자)上疏(상소) 1條目(조목)부터 4條目(조목)에 나오는 內容(내용)을 直譯(직역)하면 그리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本文(본문) 上疏文(상소문)을 어느일부분만 놓고 解釋(해석)하는것은 객관성이 결여된 큰 잘못인것 입니다. 왜냐하면 甲子(갑자)上疏(상소)를 올리게된 동기의 부여가 甲子(갑자)上疏文(상소문) 本文(본문) 內容(내용)中(중)에 있기 때문인것입니다. 바로 世宗(세종)께서 甲子(갑자)上疏(상소)에 대한 答辯(답변)으로,그대들이 韻書(운서)를 아느냐. 四(사)聲(성)과 七(칠)音(음)에 字母(자모)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韻(덧말:운)書(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하였습니다. 이내용을 보면 韻書(운서)에 대하여 言及(언급) 하였습니다. 韻書(운서)란? 漢子(한자)文(문)의 音(음)을 記錄(기록)한 것입니다. 당시에 洪武(홍무)正(정)韻(운)(中國(중국)의 漢字音(한자음)의 字典(자전)임)을 諺文(언문)으로 韻(운)會(회)諺(언)解(해) 하려는것에 대한 反對(반대)上疏(상소)를 하였다고 하는 內容(내용)인것 입니다. 甲子(갑자)上疏(상소)의 核(핵)心(심)은 바로 이곳에 있는것을 김윤경을 비롯하여 지금의 일부 학자들은 核心(핵심)인 이부분에 대하여서는 言及(언급)을 回避(회피)한채 解釋(해석)을하고 있는것 입니다. 그러면 四聲(사성)과 七音(칠음)은 과연 訓民正音(훈민정음)(한글)을 活性化(활성화)시키는데 도움이 되는것일까요? 본디 四聲(사성)과 七音(칠음)은 中國語(중국어)를 배워보신분이 계시다면 아실수 있을것입니다. 결코 한글인 우리글을 배우는데는 도움이 되질 않는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집필진이 임의로 판단하여 거짓을 꾸며낸 것이 아닌, 실제 최만리의 반대상소문을 사실적으로 요약하였다는 것 자체를 우리는 수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선 신문의 기사를 쓰듯 요약한것도 문제이지만, 갑자상소 본문에 있는 내용이 아닌 세종어제 훈민정음의 내용이 포함 되어있는것 입니다. 더욱이 조정의 반대 입장 이라는 내용을 별도로 만들은것 또한 학생들로 하여금 오해를 낳게 하는 것입니다. 갑자상소 본문의 내용대로 라면 조정은 부제학공과 같이 상소문을 올린 집현전 학자들의 주장이 조정의 입장이며 세종의 반대 입장이라고 표기 하여야 마땅한것입니다.***
그리고 세종은 훈민정음의 제정과 동시에 《동국정운》의 편찬과 《홍무정운(洪武正韻)》의 역훈(譯訓)을 시작하였다. 전자는 한국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하려는 것이었다. 후자는 중국음의 표준을 정하자는 데 있었다. 이 《동국정운》의 편찬은 자주적인 입장에서 중국문화를 적극적으로 섭취하기 위한 방편에서 나타난 것임을 뜻한다. 《홍무정운》을 역훈하게 한 것도 빈번한 중국과의 접촉에서 중국어 습득이 불가피한 만큼 중국어에 대한 표준적인 운서를 정함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이 두 책에 수록된 한자음을 정확하게 표기하기 위하여는 재래의 반절식(反切式)으로도 불충분하고 또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여기에서 훈민정음과 같은 표음문자(表音文字)의 제정이 절실히 요청되었던 것이다. (훈민정음의배경과 경과라는 글에서 발췌)
세종어제 훈민정음이라는 것에 보면 國之語音異乎中國 與文子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而 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便於日用耳
""우리 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서,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에 어진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뜻을 담아서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들어 내놓으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깨우쳐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이것은 세종의 실패작이란 것을 지금의 한글 학자들은 너무도 잘알고 있는것이며, 세종의 편민주의 운운 하는것입니다. 한마디로 世宗(세종)은 諺文(언문)이란 文字(덧말:문자)로서 모든백성을 中(중)華(화)化(화) 하자는 것이었던것 입니다. 이를 두고 지금의 일부학자들은 세종의 편민주의 사상에 대하여 주장하며, 이를 강론하고는 있으나, 이것이 실패작이란 것은 아래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의 記錄(기록)을 보시면 理解(이해)가 될것입니다. 결국에는 廢址(폐지)되는것입니다.*** ======================================================== 世祖(세조) 5年(년)(1459年(년) 乙卯(을묘) 天順(천순)3年(년))에 쓰여진 ´訓民正音(훈민정음)´의 ´世宗(세종) 御(어)製(덧말:제) 訓(훈)民(민)正(정)音(음) ´에서 ""世宗(세종)""은 當時(당시)의 訓民正音(훈민정음)으로 ""ㆍ솅종""으로 表記(표기)되었습니다. 물론 ""세종 어제 훈민정음""이라는 제목 자체도 당시의 표기법대로 ""ㆍ솅종ㆍ엉ㆍ졩ㆍ훈민ㆍ졍흠""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왜 ""세종""이 ""솅종""으로 표기되는지 의아해하실 텐데, 당시의 표기법은 ´東國正韻(동국정운) 식 表記(덧말:표기)´라고 해서 漢字音(한자음)에 이렇게 실제로는 發音발음)되지 않는 형식상의 終聲(종성)(끝소리)을 표기해 주는 것이 原則(원칙)이었습니다. ´東國正韻(동국정운)´은 世宗(세종) 30年(년)에 刊行(간행)된 音韻(음운)書(서)인데 여기에 漢字音(한자음) 表記法(표기법)이 規定(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東國正韻(동국정운)式(식) 表記(표기)´라고 합니다.
´東國正韻(동국정운)式(식) 表記(표기)´는 漢字音(한자음)의 標準化(표준화)를 目標(목표)로 한 것인데, 中國(중국)式(식) 發音(발음)에 최대한 가깝게 表記(표기)하기 위해 이러한 方式(방식)을 쓴 것입니다. 원래 漢子(한자)는 中(중)國(국)에서 우리나라에 傳來(전래)된 文字(문자)이기 때문에 漢字音(한자음)도 같이 傳來(전래)되어, 처음에는 中國(중국)과 韓國(한국)의 漢子(한자) 發音(발음)이 서로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漢字音(한자음)이 점점 변해 갔고, 그 결과 두 나라의 漢(한)字(자)音(음)이 서로 차이가 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러한 表記法(표기법)이 制定(제정)된 것입니다.
東國正韻(동국정운)式(식) 表記(표기)에서는 中國(중국) 原音(원음)에 가깝게 表記(표기)하는 것이 原則(원칙)이기 때문에 訓民正音(훈민정음)에는 ""中國(중국)""이 ""듕뀍""으로, ""便安(편안)""도 ""뼌한""으로 表記(표기)되어 있습니다.
또한, 3성(초성, 중성, 종성)을 고루 갖추기 위해 받침이 없는 漢字音(한자음)의 경우 終聲(종성)에 形式的(형식적) 글자(發音(발음)이 안 되는 글자) ㅇ, ㅱ 등을 使用(사용)하였습니다.
또 ㄹ 終聲(종성)의 漢字音(한자음)에는 ㆆ(여린히읗)을 나란히 적어 그 發音(발음)이 入聲(입성)임을 表示(표시)하는 規定(규정)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以(이)影(영)補(보)來(래)´라고 하는데, ""ㆆ(影의 초성 발음)로 ㄹ(來의 초성발음)을 보충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오늘날의 ㄹ 받침으로 끝나는 漢字音(한자음)을 ㅀ 받침으로 썼다는 뜻입니다.
東(동)國(국)正(정)雲(운)式(식) 漢(한)字(자)音(음)은 실제 通用(통용)音(음)과는 거리가 먼 이상음 이었습니다. 즉 글자만 그런 식으로 表記(표기)했을 뿐, 실제로는 그렇게 發音(발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世宗(세종)·世祖(세조) 때의 文獻(문헌)에만 適用(적용)되고 世祖(세조) 以後(이후)로는 消滅(소멸)되어 더 이상 쓰이지 않았습니다. (成宗(성종)祖(조)에 폐지되었음) 이러한 내용으로 볼때 副(부)提(제)學(학)公(공)외 集賢殿(집현전) 學者(학자)들께서 念慮(염려)하셨던것은 韻(운)會(회)諺(언)解(해)를 하려는 世宗(세종)에 대하여 上疏(상소)를 올린것이 되는것입니다. (훈민정음의배경과 경과라는 글에서 발췌) ========================================================
***동국정운의 잘못된것을 폐지하자는 신하들의 상소내용입니다.***
成宗(성종) 12年(년) 辛丑(신축)(1481, 成化(성화) 17年(년)) 10月(월) 22日(일)(癸亥(계해)日(일)) 禮(예)曺(조)에서 本國(본국) 正(정)韻(운)을 校正(교정)하는 일에 대하여 아뢰다. 禮(예)曺(조)에서 黃(황)州(주) 牧(목)使(사) 權(권)引(인) 의 陳言(진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本國(본국) 正(정)韻(운) 은 先王(선왕) 때 여러 儒臣(유신)들에게 명하여 校正(교정) 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偏見(편견)으로 고칠 수는 없습니다.” 하였는데, 명하여 漢(한)韻(운)을 아는 文臣(문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李(이)命(명)崇(숭),李(이)春(춘)景(경),李(이)昌(창)臣(신),이 의논하기를, “聲韻(성운) 에는 七音(칠음)과 淸濁(청탁)이 있는데, 우리 나라의 音(음)은 齒(치)頭(두)와 正(정)齒(치)의 구분이 없으며, 또 脣(순)音(음)의 輕重(경중)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中國語(중국어)를 배우는 자는 그 정교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먼저 우리 나라의 音(음)을 바르게 하면 韻學(운학)을 밝힐 수 있습니다. 臣(신) 等(등)이 《東國正韻(동국정운)》을 살펴보니, 私(사)와 思(사)는 齒(치)頭音(두음)이고, 師(사)와 獅(사)는 正(정)齒(치)音(음)이여서 합해서 하나의 음이 되고, 卑(비)와 悲(비)는 脣(순)重(중)音(음)이고, 非(비)와 飛(비)는 脣(순)輕(경)音(음)이어서 합해서 하나의 음이 되며, 芳(방)자는 全(전)淸(청)音(음)이고 滂(방)자는 次(차)淸(청)音(음)이지만 역시 혼돈되고 분별되지 않아서 權(권)引(인)의 말과 같습니다. 앞으로 本國(본국) 正(덧말:정)韻(운)은 七音(칠음)을 나누고 淸濁(청탁)으로서 叶(협)韻(운)이 되게 하여 初學者(초학자)로 하여금 먼저 이 책을 익힌 후 洪武(홍무)韻(운)을 배우게 하면 七音(칠음) 回(회)聲(성)이 입에서 저절로 구분되어 漢音(한음)을 배우는 데 반드시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그렇다.”하였다. 【원전】 10 집 269 면 【분류】 *어문학-어학(語學) / *출판-서책(書冊) [주D-001]협운(叶韻) : 어떤 운(韻)의 문자(文字)가 다른 운(韻)에 통용되게 사용하는것. 화합하는것을 뜻함.
- 오히려 교과서 102쪽에는 ""한자를 익혀 쓰는 것이 학문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와 같은 활동을 통해 학습자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음.(교사용 지도서 150쪽 참조) ***이부분에서는 마치 甲子(갑자)上疏(상소)에 대하여 다양한 관점으로 이 問題(문제)를 바라볼수있도록 한것같이 하였지만 事實(사실)과 다른것입니다. 글자그대로 漢字音(한자음)를 익혀쓰는것이 學文(학문)에 도움이 된다고 主張(주장)한다는 이유에 대하여는 지금의 學者(학자)들의 問題(문제)인것이지 副提學公의 活動(활동)當時(당시)에 時代(시대)와는 맞지를 않는 內容(내용)인것 입니다. 이를 지금의 學者(학자)들은 그들만의 편의에 의하여 억지를 쓰고 있는것입니다.
當時(당시)의 士(사)類(류) 들의 思(덧말:사)想(덧말:상)은 곧 國家(국가)의 理念(이념)인 斥佛(척불)崇儒(숭유)의 理念(이념)과 思考方式(사고방식) 이었던것 입니다. 그이유는 太祖(태조) 이성계가 高麗(고려)의 王祖(왕조)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처음에 國號(덧말:국호)는 高(고)麗(려) 라했다는 記錄(기록)이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에 있는것입니다.***
太祖(태조) 1年(년) 壬申(임신)(1392年(년), 洪武(홍무) 25年(년)) 7月(월) 28日(일)(丁未(정미)日(일)) 太祖(태조)의 卽位(즉위) 敎書(교서) (중략)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백성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하늘의 뜻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요청도 거절할 수가 없으며, 하늘의 뜻도 거스릴 수가 없습니다.’ 하면서, 이를 고집하기를 더욱 굳게 하므로, 나는 여러 사람의 심정에 굽혀 따라, 마지못하여 왕위에 오르고, 나라 이름은 그전대로 高麗(고려) 라 하고, 儀章(의장)과 法制(법제)는 한결같이 고려의 故事(고사)에 의거하게 한다. 이에 建國(건국)의 초기를 당하여 마땅히 관대한 은혜를 베풀어야 될 것이니, 모든 백성에게 편리한 사건을 조목별로 後面(후면)에 列擧(열거)한다. 아아, 내가 덕이 적고 우매하여 사정에 따라 조치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데, 그래도 보좌하는 힘을 힘입어 새로운 정치를 이루려고 하니, 그대들 여러 사람은 나의 지극한 마음을 몸받게 하라.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太祖(태조)卽位(즉위)敎書(교서)에서 발췌)
太祖(태조) 1年(년) 壬申(임신)(1392年(년), 洪武(홍무) 25年(년)) 8月(월) 29日(일)(戊寅(무인)日(일)) 밀직사 조임을 경사로 보내 태조가 즉위하게 된 사유를 알리는 표문을 올리다 (태조 이성계가 명의황제에게 사신을 보낸기록입니다) (중략) ‘軍國(군국) 의 사무는 하루라도 통솔이 없어서는 안 되겠다.’ 하면서, 신을 權(권)知(지)軍(군)國(국)事(사)로 추대하였습니다. 신은 본디부터 재주와 덕행이 없으므로 사양하기를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여러 사람의 사정에 몰려서 도망해 피하지도 못하므로, 놀라고 두려워하여 몸둘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황제 폐하께서는 乾坤(건곤)의 넓은 도량과 日月(일월)의 聰明(총명)으로써 여러 사람의 뜻을 어길 수 없음과 微臣(미신)이 마지못했던 일임을 살피시어, 聖心(성심)으로 裁可(재가)하여 백성들의 뜻을 안정하게 하소서.” 【원전】 1 집 28 면 【분류】 *외교-명(明) / *어문학-문학(文學)
鄭(정)道(도)傳(전)이 明(명)나라에 가지고 간 皇帝(황제)의 德(덕)을 칭송하는 表文(표문) 門下(문하) 侍(시)郞(랑)贊(찬)成(성)事(사) 鄭(정)道(도)傳(전)을 보내어 中國(중국) 南(남)京(경)에 가서 謝恩(사은)하고 말 60필을 바치게 하였다. 그 表文(표문)은 이러하였다. “陪臣(배신) 趙(조)胖(반)이 南京(남경)에서 돌아와 禮部(예부)의 箚子(차자)를 가지고 와서 삼가 皇帝(황제)의 勅旨(칙지)를 받았는데,誥(고)諭(유)하심이 간절하고 지극하셨습니다. 신은 온 나라 신민과 더불어 감격함을 이길 수 없는 것은 황제의 훈계가 친절하고 황제의 은혜가 넓고 깊으시기 때문입니다. (중략) 億萬(억만)年(년)이 되어도 항상 朝貢(조공)하고 祝福(축복)하는 精誠(정성)을 바치겠습니다.” 【원전】 1 집 33 면 【분류】 *외교-명(明) / *어문학-문학(文學) [주D-001]우(禑) : 우왕(禑王). [주D-002]요(瑤) : 공양왕(恭讓王). [주D-003]덕음(德音) : 황제의 말씀.
太祖(태조) 1年(년) 壬申(임신)(1392年(년), 洪武(홍무) 25年(년)) 11月(월) 27日(일)(甲辰(갑진)日(일)) 國號(국호)를 정하는 問題(문제)에 대한 禮部(예부)의 咨文(자문)을 계품사 조임이 가져오다 (중략) 太祖(태조) 2年(년) 癸酉(계유)(1393年(년), 洪武(홍무) 26年(년)) 2月(월) 15日(일)(庚寅(경인)日(일)) 國號(국호)를 朝鮮(조선)으로 정하는 禮部(예부)의 咨文(자문)
奏聞(주문)使(사:향)하여 恩惠(은혜)를 謝禮(사례)하는 禮(예)를 행하였다. 그 咨文(자문)은 이러하였다. “本部(본부)의 右(우)侍(시)郞(랑) 張(장)智(지) 등이 洪武(홍무) 25年(년) 閏(윤)12月(월) 初(초) 9日(일)에 삼가聖旨(성지)를 받들었는데, 그 조칙에, ‘東夷(동이)의 國號(국호)에 다만 朝鮮(조선)의 稱號(칭호)가 아름답고, 또 이것이 傳來(전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名稱(명칭)을 根本(근본)하여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後嗣(후사)를 永久(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하였소. 삼가 本部(본부)에서 지금 聖旨(성지)의 事意(사의)를 갖추어 앞서 가게 하오.” 임금이 감격해 기뻐하여 한상질에게 田(전)地(지) 50結(결)을 내려 주고, 境(경)內(덧말:내)에 敎旨(교지)를 내렸다. “왕은 이르노라. 내가 덕이 적은 사람으로서 하늘의 아름다운 명령을 받아 나라를 처음 차지하게 되었다. 지난번에 중추원사(中樞院使) 조임(趙琳)을 보내어 황제에게 주문(奏聞)하였더니, 회보(回報)하기를, ‘나라는 무슨 칭호로 고쳤는지 빨리 와서 보고하라.’ 하기에, 즉시 첨서중추원사 한상질(韓尙質)로 하여금 국호(國號)를 고칠 것을 청하였다. 홍무(洪武) 26년 2월 15일에 한상질이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는데, 그 자문에, ‘본부(本部)의 우시랑(右侍郞) 장지(張智) 등이 홍무(洪武) 25년 윤12월 초9일에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그 조칙에, 「東夷(덧말:동이)의 國號(덧말:국호)에 다만 朝鮮(조선)의 稱號(칭호)가 아름답고, 또 그것이 傳來(전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名稱(명칭)을 根本(덧말:근본)하여 본받을 것이며,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後嗣(후사)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고 하였소.’ 하였다. 지금 내가 불선(不善)하니 어찌 감히 스스로 경하(慶賀)하겠는가? 실로 이것은 종사(宗社)와 백성의 한이 없는 복(福)이다. 진실로 중앙과 지방에 널리 알려서 그들과 함께 혁신(革新)하게 할 것이니, 지금부터는 高麗(고려)란 나라 이름은 없애고 朝鮮(조선)의 國號(국호)를 좇아 쓰게 할 것이다. 이 처음으로 교화(敎化)를 시행하는 시기에 있어 마땅히 관대한 은전(恩典)을 보여야 될 것이니, 홍무(洪武) 26년(1393) 2월 15일 이른 새벽 이전의 이죄(二罪) 이하의 죄는 이미 발각된 것이거나, 발각되지 않은 것이거나, 또는 이미 결정(結正)된 것이거나, 결정되지 않은 것이거나 모두 이를 사유(赦宥)해 없애버리게 하되, 감히 유지(宥旨) 전(前)의 일로써 서로 고발하여 말하는 사람은 그 죄로써 죄주게 할 것이다. 아아! 제왕(帝王)의 기업(基業)을 세워 자손에게 전하매, 이미 국호(國號)를 고치게 되었으며, 정사(政事)를 발포(發布)하고 인정(仁政)을 시행하는 데에 마땅히 백성을 근심하는 정치를 펴야 될 것이다.” 【원전】 1 집 41 면 【분류】 *외교-명(明) / *왕실-사급(賜給) / *사법-행형(行刑) ========================================================
***불행스럽게도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에는 明(명)의 皇帝(황제)가 우리朝鮮(조선)을 (東夷(동이)) 동쪽의 오랑캐라 稱(칭)하였는데도 태조 이성계는 감격하였다고 한 기록을 눈여겨 보아야할것입니다.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에 그記錄(기록)이 있듯이 그누구도 부인 할수없는것이 바로 朝鮮(조선) 建國(건국)의 理念(이념)인것이며 朝鮮(조선)이라는 國號(국호)는 물론 임금의 책봉과 朝貢(덧말:조공)을 바쳤다는 記錄(기록)은 朝鮮王朝(조선왕조)가 끝나고, 갑오경장 이후1897年(년) 高宗(고종)이 大韓帝國(대한제국)이라는 國號(국호)를 쓰기전까지는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이를 지금의 일부 한글學者(학자)나 史學者(사학자)들은 歪曲(왜곡)하는것입니다. 하여서 교과서 집필진들의 위와같은 답변의글은 절대로 인정할 수가 없는것입니다.***
3. 기타 - 그 밖에 ""崔(최)萬(만)理(리)가 한글창제 팀장으로 활약했다"" 는 등의 질의자의 主(주)張(장)은 보다 철저한 學界(학계)의 考證(덧말:고증)과 立場(입장) 整理(정리)가 있어야 할 것으로 사료됨. 어느 主張(주장)이 있다는 것만으로 교과서에 반영할 수는 없음. - 중학교 교과서 어디에도 ""나쁜 최만리""로 만들어 구체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곳이 없씀. ***위에 내용에 대하여는 副提學公께서 한글 創製(창제)팀장으로 활약했다는 것은 한글 學者(학자)들의 엉터리 主張(주장)에 맞서자는뜻에서 우리도 추상적으로 集賢殿(집현전) 首長(수장)이신 副提學公께서 諺文(언문)創製(창제)를 모르실 리가 없다고 判斷(판단) 되므로 諺文(언문)創製(창제)의 팀장으로 활약하였다고 하였던것에 대한 교육인적자원부의 답변인것입니다. 끝으로 교육인적자원부에서는 철저한 학계의 고증과 입장 정리가 있어야 할것으로 사료된다고 하였는데 제가 위에 열거한 내용중에 저의 사견이나 우리 해주최씨의 견해가 들어간 대목이 없고 다만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것을 토대로 나름대로 교육인적자원부에 답변을 구성 하여 본것입니다. 이보다 더나은 고증과 입장정리는 앞으로 대종회 어르신들께서 만들어 주시는 副提學公에 대한 歪曲(왜곡)된 歷史(역사) 바로잡기 專門(전문) 委員會(위원회) 委員(위원)들 께서 하실것입니다. 현재 중학교 교과서 집필진이 있는 한국교원대학교에는 우리종친이신 국문학교수이신 운식 교수님(좌랑공파), 영문학 교수이신 수영종친(현감공파), 그리고 상명사범대학교 문학박사 이신 기호종친(전한공파),홍대 문학부 학장이신 강현종친(현감공파),등이 계시며. 항일 투사 최익환(문정공파)선생의 사위이신 신복룡 박사님도 계십니다. 앞으로 천세만세 부제학공의 위상과 우리후손들의 멍에를 벗겨주신다는 명분으로 이일에 협조를 구하는 바입니다. 하여서 간곡하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대종회장님을 비롯하여 고문님들, 임원님들에게 청원 드리오니 가납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아래자료는 참고로 올리는 글입니다.***
국어교육문제점.txt (20 kB)
孫 元 一 (한국 시스템 연구원 원장) 한국어를 침몰시킨 主役은 국어 교과서다. 한글전용을 先導, 督戰하였을 뿐 아니라 ""文學의 鑑賞"" 중심으로 편찬, 운용되고 있다. 전 국민을 ´詩人 + 小說家´가 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일부 紙面이 ""國語의 知識""으로 할당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위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보조역할과 ´한글전용´을 正當化하는 데 主로 쓰여지고 있다. 詩와 小說은 고유어가 거의 전부이기 때문에 한글만으로 표기해도 지장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學問과 專門 및 기본교양을 위해서는 수많은 漢字語를 쓰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지 않고서는 경쟁, 발전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現狀 유지도 하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국민공통기본 교과 중에서도 으뜸인 국어과 교과서가 고유어 중심인 한글전용에 詩人과 小說家의 양성에 매달리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러한 전체 상황 아래서 국어 교과서에 어떠한 내용이 실려 있는지 독자 여러분께서 판단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이에 두 개의 事例를 보여드리겠다.
훈민정음 완성되다
다음 例는 중학 국어 1학년 2학기 교과서에 실린 「훈민정음 완성되다」이다. 이 단원에서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가상 기사문과, 이에 대한 찬반 의견을 다룬 두 편의 글이 실려 있다. 하나의 사실에 대해 서로 다른 글을 읽고, 글쓴이의 의도를 판단하며 읽어보자.""는 설명이 맨 앞에 나와 있다. 그리고 소설이 끝난 뒤에 ´적용학습´이란 란을 만들고는 ""다음 글을 읽고, 자신이 생각하는 ´한글의 우수성´에 대하여 말해 보자.""는 요구를 했다. 이 단원에서 발견된 문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전체적으로 국어의 교재로서 적합하지 않는 내용이다. 국어의 학습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글전용을 정당화하기 위한 理念을 注入하기 위한 것이다. 학문적 條理를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記述 방법이 유치하다. 사사롭게 농담을 건네는 것 같은 자세다. 인터넷 등에서 젊은 층에서 주고받는 용어들에 고유어를 이용한, 몇 사람 사이에서만 통하는 극단적인 縮約, 變形이 盛行되고 있어 모두들 걱정하고 있으나 여기서 쓰이고 있는 문장 속에 그러한 투의 말 놀림을 많이 발견하였다. 그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2) 약 550년 전에 新聞이 있었다고 가정하고 訓民正音의 완성되었음을 取材하여 쓴 記事文이라고 내세우는 발상 자체가 妄發이며, 내용 설명이 6何 原則을 지키지 않는 등 신문기사로서도 낙제다.
(3) 소위 기사문에 근본적인 착오가 많다. ""새 문자는 소리나는 대로 쓸 수 있기 때문에 漢文보다 익히기가 훨씬 쉬워""라 했지만 그렇지 않다. 우선 文章과 文字를 직접 비교한 것부터 틀렸다. 그리고 ´익히기´란 무슨 뜻인지 모호한 표현이다. 만약 언어의 認知를 의미하는 것이면 대단히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가 된다. 言語의 인지는 인류의 일반적인 인지능력의 하나로서 인식되어야 하며 언어와 언어 사이, 문자와 문자 사이의 인지 효과의 비교 판단을 그렇게 간단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4) ""각종 경서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라고 했으나 여기서 飜譯이란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飜譯은 언어와 언어 사이에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문자와 문자 사이에서는 번역이 아니라 音寫가 있을 뿐이다. 말과 글자를 혼동하면 안 된다.
(5) ""최만리의 반대 상소""와 ""최만리의 반대 상소에 대한 조정의 입장""이라 하여 꾸며댄 글이 이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이 무척 유치하다. 細部에 모순과 착오가 많다. 국어 교과서가 국어의 理解와 表現 등에 관한 능력의 향상을 위한 교재를 마련하지 아니하고 이와 같은 엉터리 手法에 의한 한글 우수성 과시에 沒頭하는 것은 옳은 敎育이 아니다.
(6) ´적용학습´이라는 란에서 ""다음 글을 읽고 ´한글의 우수성´에 대하여 말해 보자""고 요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앞서의 가짜 기사문을 통하여 훈민정음의 正當性과 有效性을 한껏 강조한 후에 하는 것이라 속셈이 뻔하다.
(7) ""한글은 컴퓨터 시대에 가장 앞장 설 글자이다.""라는 설명이 있으나 이것은 틀린 생각이다. 지금 컴퓨터 처리방식은 한글이나 漢字나 英字나 모두 형태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각 부여된 符號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덮어놓고 가장 앞섰다고 자랑할 근거가 전혀 없다. 다시 말해 똑 같은 조건 하에서 처리되고 있다.
(8) ""컴퓨터가 정확한 발음을 인식하여 글자를 만들어 내는 시대가 된 것이다.""라고 한 다음 ""머지 않아 말을 하면 한글이 튀어나오는 컴퓨터시대가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이다.""라고 끝맺고 있는데 엉터리 희망이다. 본격적인 음성 컴퓨터는 腦가 자신의 構造와 機能을 완전히 분석하여 또 다른 뇌를 창조하는 것이므로 가까운 장래는커녕 아득한 장래에도 원리적으로 실현되기 어렵다. 교과서가 그렇게 제멋대로 예측하는 廣場이 되어서는 큰 일이다.
3. 長期基本計劃도 좋지만 교과서부터 正常化 해야
정부에서 교육에 관한 새로운 장기계획을 발표(12. 17)했다고 한다. 이름하여 「國家 人的資源開發 기본계획」이다. 요컨대 2005년까지 2조2,400억원의 稅金을 더 投入하겠다는 것이다. 금년도 교육예산은 추가경정예산을 고려하지 않은 본 예상에서 이미 防衛費보다 24%나 더 많은 19조9,136억원을 넘었는데 이제 다시 큰 증가 要因이 생긴 것이다. 신문을 보니 이 계획에 좋은 말이 많다.
이렇게 보도되었다. ""계획에서 첫 번째로 거론된 것이 국민 기초교육 보장과 초·중등 교육체계 자율화이다. 국민 기초교육을 통해 21세기 지식기반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基本的인 能力(core competence)을 갖추도록 하고, 초·중·고교의 핵심적 使命도 여기에 맞추도록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학교는 학생의 교육적 成就가 최소한의 수준에 도달하든 못하든 책임을 지지 않았으나, 앞으로는 責任을 지겠다는 것이다."" 이 기사에 ""국가가 교육을 책임진다""라는 큰 제목이 나와 있다. 국가란 누구인가? 그 돈은 누구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가? 국가라는 이름의 사람은 없는 것이다. 민족이라는 이름도 또한 같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自然은 民族을 만들지 않았다. 다만 하나하나의 인간을 만들었을 뿐이다. 각자가 言語와 法律 및 風習을 다르게 갖게 됨으로써 비로소 민족으로서의 구별이 생기게 된 것이다."" 맞는 말이다. 國家와 民族이라는 全體集合이 먼저 존재해서 사회가 굴러가는 것이 아니다. 그 이름을 가지고 움직이는 自然人이 하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누구든 국가와 민족을 앞세운 말을 들으면 일단 의심할 필요가 있다. 또 호주머니 속에 있을 때의 만원의 쓰임새와 이것이 稅金으로 정부에 들어가서의 쓰임새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정부가 교육을 책임지겠다는 그 말은 결국 공무원이 세금 가지고 전적으로 운영하겠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비효율과 위험부담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아도 義務敎育이 高等學校로 확대된 느낌이 있고, 大學에 대한 정부의 재정지원과 간섭이 더 해 가고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 계획으로 더 확실해졌다. 대학에 대한 재정지원이 또한 많아질 모양이다. 이 계획에서 이 점이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기본계획은 대학의 역할과 기능이 21세기 지식경쟁의 성장동력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앞으로는 대학이 産·學·硏 협력체제가 아니고서는 발전할 수 없으며, 外部의 돈을 끌어들이지 않고는 핵심연구와 기술개발도 불가능하다는 前提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이 産·學·硏 協力團이다. 이 협력단은 대학 내에 독립적인 법인으로 설치, 운영된다."" 요컨대 學力의 계속 低下라는 기본문제에 대한 시정노력은 물론 걱정조차 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정부의 교육활동의 확대만 열심인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 계획의 첫 번째로 擧論된 것이 국민 기초교육의 보장과 초·중등 교육체제 자율화라고 한 이상 한글전용은 마땅히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 문제를 그대로 둔다면 그러한 ""첫 번째 거론""이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評을 면하기 어렵다.
흔히 말하기를 역사에서 교훈을 받는 민족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50여년 실행하여 엄청난 손실을 입고 미래를 극히 위태롭게 하는 한글전용에서 교훈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토의조차 기피하고 있다.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한글전용 아래에서는 사회의 모든 精神的 구조가 모래 위에 세워진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함께 지금 시정하지 않으면 앞으로 어느 누구도 시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번 대학 수학능력 시험에서 개인 得點만 본인이게 알리고, 總點席次를 公開하지 않아 계속 혼미상태에 있다. 당국은 성적위주의 시험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공개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도대체 성적이 기초가 되지 않는 試驗이 어디에 있는가? 말끝마다 需要者 중심의 교육을 한다고 주장해 온 것은 그럼 속임수였는가? 더욱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능시험문제를 내기 위한 상설기구를 만든다는 점이다. 문제의 핵심인 學力 增强에 대해서는 여전히 말이 없고, 현재의 혼란에 대한 책임을 아무도 지지 않는 가운데 기구만 하나 늘게 한 당국의 꾀가 과연 비상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敎育評價院과 교육개발원 등 기구는 교육의 기본 사명인 학력 증강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는 기구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또 새로 만드는 기구로서 국민의 평균지식 수준이 향상되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言語學에서는 언어의 形式은 음성과 문자, 內容은 意味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어의 경우는 한글전용으로 말미암아 形式은 民族主義, 內容은 社會主義를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말, 우리 글""이라는 슬로건을 흔들면서 한글절대를 외치며 고등학교와 大學까지도 사실상 평준화 공교육 기관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대학 졸업자의 대다수가 자신의 이름과 자기가 전공한 학과의 이름을 漢字로 쓸 줄 모르는 상황에 이르게 한 정도로 知性을 마비시킨 한글전용을 더 이상 끌고 가서는 안 된다. 글자의 차원이 아니라 개념, 의미, 생각, 의식의 次元이며 민족의 생존, 발전이 걸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敎育을 정부가 책임지겠다는 壯談은 국가의 장래를 위태롭게 하는 발상이다. 自由民主主義의 大 원칙에 어긋날 뿐 아니라 공부는 어디까지나 本人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부는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정부는 그 기초환경을 정비하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公敎育의 費用은 이래 치나 저래 치나 대다수 국민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리고 기초교육의 기준이 될 교과서가 지금처럼 詩人과 小說家를 양성하는 데 집중해서는 나라가 健全할 수 없다. 朝鮮 5백년의 詩人政治, 空理空論의 論의 政治를 그리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 국어의 표기에 대한 잘못된 規制를 하루바삐 풀어야 한다. 그리하여 국어를 정상화하자.
****최만리선생의 후세에 알려진 억울함을 표시한 내용 입니다.
한글창제를 반대(?). 최만리
한글창제를 반대하다뇨?
이 대로 (풍수지리 전문 사이트) 출처:http://myhome.hanafos.com/%7Ejadstone/chap6-15.htm 세상에서는 저를 한글창제에 반대한 최만리(崔萬理, ?~1446)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한글이 어렵게 창제되었음을 부각시키기 위해 저를 제물로 삼은 것이며 왜곡된 것입니다.
사실 입으론 우리말을 하면서 그것을 한문으로 표기하자니 고통이 많고 배우기도 어려워 글은 소수의 상류계층의 독점물이었지요. 그래서 소리나는 대로 그대로 적을 수 있는 문자가 절실하게 필요하였지요.
그래서 세종 임금은 우리 말의 소리를 낼 때의 발음기관 모양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것을 본떠서 글자를 만드신 겁이다.
인류문자의 역사로 볼 때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것은 일찍이 없었던 파격적인 발상으로 그만큼 한글은 우수하면서 독특한 음소체계로 만들어진 과학적인 문자입니다.
저는 해동공자로 불리던 최충(崔충))의 12대 손으로 부정과 타협을 모르는 깨끗한 벼슬아치였고, 부제학 시절에는 14번이나 상소를 올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 중에는 불교 배척이 6회, 첨사원 설치 반대가 3회 그리고 한글의 반대 상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글에 대하여 반대한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훈민정음이 완성될 때까지 저는 임금의 뜻을 잘 받들어 반대한 일이 없었는데, 훈민정음을 완성한 임금이 비밀리에 의사청에서 최항(崔恒) 등 집현전 소장학자만 참가시킨 뒤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라 는 원나라 웅충(熊忠)이 엮은 책에 한자의 음을 한글로 표기하는 자음개혁을 하려고 지시했습니다.
당시는 우리 나라 한자음이 체계없이 사용되어 어느 정도 중국 체계에 맞는 새 운서를 편찬할 의도로 당시 한자음을 개혁하려 한 것이지요. 그러자 집현전의 중진 학자와 저는 한자음 개혁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 상소는 여러 군데 한글 창제의 불필요성, 한글의 무용론이 있어 사대주의적 성향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일로 세종이 친히 국문한 내용을 보면, 한글 창제에 반대한 점이 아니라 「고금운회거요」의 번역 사업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성격이 강직하고 곧아 타협을 몰랐던 저는 한 번은 환관이 사모(紗帽)를 쓰자, 상소를 올려 갓을 쓰도록 건의했습니다.
“예로부터 역대 임금이 환관을 사랑하고 신임하여 권세가 천하를 기울이는 자가 심히 많았으나, 갓을 바꾸지 못한 것은 환관의 무리를 일반 관리와 구별하기 위해서 였읍니다.” 여러 환관이 눈을 흘겨 의논이 정지된 일도 있습니다.
1444년 한글과 관련해 세종의 신문을 받은 다음 날, 저는 다시 복직이 되었으나 집현전 부제학을 끝으로 고향에 돌아와 여생을 마쳤습니다. 경기도 안성에 있는 저의 무덤에는 ‘집현전부제학 최공만리지묘(集賢殿副提學 崔公萬理之墓).‘라 쓰여 있습니다.
==================================================================== ***부제학공의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시는 학자님들입니다. 李崇寧, 李丙徒,南廣祐,吳煥逸, 朴聖根,申福龍,崔起鎬,黃在純, 박사님들입니다. 이중에 이숭녕,이병도,남광우, 박사님께서는 타계하셨고, 문집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아직도 배웠다는 학자가 아래와 같이 김원웅이 보다도 더 악랄한 방법으로 副提學公을 誹謗(비방) 貶下(폄하)하고 있는것 입니다.
세종탄신 607돌 기념 공동 학술대회
주제 : 소리와 말 (악률과 정음) 일시 : 2004년 5월 14일 (금요일) 오전 9:30 - 오후 6:00 장소 : 한양대학교, HIT 대회의실 주최 : (사)한국국악학회, (사)한국어정보학회 후원 : 한국학술진흥재단, 넷피아, 한글인터넷주소추진위원회, 한양대학교
***아래글은 경희대학교 정보통신학과의 교수의 글로써 부제학공을 주제로 쓴 가상 소설과도 같은 글인것입니다. 그가 위학술회의에서 강의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배웠다는 학자들이 아래와같이 김원웅보다도 더 악랄한 방법으로 부제학공을 비방 폄하하고 있는것입니다.***
==================================================== ***다음은, 세종대왕의 둘째 딸 정의공주의 훈민정음 관련 부분 이야기입니다.***
진용옥 (경희대 교수 정보통신대학원)
[훈민정음에서 훈민은 어린백성(愚民)을 대상으로 지식대중화를 겨냥했다는 것을 뜻한다. 세종의 아버지 태종은 무력 탄압에 의한 신권(臣權)의 제압으로 왕권(王權)을 확립하는데 성공했지만 일시적인 방편이란 사실을 세종은 너무나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민권의 신장만이 신권을 견제하고 왕권을 지탱할 수 있는 요체임을 분명하게 깨닫고 3권 정립에서 왕권의 안정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민권세력은 워낙 미미하여 신권의 대안세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이를 위하여 새로 28글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케 할 따름이니라”고 설파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정음창제는 지식대중화를 통한 민권신장으로 신권에 대응하고, 왕권의 안정을 꾀하기 위하여 기획된 궁정내부 프로젝트인 셈이다.
<<이를 간파한 사람이 최만리이다. 사대 논리로 반박했지만 기실은 민권 신장이 신권을 제약할 수 있다는 저의를 알아채고 거칠게 반발한 것이다. 그는 결코 사대주의자가 아니라 기득권의 침해에 저항한 옹졸한 기회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최만리의 반대가 아니라 정음창제에 주도세력이었던 세조에 의하여 삼권정립의 구도는 결딴나기 시작했다. 세조는 도덕적 결함을 봉합하려고, 정음 세력을 탄압하거나 회유하면서 또 다른 반 정음 세력들과 결탁함으로써 세종의 구도는 허무하게 무너지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 그런데 정의공주는 변음의 발견으로 정음창제에 공이 있지만, 그 남편은 세조 반정에 공을 세워 일등공신이 되었다.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주의 아들은 단종의 편에 섰으니 역사는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 주려 하는 것일까? ====================================================================
558돌 한글날 기념 한글 정보화 보고 대회 성황리 개최 2006/07/31 16:16
http://blog.naver.com/autotoki/80026934444 ▲ 한글정보화보고대회 중 한글e메일주소(대한민국@국회) 기증식에서 (왼쪽부터 이종걸 의원, 이계진 의원, 남궁석 국회사무총장, 넷피아 이판정 대표, 전병헌 의원, 나경원 의원, 서상기 의원, 최기호 한글인터넷주소추진총연합회 회장) (중략) 한글인터넷주소추진총연합회 최기호 회장은 “이 행사를 통해 한글관련 단체들의 노력 및 활동을 소개하여 참가자들의 공감대를 끌어내고, 또한 정보격차해소를 위한 한글의 역할을 재조명해 한민족의 정기를 되살릴 것이며, 나아가 한글e메일 전국민 보급을 선포해 문화산업 및 IT산업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습니다. ■ 식 순 1. 개회사 -김계곤 한글학회 회장 2. 국민의례 3.격려사 -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전 문화부 장관) - 김덕규 국회부의장 : 정보화시대에 가장 적합한 언어, 한글 - 김덕룡 한나라당 원내대표 : 정보화시대의 경쟁력, 한글 - 김형오 한나라당 의원 4. 축사 및 축전 - 전병헌 열린우리당 의원 - 이계진 한나라당 의원 : 정보선진국으로 나아가는 첫걸음, 한글사랑 - 박종국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5. 주요인사 소개 6. 인사말 - 최기호 한글인터넷주소추진총연합회 회장 : 남북한 정보기술(IT)과 조국통일 7. 한글을 빛낸 국회의원 한글현판 및 문화상품 기증 8. 한글e메일주소 기증식(대한민국@국회), 기념촬영 9. 아름다운 한글인터넷주소 등 시상 및 기념촬영 10. 한글정보화 현황 및 전망보고대회 - 이금룡 이니시스 대표이사 : 인터넷주소 한글화의 의의 - 김광옥 수원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 인터넷 시대의 한글정보화 산업에서 발전시켜 나갈 일들에 대하여 - 진용옥 경희대학교 정보통신대학원 교수 : 정음한글의 정보이론 11. 한글정보화 보고대회 기념 떡썰기 사진촬영 및 오찬 ======================================================== ***윗글을 보면 진짜로 학식도 없는 무식한자의 소행으로 밖에는 치부할 수가 없음입니다. 글자그대로 古(고)史(사)의 識(식)見(견)은 커녕 대학교수로서의 자질을 의심을 할정도로 형편없는 자기만의 생각으로 스스로 유명 소설작가인양 소설을 써내려간 꼴을 보니 기가차서 말이 않나옵니다. 현재에 모든 학자라고 자청하는 위인들의 무식한 작태를 더는 두고 볼수없는것입니다. 끝으로 저의 사견입니다만 지금의 한글 학자들은 하루빨리 어린 학생들의 컴퓨터 은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여야만 할것입니다. 저역시 한글의 우수성에 동의하지만 지금의 학생들이 사용하는 은어는 앞으로의 세대간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 것입니다. 이땅에 三綱五倫(삼강오륜)이 무너진지가 오래이고 崇祖(숭조)情神(정신)도 없는 일부 학자들에의해 만들어진 오늘날에 교육의 실태를 실로 걱정 하지 않을수 없는것 입니다. 더욱이 그들로부터 더 이상 副(부)提(제)學(학)公(공)을祭物(제물)로 소설을 쓰게 하여서는 않되는것임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한글연대표 - 김정수(1994), 한글의 역사와 미래, 열화당 1397(태조6) 음력 4월10일(양력 5월15일) 이방원의 세째 아들(세종)이 태어남. 1398(태조7) 태조가 이방과(정조)에게 왕위를 물림. 1400(정종2) 정종이 이방원(태종)에게 왕위를 물림. 1418(태종18) 태종이 세자 충녕 대군(세종)에게 왕위를 물림. 1422(세종4) 세종이 활자의 글씨체를 고쳐 만듥게 함. 1440(세종22) 세종이 교서관의 글자 연구를 장려함. 1443(세종25) 음력 12월 세종이 몸소 ´훈민정음´을 만듦.
1444(세종26) 세종이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선로, 이개, 강희안들에게 ""운회(韻會)""를 한글로 번역하게 함. (세종 언문청 설치: 집현전 소장학자들 중심으로 한자음 개혁 실시) 1445(세종27) 세종이 신숙주, 성삼문, 손수산 들을 요동에 보내어 운서를 질문하게 함. 권제, 정인지, 안지 등이 ""용비어천가"" 125장을 지음. 1446(세종28) 음력 9월 상순 ""훈민정음"" 펴냄. 세종이 대간(臺諫)의 죄를 훈민정음으로 써서 의금부와 승정원에 보임. 훈민정음을 이과(吏科)와 이전(吏典)의 시험 과목으로 정함. 1447(세종29) ""용비어찬가""를 풀이함. 관리 시험에서 훈민정음 과목을 먼저 치르게 함.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동국정운""들을 짓고, ""용비어천가""를 펴냄. 1448(세종30) ""동국정운""을 펴냄. 1449(세종31) 운서를 교열하기 위해서 신숙주, 성삼문 등이 중국 사신의 숙소에 찾아 다님. 1450(세종32) 성삼문, 신숙주, 손수산 들이 명나라 사신에게 운서에 대해 질문함. 음력 2월 17일(양력 4월 8일) 당대에 ´해동의 요순´이라 일컬음 받던 세종 큰 임금이 돌아감. 1504(연산군10) 연산군의 잘못을 지적하는 한글문서 사건이 나서, 한글 가르치기를 금하고 한글로 된 책들을 불사르게 함. 1506(중종1) 언문청을 없앰. 1887(고종24) 로스(J. Ross)의 ""예수 셩교 젼셔"" 펴냄. 1890(고종27) 주시경이 국어 공부와 연구를 시작함.
1894(고종31) 갑오경장. 7월 8일 외국의 나라, 땅, 사람의 이름들을 한글로 적도록 하는 법령이 공포 됨. 11월 21일 칙령으로 법률과 칙령에서 국문 곧 한글로 적기를 중심으로 하고 한자를 덧붙이거나 섞을 수 있도록 규정함. 1896(건양1) 4월 7일 처음으로 한글만 쓰는 신문 ""독닙신문""이 독립 협회에서 창간됨. 5월 주시경이 한글맞춤법의 통일을 위한 ´국문 동식회´ 모음. 1897(건양2) 주시경이 ""국어 문법"" 지음. 1905(건양9) 지석영이 ""신정 국문"" 펴냄. 1906(건양10) 주시경이 ""대한 국문 문법"" 펴냄. 1907(순종1) 학부에서 국문 연구소 세움. 주
岡林
이렇게 애쓰시는 英林아저씨 화이팅, 종친의 한사람으로서 이 글을 다 읽는것만으로도 우리의 역사를 바로세우는 길에 한발짝 다가서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