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는 임진왜란 때 큰 공적을 남긴 위대한 장수인이다. 그러나 논개와 그녀의 가계, 생장과정, 그리고 신분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논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621년 어우당 유몽인이 저술한 “어우야담”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문헌에는 논개의 가계와 생장과정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녀에 대해 많은 억측과 이론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던 중 1700년대 초에 진주 사람들이 논개의 순절을 포양하도록 계청하였던 바, 조정에서는 그녀의 가족을 찾아 포상하라는 윤허가 있었다. 경상우병영에서는 경상도 일대에 관문을 뛰워 사문했으나 논개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어 포상하지 못했다. 그 뒤 꾸준히 논개 사적 조사가 진행되어 1700년대 중반부터 권적의 “경상우병사 증 좌찬성 최공의 시장”, “호남절의록”, “호남상강록”, “호남읍지”, “동감강목”, “일휴당실기“, ”매천야록“등의 문헌과 고노상전 200년의 구전설화등이 쏟아져 나오면서 논개의 가계와 생장과정 등의 행장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정리해보면 논개는 이름, 호는 의암, 성은 신안 주씨이며,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 마을에서 아버지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특이하게도 논개는 4갑술(갑술년, 갑술월, 갑술시-1574.9.3밤)의 사주를 타고 태어났다. 아버지 주달문은 딸아이의 사주를 짚어보고 계집애지만 크게 될 인물이라고 기뻐하였다. 이름을 논개라고 지은 것은 딸을 술시에 낳았으니까 개를 놓은 것과 같고, 거꾸로 읽으면 ‘놓은 개’, 즉 ‘논개’가 되므로 그렇게 이름 붙이면 역신도 시샘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였다.
논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여 부모의 가르침을 잘 따랐으며 나이에 비해 성숙하였다. 가난했지만 화목한 가정이었다. 논개 나이 다섯 살 되던 해에 뜻하지 않게 아버지를 여의었다. 의지할 곳 없던 모녀는 한 마을에 사는 숙부 주달무 집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그런 어느 날, 숙부는 노름으로 돈을 탕진하고 이웃 마을에서 밥술깨나 먹고 사는 김풍헌에게 찾아가서 조카를 민며느리로 몰래 팔고 달아났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논개 모녀는 부랴부랴 외가로 일시 피신했으나 김풍헌의 제소로 장수 관아로 끌려가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때의 재판관은 최경회 현감이었다. 최 현감이 자초지종을 캐보니 달아난 숙부 주달무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논개 모녀를 무죄 방면했다. 그러나 갈 곳 없는 두 모녀를 최 현감은 내아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지내도록 배려했다. 이런 운명적이 인연으로 최경회와 논개는 만나게 되고 최 현감집 식솔이 되었다. 논개는 잔심부름이 끝나는 대로 틈틈이 김씨 부인이 일러준 충효열의 뜻을 가슴 깊이 새겼다.
세월이 흘러서 논개 나이 17세가 되던 1590년 최경회가 담양부사로 재직할 때 두 사람은 부부의 예를 올렸다. 그 해에 최경회는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화순으로 가면서 논개를 고향 장수로 보냈다. 2년뒤 임진년(1592)에는 역사상 980여 회의 외침 중 가장 처참했다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상중인 최경회는 전라우도 의병장이 되어 옛날 현감을 지냈던 장수에 들러 의병을 모집하고 논개도 만났다. 실로 2년 만의 해후였다. 최 의병장이 월강리 앞 들판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들을 훈련시킬 때 논개는 동네 부인들을 모아서 의병들의 수발을 들었다. 최 의병장은 훈련된 500여 정예부대를 골자부대로 이름 짓고 무주 쪽으로 진격한 뒤 무주 우지치전투에서 첫 대승을 거두고 여세를 몰아 산음, 지례, 개령, 성주등 경상도 일대를 누비면서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1592년 10월, 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된 데에는 최경회가 이끄는 호남 출신 의병들의 성 외곽에서의 맹활약이 크게 주효했던 것이다. 최경회는 그간의 의병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1593년 4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영전되어 진주성으로 입성했다. 그 소식이 장수에 머물고 있던 논개에게도 들려왔다. 논개는 벅찬 가슴을 억누르고 한시 바삐 진주로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남복으로 변장을 하고 진주로 가는 도중에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오랜만에 논개를 본 최 병사는 한없이 반가웠지만, 회포를 나눌 겨를이 없었다. 10만이 넘는 왜군이 진주성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첩보를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대비책을 강구하느라 동분서주해야 했던 것이다.
6월 19일, 드디어 왜군은 10만여 대군을 사방으로 나누어 진주성을 본격적으로 공격해왔다. 11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 끝에 진주성은 무너지고 7만에 가까운 민관군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성은 아수라장으로 초토화됐다.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 등 진주성 3장사는 성이 함락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왕이 계신 북쪽을 향해 하직인사를 올린 후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투신 순국했다.
한편 전투가 한창일 때 논개는 성안에서 수발을 열심히 들었지만, 성을 빠져나간 후일을 도모하라는 최 병사의 엄명에 성을 빠져나와 외진 곳에 은신하면서 전황을 살폈다.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 병사가 순국했다는 소식을 접한 논개는 무엇인가 비장한 결심을 했다. 마친 칠월 칠석에 왜군이 촉석루에서 진주 관기들을 불러놓고 전승 축하연회를 갖는다는 소식이 들여왔다. 논개는 이때를 놓칠세라 마음에 다지면서 관기들 틈에 끼여 연회장까지 들어갈 요량으로 관기들이 촉석루에 들어가는 시간과 길목 등을 정확히 알아두었다. 그러고는 몸에 지니고 있던 금붙이로 여름옷 한 벌을 곱게 장만하고 가락지 등 필요한 물건도 구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논개는 관기처럼 곱게 단장하고 시간에 맞춰 길목에 서 있었다. 논개는 관기들이 촉석루를 향해 들어갈 때 뒤에서 천천히 따라 가다가 발길을 돌려 촉석루 아래 강가의 바위 쪽으로 내려갔다. 연회장으로 가면 정체가 탄로날 위험성이 있으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요염한 자태를 드러내어 상대방을 유인해 보자는 계략이었다. 연회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술에 취한 왜장들이 문득 강가의 바위 쪽을 내려다보았다. 웬 선녀처럼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강가의 바위 끝에 서서 자기들을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는 것이었다.
왜장들은 한눈에 반하여 금시라도 여인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정체를 몰라서 망설이고 있었다. 돌연 육척장신의 체격이 장대한 왜장 하나가 논개쪽으로 다가가면서 자기에게로 오라며 소리쳤다. 논개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손짓을 하면서 왜장을 유인했다. 왜장은 논개의 아름다운 자태에 매혹되어 자기도 모르게 논개 앞으로 다가갔다. 논개는 미소를 지으며 손에 가락지를 낀 팔을 벌려 기쁘게 맞이하면서 왜장을 껴안으며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투신 순절했다. 논개가 살해한 왜장은 힘세고 용맹스럽기로 유명한 맹장 게야무라 로쿠스케였다.
논개가 순절한 바위를 후인들이 의암이라 이름 짓고 논개와 동일시하여 호가 되었다. 이상이 위에서 논의된 문헌, 설화 등을 집약해서 구성한 의암 주논개의 일대기이다. 앞으로는 논개의 가계, 생장과정, 신분 등에 관해서는 더 이상 우를 범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나아가 의암 주논개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첫째로 제 몸을 불살라서 주변을 밝히는 인애정신, 둘째로 패권주의에 맞서 끝내 항거한 의용정신, 셋째로 사대부도 아닌 아녀자의 몸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지아비를 사랑한 충열정신은 만인의 귀감이 되는 바, 그 위대한 교훈을 세상에 널리 홍보하여 어린이에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본받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