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 잡록에 기록된 충의공 (휘)최경회장군의 기록 입니다.<종친 여러분 꼭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작성일 : 2006-11-29 23:47
이름 : 현청수문장
난중잡록 3(亂中雜錄三)
계사년하 만력 21년, 선조 26년(1593년)
○ 전라도 남원에 있는 의병장 종사랑(義兵將從仕郞) 전 제릉참봉(齊陵參奉) 변사정(邊士貞)은 삼가 목욕하고 백번 절하며 정륜입극성덕홍렬(正倫立極盛德弘烈)주상전하(主上殿下)께 말씀을 아뢰나이다. 아! 신(臣)이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세한 정성으로 군사를 일으킨 지 해가 넘도록 아직 일을 마치지 못하였고, 서쪽 행재소(行在所)를 바라보니 피눈물이 항상 흘러 오래갈수록 진정할 수 없나이다. 통분(痛憤)하옵니다, 흉악한 적이 창궐하여 망극한 화는 이미 말할 수도 없거니와 파천(播遷)하신 행차가 두 해가 되도록 돌아오지 못하실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모욕을 받음이 이미 많고 궁궐이 폐허가 되었는데, 가을 바람이 처량하고 찬 이슬이 장차 맺히려 하옵니다. 서방을 우러러 바라보니 간담이 무너지는데도 아직 목숨을 바쳐 적진에 달려들지 못하옵고, 추위 더위를 두 번이나 겪도록 수치를 참고 원수와 한 하늘을 이고 있사오니, 신이 천지간에 죄를 진 지 이미 오래입니다. 의사(義士)들이 처음 일어날 때에 신도 또한 강개히 분발하여 곧 창을 베개 삼고 원수를 함께 갚으려 하였사오나 스스로 돌아보니, 늙어 무능하므로 밤낮으로 통분한 마음만 간절할 뿐입니다. 다만 고경명(高敬命)・최경회(崔慶會)・임계영(任啓英) 등의 세 군대가 전후로 갈 적에 향인들과 더불어 도모하여 군량과 군기를 모두 내어 힘껏 부조하여 보내었더니, 그 뒤에 한 고을의 선비들이 전 목사 정염(丁焰)과 유학(幼學) 양주(梁澍) 등과 더불어 서로 의론하기를, “본부는 남방의 보장(保障)인데 이 부를 지키지 못하면 호남 일도가 모두 적굴이 될 뿐 아니라, 충청도 한 지방도 장차 차례로 함락되어 서울의 적과 합세하게 되면 회복하는 일을 결코 바랄 수 없으니 어찌 고을 의병을 일으켜서 목숨을 바쳐 성을 굳게 지켜 이 보장(保障)을 완전히 하지 않으랴.” 하고, 신을 늙은 선비라 하여 추대하여 도장(徒長)을 삼았습니다. 신이 스스로 헤아려 보니, 군사의 일을 알지 못하고 병들고 쇠한 것이 어찌 감히 감당하오리까마는 다만 신의 헛된 이름이 조정에 알려져서 두 번이나 능참봉[添齋郞]을 지냈으므로 비록 초야(草野)에 있더라도 의리상 사양할 수 없기로 드디어 동지의 선비들과 몇 달 동안 경영하였더니, 전 부사(府使) 윤안성(尹安性)이 군사를 도와주어 성사하기를 권하고 전 체찰사 정철이 또한 부장(副將) 이잠(李潛)을 시켜 보좌하게 하니, 고을 군사가 이미 즐거이 따르며 이웃 고을 군사도 또한 따라 일어나서 도합 천여 명이 모였고, 양식과 무기도 근근이 준비되어 작년 11월에 비로소 영남으로 가서 적을 토벌할 계획을 하였더니, 장차 거사하려 할 즈음에 정철이 전령(傳令)하여 신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올라와서 힘을 합하여 적을 치자고 독려하기에 신이 즉시 달려서 공주에까지 이르니, 군량이 먼 데 있어 운반하기가 극히 어려워 군사들이 모두 굶주려 어찌할 계책이 없으므로 곧 이 사정을 정철에게 보고하였더니, “물러가 호남과 영남의 경계에 있으면서 전 목사 김홍민(金弘敏)과 더불어 합세하여 적을 방어하라.” 하므로, 곧 충청도 옥천 땅으로 가서 부장(副將) 이잠으로 하여금 정예한 군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황간(黃澗)에 들어가 지키면서 요해지에 매복시켜 상주・선산・개령・금산에 왕래하는 적을 막아 치게 하여 작년 12월부터 금년 5월 말까지는 늘 그곳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 이잠은 훌륭한 장수로서 날래고 용맹스럽기 짝이 없으며, 몸을 잊고 나라만 위하여 항상 군사들과 달고 쓴 것을 함께 하며 매양 들어가 적을 정탐할 때에는 몸소 모든 군사보다 앞서서 때로는 말을 버리고 빨리 도보로 험한 데를 이어 넘고 깊은 데를 건너서 서너 번 쉴 만한 거리를 출입하여 하루도 게을리함이 없이 뒤를 치고 돌격하기도 하여 전후에 머리를 베어 온 것이 거의 50여 급에 이르고, 그중에 활 쏘아 죽인 수는 이루 다 헤일 수가 없으며, 명 나라 장수가 적과 강화하고 토벌을 금한 뒤에는 죽인 것을 보고하지 않은 것도 또한 많사온데 모두 체찰사의 장계 가운데 나타나 있습니다. 뒤에 적들이 내려가자 이잠이 먼저 앞서서 대구로 들어가서 명 나라 병사와 합쳤더니 수일 만에 명 나라 장수가 말하기를, “너희들이 여기에 있어서는 소용이 없으니 모름지기 너희 나라 군사들과 일을 같이 하라.” 하므로, 바로 함안으로 내려와서 모든 장수들과 함께 진(陣)을 쳤습니다. 당시에 창원의 적이 가득하여 세력이 치성하매 다른 장수들은 감히 손을 대지 못하는데 이잠만은 능히 들어가 토벌하여 곧 머리 세 개를 베어 바쳤는데 그 사실도 또한 방어사 이복남의 장계에 있습니다. 또 적의 세력이 함안으로 충돌하자 곧 여러 장수들과 함께 의령으로 나갔습니다. 그때에 병사 최경회와 창의사 김천일 등이 모두 이곳에 나와서 신과 의논하기를, “진주를 보존하고 못함은 호남의 존망과 가장 관계가 깊은데 주장(主將)의 조처가 어긋나서 성을 지킬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고을의 목사와 판관이 모두 먼 데로 나갔으니, 우리들이 급히 입성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고, 일시에 군사를 내어 삼가(三嘉)에 이르렀더니, 이잠이 신에게 말하기를, “대장과 부장이 모두 한 성으로 들어가면 군량의 운반이 극히 어려우니 대장은 나누어 밖에서 진을 치고 양식을 운반함이 옳다.” 하므로, 물러가 산음현에 있었는데, 진주와의 거리가 하룻길이었습니다. 겨우 한 번 양식을 운반한 뒤에 벌써 진주성이 포위를 당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신이 외로운 군사를 가지고 능히 들어가 구원하지 못하고 번민하고 머물러 있었으니, 신도 또한 머물러 있은 죄가 지극하여 당연히 베임을 당함을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때에 만약 한 주장이 독촉하여 군사를 합해 전진하여 혹은 근교(近郊)에서 위엄을 보이고, 혹은 산 위에서 횃불을 밝히고, 혹은 요해처(要害處)에 매복을 시켜서 구원하는 형상을 보였더라면 적이 손쉽게 성을 헐지 못하였을 터인데,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가까운 데 주둔해 있으면서도 관망하기만 하고 회피하여 곧 달려가 구원하지 아니하여 진주성이 포위를 당한 지가 이미 7・8일이 되었는데도, 약간의 군대라도 보내어 구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서너 번 쉬어갈 만한 거리에 인적이라곤 없어서 소식이 통하지 못하니, 마치 진(秦) 나라와 월(越) 나라가 서로 떨어져 있는 듯하여 마침내 충성스러운 장수와 군사로 하여금 모두 칼날에 죽게 하여 쓰러진 시체가 10만이나 되어도 심상히 보고 있었으니, 아! 하늘이여! 이것이 웬 사람입니까? 대저 오늘날 기강이 없어지고 호령이 분명하지 않아서 상주고 벌줌이 두서가 없으니 어찌 권면하고 징계할 수가 있겠습니까? 난이 일어난 이래 의병을 거느린 자로 전후에 목숨을 바친 이가 이미 한둘이 아니었는데 관군을 거느린 자는 그들의 죽는 것을 서서 보면서 감히 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군법으로 처단하지 아니하고 이럭저럭 놓아둔 때문에 지금 모두 이와 같으니 이러고서야 어찌 회복을 도모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이미 나라를 잃었으니, 비록 중흥할 희망이 있다 하나 밖에는 국가를 위해 죽으려는 훌륭한 장수가 없어서 변고가 생긴 이래로 붕괴되어 흩어짐이 버릇이 되어 구차스럽게 세월이나 넘기어 군사를 퇴각시켜도 한 사람도 형을 받는 이가 없고, 구(救)하지 아니하여도 한 사람도 죽임을 받는 이가 없어서 개와 양 같은 무리가 덤비는 화가 반드시 호남까지 모두 함몰시키고야 말 것입니다.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니 통곡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를 읽어 보니, “원하옵건대, 폐하께서 신에게 적을 토벌하여 부흥시키는 책임을 맡겨 공이 없거든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라고 한 구절이 있으니, 그의 스스로 책임짐이 이와 같아야 비로소 장수된 도리에 합당한 것입니다. 장수를 이와 같이 얻어야 비로소 회복의 일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전일에는 한갓 맹위(猛威)를 부리는 사람들만을 써서 군사를 어루만지며 훈련시키는 것을 먼저하지 않았으며, 전비(戰備)만 엄하게 단속하여 군사와 백성의 마음을 잃었고, 당장 난이 일어날 줄 알면서도 말단의 기계(器械)에만 관심을 두고 도무지 싸우는 정신력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으니, 이러고서 적과 싸움에 임해 어찌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혹 부득이하여 겉이 그럴듯한 사람 중에서 발탁하여 장수의 책임을 맡기면 비록 요행으로 일시의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무딘 칼[鉛刀]로 두 번 베기는 어려워서 오직 머뭇거리며 자신이나 보전할 계책을 하니, 군사는 피곤하고 적은 강한 상황에서 국사가 장차 어찌할 수 없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회복의 공적에 대한 책임을 맡기시려면 반드시 먼저 한 훌륭한 장수를 가려서 수레바퀴를 밀어 보내어 곤외(閫外)의 전권(專權)을 일임하여 여러 장수가 모두 통솔되어 호령이 한곳에서 나오게 하고 군사를 퇴각시키거나 구하지 않은 자는 반드시 군법으로 처치한 연후에야 희망이 있을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고 전처럼 이럭저럭 구차하게 한다면 반드시 적을 토벌하여 회복하게 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명 나라 병사가 한 번 돌아간 뒤에는 다시 의지할 만한 세력이 없으매 흉악한 적이 반드시 두 번째 범하여 무인지경(無人之境)에 들어오듯 하여 의관(衣冠)이 오랑캐의 옷으로 변할 것이 아침이 아니면 저녁이 될 것이니, 전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신은 노쇠한 썩은 선비로서 본시 말 달리고 활 쏘는 재주도 없으면서 외람되어 의병장의 칭호만 가지고서 이미 스스로 군사들 앞장에 서서 목숨을 버리고 달려가 구하지 못하였으면서 도리어 다른 장수를 책망하니, 그 죄 또한 크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신을 베어서 나머지 사람을 징계하시면, 장차 모두 관망하고 분주히 서로 구하여 회복의 가망이 있을 것입니다. 신의 이 말씀이 비록 과격하고 지리한 듯하오나 아뢰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은 신이 친히 이곳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의 물러나고 비겁한 짓을 눈으로 보았고, 여러 장수들의 잘못을 귀로 들었기 때문에 국가를 위해 통분하고 애석한 심정이 가슴속에 가로막혀 터뜨릴 길이 없으므로 지금 숨길 수 없는 날을 당하여 감히 외람되게 할 말을 다함이 이에 이르렀사오니,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밝으신 전하께서는 유의하여 살피십시오. 아! 진주성의 함락에 의로운 장수와 정예한 군사들이 다 죽어 남음이 없어 슬프고 원통함이 천지에 사무칩니다. 그중에서도 충청병사 황진(黃進)은 극력 방어하여 장수와 군사들을 격려하여 일마다 자신이 앞장서서 밤낮으로 조치하여 쏘아 죽이고 던져 물리쳐 성 밑에 송장이 쌓여 적이 가까이 오지 못한 지 10여 일이었는데 마침내 불행히 죽었으니 애통하기 그지없습니다. 아! 진주성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황진이 만약 있었던들 진주성은 반드시 함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니, 그 위인이 과감하고 충성하여 직책을 다하다가 절의에 죽은 것이 장순(張巡)과 어찌 다르오리까? 창의사 김천일은 신의 벗입니다. 의령(宜寧)에 있을 때 신과 항상 왕래하였는데 말이 국사에 미치면 반드시 눈물부터 먼저 흘러 죽기로 맹서하였으며 종일토록 말하는 것이 시종 반드시 적을 쳐서 원수를 갚겠다 하더니, 이제 마침내 피하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이 손을 붙들고 함께 죽었으니 그 충성어린 분노와 의기(義氣)는 옛 사람중에 구하여도 많이 얻지 못할 것입니다. 전 현령(縣令) 고종후(高從厚)는 고경명(高敬命)의 아들로서 그의 아버지가 적의 칼날에 죽은 것을 통분히 여겨 원수 갚기에 뜻이 간절하여 힘을 합해 싸우다가 마침내 성이 함락되자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아들 고인후(高因厚)가 모두 의에 나아가 죽었으니, 그 한 집안 충효(忠孝)의 정성은 해와 달을 꿴 듯이 밝아서 고금을 상고해 보아도 그 짝을 찾기 어렵습니다. 신의 부장 이잠(李潛)은 황진과 성을 나누어 지켰는데 홀로 1대(隊)를 당하여 용맹과 날래기가 백 배나 되어 적을 쏜 것이 수없었고, 적이 성중에 가득 들어왔을 때에도 오히려 쏘기를 그만두지 않다가 화살이 다 떨어지고 어쩔 수 없게 된 연후에 조용히 말을 타고 돌격하다가 마침내 적의 칼날을 맞았으니, 이러고 본즉 힘껏 싸워 충성을 다한 절개는 반드시 황진과 더불어 서로 상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아! 이 네 사람 같은 이는 충성과 절의와 효도를 모두 할 대로 다하여 성인(成人)의 도리에 부끄러움이 없는 이들이온데 전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이 땅 밑의 혼령들을 위로하시렵니까? 혹시 표창함이 그 실적에 알맞지 못하고 그 부모와 처자에게 내리는 휼전(恤典)이 여러 사람의 기대에 흡족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이 모두 마음이 풀어져서 능히 후일의 충의를 분발 흥기시키지 못하지 않을까 신은 염려됩니다. 신이 전하께 바라옵는 바는 오직 군령(軍令)을 엄히 하고 전공(戰功)을 분명히 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군령이 엄하지 않으면 중흥의 희망이 끊어질 것이며, 전공이 분명치 못하면 장수와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입니다. 희망이 끊어지고 사기가 떨어진 뒤에는 다시는 손댈 곳이 없고 명 나라 병사를 다시 청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밝으신 전하께서는 깊이 깨우치소서. 소신이 처음 군사를 일으킬 때에 여러 벗들이 모두 말하기를, “군사 일으키는 연유를 아뢰지 아니할 수 없다.” 하였으나, 신은 생각하기를 우리가 일어나는 것은 일부의 적을 토벌하여 지방을 지켜 분함을 풀 따름이다. 더구나 체찰사가 이미 장계를 올렸으므로 번거롭게 소를 올릴 필요가 없어 지금까지 침묵하여 아뢰지 아니하고 오직 적을 치기만 일삼은 것입니다. 이제는 적이 이미 다 물러가고 대가(大駕)가 장차 환도하시게 되어 회복할 기약을 날을 정해 기다리고 있고, 또 신이 지금 나이 65세라 늙음과 병이 침노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휘하에서 일을 함께 한 사람들이 군무에 애쓴 것을 아직도 표창한 일이 없으니, 신이 곧 죽은 뒤에는 사정을 밝힐 수 없겠으므로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진술하오며, 또 각 인의 공로를 별지에 기록하되 등급을 상세히 나누어 보시기에 편리하게 하였습니다. 참모 진사 김득지(金得地)와 종사 유학 양주(梁澍)에게 부쳐 삼가 일의 전말(顚末)을 갖추어 멀리 어전(御前)에 호소합니다. 신은 지금 전망(戰亡)한 나머지의 군사를 수합하여 함양 지방의 요해처에 주둔해 지키면서 적을 평정하여 강토를 영원히 맑히기를 기다립니다. 연후에 억지로 병든 몸을 일으켜서 조관(朝官)의 반열에 공손히 서서 성명(聖明)의 중흥하온 경사를 축하하는 데는 어찌 감히 뒤지오리까? 신은 통곡과 감격의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나이다. ○ 전라 우도 의병 및 복수병(復讎兵)과 선비들이 남은 군사 수백 명을 수습하여 전 제독(提督)화순(和順) 최경장(崔慶長)을 추대하여 장수로 삼았는데 최경장은 최경회(崔慶會)의 형이었다. 계의(繼義)라는 두 글자로써 장표(章標)를 삼았다. 다산시문집 제13권
기(記)
진주 의기사기(晉州義妓祠記)
부녀자들의 성품은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 그러나 하품(下品)인 사람은 분독(忿毒)을 이기지 못하여 울적하여 죽고 상품(上品)인 사람은 의로워서 그 몸이 더럽혀지고 욕을 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여 죽는다. 그가 죽었을 때 모두들 절개가 바르다고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자기 혼자 죽는 데 그친다. 창기(娼妓)와 같은 부류는 말할 나위도 없다. 어려서부터 풍류스럽고 음탕한 일과 정(情)을 옮기고 바꾸는 일에 길들여졌으므로, 그들의 성품은 흘러다니고 한군데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 또한 남자들은 모두 남편이라고 생각한다. 부부(夫婦)의 예에서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군신(君臣)의 의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로부터 전쟁터에서 멋대로 미녀(美女)를 약탈한 경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죽어서 절개를 세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옛날에 왜구(倭寇)가 진주(晉州)를 함락하였을 때 의로운 기생이 있었으니, 그녀는 왜장(倭將)을 꾀어 강 가운데 있는 돌 위에서 마주 춤을 추다가 춤이 한창 무르익어 갈 즈음에 그를 껴안고 못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이곳이 그녀의 의절(義節)을 기리는 사(祠)이다. 아, 어찌 열렬한 현부인이 아니랴. 지금 생각해 볼 때, 왜장 한 명을 죽인 것이 삼장사(三壯士)의 치욕을 씻기에는 부족하다고 하겠으나, 성이 함락되려고 할 때 이웃 고을에서는 병사를 풀어서 구원해 주지 아니하고, 조정에서는 공(功)을 시기하여서 패하기만 고대하였다. 그리하여 견고한 성지(城池)를 적군의 손아귀에 떨어뜨려 충신과 지사의 분노와 한탄이 이 일보다 심한 적이 없었는데, 보잘것없는 한 여자가 적장을 죽여 보국(報國)을 하였으니 군신(君臣)간의 의리가 환히 하늘과 땅 사이에 빛나서, 한 성에서의 패배가 문제되지 아니했다. 이 어찌 통쾌한 일이 아닌가. 사(祠)가 오래도록 수리를 하지 못하여 비바람이 새었는데, 지금의 절도사(節度使) 홍공(洪公)이 부서진 것을 고치고 새롭게 단청(丹靑)을 칠한 다음 나에게 그 일을 기록하게 하고, 자신은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촉석루(矗石樓) 위에 걸었다.
[주D-001]의로운 기생 : 진주(晉州) 기생 논개(論介)를 말함. 그녀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진주가 함락되자, 왜장(倭將)과 촉석루(矗石樓)에서 연회를 베풀다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南江)에 빠져 왜장과 함께 죽었다고 함. [주D-002]삼장사(三壯士) : 임진왜란 때 진주의 촉석루에 올라가 당면한 국가의 장래를 통탄(痛歎)하며 죽기로 맹세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한 세 장사로, 김성일(金誠一)·조종도(趙宗道)·이노(李魯)를 말함. 이러한 영남(嶺南)의 설(說)에 대해 호남(湖南)에서는 진주성이 함락될 때 투신 자결했던 김천일(金千鎰)·최경회(崔慶會)·고종후(高從厚)를 삼장사라고 일컬음.
연려실기술 제16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김천일(金千鎰)ㆍ양산숙(梁山璹)
전라 우도의 의병장 김천일이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 천일은, 자는 사중(士重)이요,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나주(羅州)로 이사하여 두 대[二代]째이다.이항(李恒)에게 배웠다. 은일로 천거를 받아 대간이 되었는데, 그는 곧은 말을 과감히 하나 용모는 초라하여 외모가 옷을 이기지 못할 듯이 보였다. 이때 나주에 있다가 임금이 서쪽으로 피난하였다는 말을 듣고 울부짖으며 슬퍼하더니 조금 후에 분연히 말하기를, “울기만 하면 무엇하리오. 나라에 환난이 있어 임금이 파천하였는데, 나는 대대로 벼슬해 온 신하로서 새[鳥]처럼 도망하여 살기를 구할 수가 없다.” 하고, 드디어 글로서 고경명(高敬命)ㆍ박광옥(朴光玉)ㆍ최경회(崔慶會) 등 여러 사람에게 통하니, 의기(義氣)있는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달려와 모였다. 정예한 군사 수백 명을 얻어 군중(群衆)들과 함께 맹세하고 서쪽으로 떠났다. 《명신록》
○ 공은 양화(楊花) 나루에서 군사의 위세를 보이면서 평수길(平秀吉)의 죄상을 게시하여 성안의 적군에게 도전하였으나 적은 끝내 나오지 아니 하였다. 다음 해 이여송이 장차 서울에 있는 적을 치려 할 때 공은 선유봉(仙遊峰)에 진군하여 도독(都督 이여송)을 위하여 성원하였다. 적이 이미 물러간 뒤에 천일이 서울 성안에 들어가니 조정에서 적을 추격하라고 명하였다. 천일이 마침 병으로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며 말하기를, “내가 이제 죽을 곳을 얻었다.”고 하였는데 그때, 천일의 부하는 여러 군사(軍師)에게 이리저리 빼앗기고 남아 있는 자가 수백 명에 불과하였다. 천일이, “호남은 우리나라의 밑뿌리요, 진주는 호남의 병풍이요, 울타리이다.” 하고 드디어 진주에 들어갔다. 성(城)과 병기가 믿을만한 것이 없었으나 천일이 최경회ㆍ황진 등과 더불어 죽음으로서 지킬 것을 약속하였다. 얼마 안되어 적의 대군이 달려드니 임기응변으로 대비하였다. 처음에 수길이 여러 길의 왜적들이 모두 공 세운 것이 없음을 분하게 여겨, 모든 장수를 책망하고 반드시 한 이름난 성을 무찔러 벌충을 하고자 하였다. 그런 까닭에 이 싸움에서는 성이 오래도록 함락되지 아니하고 적병의 전사자도 정도를 넘었건만 오히려 퇴각하지 아니하였다. 마침 그때 오래 비가 내려 성의 흙이 풀어져 잘 무너졌다. 적이 군사를 더하여 급히 공격해 오니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이때 천일이 촉석루(矗石樓) 위에 있었는데 맏아들 상건(象乾)과 막하의 양산숙등이 옆에 있다가 울며 부르짖어 말하기를, “장차 어찌 하렵니까?” 하니 천일이 태연히 말하기를, “일을 일으키던 날, 나는 이미 나의 죽음을 결정하였다. 다만 너희들이 가엾구나.” 하고 드디어 일어나 북쪽 행재소를 향하여 절하고 나서 먼저 병기를 물속에 던지고 상건과 더불어 서로 안고 촉석루 아래의 깊은 물에 뛰어드니 장수들과 막료(幕僚) 중에 따라 죽은 자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적도 또한 힘이 다하여 감히 다시 호남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듣고 크게 슬퍼하여 찬성(贊成)을 증직하고, 치제(致祭)를 내리었다. 호남 사람들이 나주(羅州)의 서쪽 옥정봉(玉井峰) 아래에 사당을 세우니 조정에서 정렬(旌烈)이라고 사액(賜額)하였다. 《명신록(名臣錄)》 ○천계(天啓) 병인년에 비를 세우고 계곡(溪谷)의 비명을 지었다.
○ 이여송이 낙상지(駱尙志)ㆍ송대빈(宋大斌) 등을 시켜 호남으로부터 나아가 진주를 구원하게 하는 한편 영남에 머물고 있는 장수 유정(劉綎)ㆍ오유충(吳惟忠)을 시켜 힘을 합하여, 가서 구원하게 하였으나 군사의 세력이 대적할 수 없으므로 모두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