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림 |
안녕하세요 홍보국장님! 혹시 위에 시에 나오는 담양 최사군이라 칭한분이 혹시 충의공 최경회 장군님을 뜻함이 아닌가요? 1587년 사도사정-담양부사를 1590년 까지 역임 하시다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지금의 화순) 으로 낙향하신 기록이 잇기는 한데 년대가 비숫한지 확실치 않기에 드리는 질문입니다. |
2007-0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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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일 |
정확한 자료는 "아계년보" 에도 나오고 있지 않은데, 말씀하신 1587~1590년 담양부사의 기록이 있다면 당시에는 충의공 경회장군께서는 임진왜란전이므로 의병장은 아니셨겠죠? 시의 내용으로는 의병장이라는데, 그렇다면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後)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때에는 이산해는 평해로 유배 되었답니다. 아무튼 자료를 더 찾아봐야죠. |
2007-0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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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림 |
홍보국장님! 안녕하세요!!! 문충공 이산해 의 기성록의 시는 임진왜란 후 저자가 정치권에서 밀려난 후 유배생활 3년 동안 지은 것으로 대체로 제작순서로 배열되어 있는데, 전집 2권은 시이고, 후집 1권은 문장으로 되어 있다. 〈진폐차(陳弊箚)〉는 모두 3,000언에 달하는 장문으로 모병모속(募兵募粟)의 효율적 방법과 둔전(屯田)과 어염(漁鹽)의 이익수취 정책이 나타나 있어 당시의 군역문제와 사회경제 시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전(傳)은 충효인, 이덕지인(異德之人)을 다룬 것들로 저자의 인물관을 엿볼 수 있다. 고 하였습니다. 하여서 임진왜란이후 유배지에서 시와 문장을 많이 썼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때 우리 충의공 선조님께서 위에시의 주인공이 아닌가 하는 사견입니다. |
2007-0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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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림 |
아계유고 제4권 남곽록 담양최사군에게 부치다 라는 시에 주석 입니다. [주D-001]추성(秋城)은 …… 맞이하네 : 추성은 담양(潭陽)의 신라 때 고호(古號). 최 사군이 부임하는 담양이 그의 고향인 오성(烏城)과 가까우므로 죽마고우들이 오마(五馬), 즉 태수의 행차를 반가이 맞이한다는 것이다. 는기록으로 추정할때 충의공 선조님이 위시에 주인공일 가능성을 생각한것입니다. |
2007-0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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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림 |
문충공 이산해가 담양부사인 최우 선조님에게 주었다는 기록은 홍대 문학장이신 강현 종친의 이야기라고 하면 확인을 하여야 할것 이 있습니다. 우 선조님께서 의병장을 하신기록이 있는가도 확인을 하여야 할것 입니다. 또한 고향이 오성인가도 확인이 되어야 할것으로 사료됩니다. |
2007-0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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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 |
추성은 담양이고 오성은 화순입니다. 우자 파계도에는 창의하여 의병장됨이 의병장과 함께하니라고 해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휘 우에 부친 시이고 의병장됨은 충의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아계와 충의공은 나이는 충의공이 위고 대과 급제는 아계가 먼저여서 교우가 있었느지, 아님 문과와 무과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모르겠고 (휘 우 선조님은 아계의 밑-나이로) 아무튼 이 시를 가지고 4월 21일 교육시간에 다루어볼까 합니다. |
2007-0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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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만 |
영길, 승일 국장님 여러가지 답변주시어서 고맙습니다. 21일 오후에 문헌서원에서 뵙죠, 열심히 대제 준비하시는 두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
2007-0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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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림 |
아! 글쎄 근거를 제시 할려고 해도 난감합니다. 앞에 계신분들이 족보 뿐 아니라 금석문까지 만들어 놓으신것에 대하여 더이상 어찌 할수가 없음을 .... 안타깝다는 생각입니다. |
2007-0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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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순 |
대제 전 날 좋은 공부하겠습니다.. |
2007-0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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