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 문 -----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崔承喜)가 해주최씨 전한공파라고 하는데, 현재 홍천에서는 최승희 기념사업회까지 열리고 있고, 홍천군에서 년간 9,000만원의 지원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명칭은 사단법인 최승희기념사업회 입니다.
정말로 알려져 있는바와 같이 최승희씨가 해주최씨전한공파라면 우리 해주최씨문중에서도 당연히 이들에게 알리고 홍보하고 그들이 하는사업에 동참을 하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글을 올립니다.
그들이 주장하고 용역을 시켜 갖추어진 가계보에는 해주최씨전한공파 31세손으로 추정되어 있고, 1919년 해주최씨 세보에는 그 일가를 찾을 수가 없는데, 아래내용에서는 그들이 추적한 내용이 약간은 이해가 갑니다.
그 이유는, 저는, 해주최씨 전한공파의 대종손가로서, 1940년대에 저희 조부(崔永老)께서는 전한공파의 종중일을 거의 도맡아 하신 분 입니다. 당시의 저희는 서울 돈암동에 살다가 명륜동으로 이사를 하였는데, 현재 83세이신 저희 어머님께서는 시아버님인 조부님께서 당시에 종중의 여러분들께서 자주 집에 방문을 하시었고, 종사를 의논하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무용가 최승희의 일가가 상당히 빈번하게 저희집에 들락 거렸는데, 그들이 누군지, 최승희와는 어떤 관계인지는 잘 모르겠다."" 라고 기억을 하고 계십니다.
제가 홍천군에 문의한결과, ""당시에 집이 종로구였다면 최승희가 처음 결혼하여 신접살림을 차린곳이 서울 종로 적선동이며, 그의 부친, 형제등이 거주한 곳도 가회동이므로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저희 아버님께서 독자이면서, 조부님께서 6,25동란시 돌아가셨으므로 당시의 일을 기억하고 계실만한분은 모두 돌아가시고 참으로 답답한 마음뿐 입니다.
아래의 글은 비교적 최승희의 가계를 상세히 설명한 강원도민일보에 난 기사입니다. 함광복(전,강원도민일보 논설실장)
최승희는 해주 崔氏 전한공파 31세손
해주최씨 문중에서 최승희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홍천강 유역 노일, 용수, 어유포, 팔봉, 반곡, 개야리 등은 해주최씨들이 세거하고 있는 곳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최승희 직계가 해주최씨 세보(世譜)에 단 한줄 그 근거를 비추지 않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최승원(崔承元)은 작고한 장손 최재경(崔在慶)의 조부이고, 최승조(崔承祚)는 현재 제곡리에 살고 있는 최연섭씨(崔連燮)의 부친, 최승삼(崔承三)은 최경희(崔敬姬)씨의 부친이다. 최승희의 직계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엄연히 제곡리에 실존했던 인물까지 해주최씨 족보 어느 파보에도 이름을 비추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의문이 해주최씨 명행도(항렬표)에 꽁꽁 매듭지어 있었다. 해주최씨 대령군공파보(大寧君公派譜 전 正言公派譜)의 항렬은 ´28세 환(煥), 29세 재(載), 30세 현(鉉), 31세 승(承), 32세 식(植), 33세 광(光), 34세 수(壽)´ 이다. 그리고 해주최씨 전한공파보(典翰公派譜) 항렬은 ´28세 옥(玉), 29세 석(錫), 30세 부(溥), 31세 병(秉), 32세 섭(燮), 33세 노(老) 또는 재(在), 34세 호(鎬)´이다. ´월간太白´에서는 최승희 가계를 전한공파라고 밝히고 있다. 또 최승희의 5촌 조카딸 최경희, 장손 최재경의 모친 심정순이 최승희의 부친을 ´영부(暎溥)´라고 불렀다. 그리고 제곡리에 남아있는 최승희 가계의 유일한 친척 두 집의 항렬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손 집은 ´30세 은부(殷溥), 31세 승원(承元), 32세 창섭(昌燮), 33세 재경(在慶), 34세 호영(鎬英)´이다. 작은집은 ´30세 태부(台溥), 31세 승조(承祚), 32세 연섭(崔連燮), 33세 재홍(在洪)´이다. 그러나 이들 두 집이 가지고 있는 가승(家乘)에는 31세손 승원과 승조가 각기 병원(秉元)과 병조(秉祚)로 기록돼 있다.
전한공파보의 항렬대로다. 따라서 최승희 직계존속 계보를 보명(譜名)으로 기록했다면 ´30세 영부(暎溥 최준현), 31세 병일(秉一 최승일) 병오(秉五 최승오) 병희(秉喜 최승희)가 되었을 것이다.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지만, 제곡리 전한공파 해주최씨들은 30세, 31세손의이 호적명을 족보대로 쓰지 않았다. 공교롭게 호적명의 항렬이 대령군공파 항렬과 일치하고 있다.
제곡리를 제외한 홍천강 유역에 세거하고 있는 해주최씨들은 대부분 대령군공파이며 종손가계인 최승원씨(崔承元춘천시 효자 1동)씨는 구보(舊譜) ´기미보정언공파보(己未譜正言公派譜)´를 간직하고 있다. 해주최씨 문중에서 구보까지 뒤적이며 30세손에서 최준현, 31세손에서 최승희 등을 찾으려다 실패한 것은 최승희가계가 이같이 보명과 호적명을 혼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제곡리 최연섭씨(崔連燮 · 52)는 나이는 어리지만 촌수로 최재경의 당숙이 된다. 최승희와 6촌간인 최승조(崔承祚)의 아들이다. 연섭씨 가계의 가승(家乘)에는 28세손 근(瑾 顯圭)에 대해 ´효행탁이 증조봉대부동몽교관(孝行卓異 贈朝奉大夫童蒙敎官)´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생전에 효행이 출중했던 그가 죽은 후에 종4품의 조봉대부로 품계를 올리면서 동몽교관이라는 참봉급 종9품직의 관직을 추증 받았다는 뜻이다. 제곡리 해주최씨 집안의 최참봉이 바로 그인 것이다. 동몽교관은 교육직이기 때문에 명예롭게 여겼던 관직이다. 제곡리 98번지 개울가엔 그가 글을 가르치던 곳으로 추정되는 서당 터가 남아있다. 폐가 한 채가 을씨년스럽지만 그 자리는 수려한 경관에 오래된 작은 연못도 갖추고 있다.
근(瑾)은 29세손 홍석(泓錫)을 낳고, 홍석은 30세손으로 은부(殷溥), 태부(台溥) 두 형제를 두었다.
은부(殷溥)는 병원(秉元), 창섭(昌燮) 재경(在慶)으로 대를 이어 제곡리 전한공파의 큰집으로 불리고 있고, 태부(台溥는 병조(秉祚), 연섭(連燮), 재홍(在洪)으로 작은 집의 대를 이었다. 가승은 직계존속 계보만을 수록하는 법이다. 따라서그 가승엔 최승희 직계에 대한 언급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최준현의 보명이 영부인 것으로 미루어 그는 29세손 홍석 형제의 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29세손 홍석 형제 중 맏이가 30세손 최준현(영부) 형제를 두었으며 형제 중 맏이가 최승삼의 부친, 막내가 최승희의 부친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최경희씨 증언대로 최준현(영부)이 장조카이자 경희씨의 부친인 최승삼을 따라 서울로 솔가했다면, 최승희 가계가 작은 집이라야 맞는다. 따라서 최승희에게는 4촌간인 최승삼이 가장 가까운 일가붙이다. 가승으로 추적하면 최승희는 제곡리 최참봉 근(瑾)의 증손녀이고, 부친 최준현(崔俊鉉), 일명 최영부(崔暎溥)는 해주최씨 전한공파 30세손, 최승일(崔承一), 최승오(崔承五), 최영희, 최승희(崔承喜)는 31세손이란 사실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해주최씨 전한공파보에서 이 두 집이 감쪽같이 사라진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해주최씨 세보는 1774년 갑자보(甲子譜)를 간행했다. 그 보판이 홍천으로 옮겨져 지금까지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1919년 기미보(己未譜)가 간행됐으나 남북 분단 후 세계(世系)도 혼란돼 새로운 족보를 만들 필요가 생겼다 1961년 9월 신축보(辛丑譜)가 간행됐다. 그러나 제곡리 해주최씨 집안, 즉 최참봉의 가계는 이 족보 전한공파보에 올라있지 않고 있다. 다시 1990년 10월 경오보(庚午譜)가 간행됐다. 그러나 이 족보에는 신축보에 올라있지 않던 최승희의 6촌간 최승원, 최승조가 각각 병원(秉元), 병조(秉祚)란 이름으로 올라있다. 최승희의 조부 아래 직계가계만 족보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신축보를 내던 당시 상황을 최재두씨가 기억해 냈다.
해주최씨 집안은 6.25 전쟁 때 대부분 집이 불타면서 족보를 소실했거나 피란길에 분실해 대부분 족보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1961년 신축보를 낼 당시 연좌제에 걸린 제곡리 최승희 가계에는 기관원의 출입이 끊이지 않았다. 마침 ´4.19´에 이어 ´5.16´이 일어나던 때다. 최승희 가계는 일거수일투족을 주목 받게 됐다. 자연히 제곡리 해주최씨들은 문중과도 교류가 잦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느 날 그 집들 족보가 어떻게 됐나 궁금해 누군가에게 물어봤더니 자신들은 해주 최씨지만 고죽공파(孤竹公派)라고 합디다. 집안이 다르다고 하는 데야 괜히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듭디다.""
최씨는 당시 최승희 가계가 극도로 정신적 압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족보를 복원한다는 것 자체가 조상까지 연좌제의 폐해를 입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1990년 경오보를 낼 때는 상황이 달랐다. 최승원, 최승조는 이미 작고한 뒤다. 그 후손들은 가승을 토대로 족보를 복구했다. 지금 제곡리에 살고 있는 은부, 태부 형제의 후손들만 경오보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그러나 최승희의 4촌 최승삼 가계는 그가 작고한 후 족보를 복구할 후손이 없었다. 그는 아들 원식(0 植 : ,대령군공파 항렬을 썼음)과 딸 경희(敬姬)를 두었으나, 아들은 일찍 작고했다. 그렇다고 출가외인인 딸 최경희씨 친정 족보를 내는데 나서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최준현(영부)은 오래 전 작고했고 역시 북에서 생사를 모르는 최승희 형제들이 족보 복구에 참여할 리는 없었다. 최연섭씨는 당시 최승희나 최경희씨 친정이 친척이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린나이에 그들의 족보를 복구한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고 말했다. ´홍천의 맥(脈)´은 그때의 배경을 「6.25 후 그 친척들이 모두 피신 후손은 찾아 볼 수 없다」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이글을 읽어보시고, 가능성이나, 혹은 반대되는 의견이 있다면 답글 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사)최승희기념사업회에서는 저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 동안 조사된 내용에 대하여 그 자료를 모두 건네주겠다고 하시어 전한공파 회장님이시자 대종회 봉섭고문님께 연결을 해 드렸습니다.
자신의 파(派)의 일이 아니라고 무관심하지 마시고, 만일 진정한 해주최씨전한공파의 일가라면, 당연히 해주최씨대동보에 그의 일가가 등재되어야 마땅하며, 최승희와 그의 오빠인 최승일(저와 이름이 같습니다,)은 최근 발간 예정인 ""수양열전""에도 올려져야 할 인물인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지난 1997년 최승희가 해주최씨라는 말을 듣고, 수소문 끝에 ""최승희의 일가가 대구에 살고 있다."" 라는 말을 듣고 대구에 갔었습니다. 당시, 교편을 잡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름은 광섭 이라고 하였습니다. 전화번호를 찾아 연락을 취하였는데, 이분께서는 한사코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으며,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아드님도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당시에 이분께서는 형제가 월북을 하여 ""요시찰인""으로 분류되어 교직에 종사하는 교직원의 신분이 노출되면 교직에서 물러나야함에 두려웠던 것일 겁니다. 이후에 저는 더 이상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고, 현재에 와서 이전 연락처로 연락을 하니 전혀 다른사람이 전화를 받고 있습니다.
본 내용을 증명하는 자료 입니다. 1946년 7 월 20 일 최승희의 8 톤짜리 월북 발동선엔 그의 딸 안승자 (안성희)와 아들 안병건은 동승하지 않았다. 일부 기록에는 그해 8 월 22 일 최승희의 둘째 오빠 최승오가 조카 안승자 , 안병건을 데리고 월북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정병호의 ‘춤추는 최승희’에서는 최승오의 월북 시기를 6.25 전쟁 때로 기록하고 있다 . ------------------------------------------------------------------------------ 최승오는 경상도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윤덕봉과 혼인 딸 정순, 정희 , 정옥과 끝으로 아들 광섭을 두고 있었다. 최승오는 여동생의 아들과 딸을 데리고 월북하면서 부인과 아들딸은 남쪽에 남겨 두었다. 그 책속엔 이들 남기고 간 가족 중 부인과 아들이 ‘강원도에 살고 있다’ 고 적혀 있다 . 강원도에 가족의 연고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광섭의 한자 이름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름의 뒤 글자를 ‘燮 ’으로 썼다면 해주최씨 전한공파 32 세손인 그가 파보 (派譜 ) 항렬대로 이름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지금도 강원도 어디엔가 살고 있다면 , 한때 살다가 이주해 다른 지방에 살고 있더라도 제곡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최승희 가계의 뿌리를 복원해 주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 어떻게 생각 하시나요?
------------------ 안녕하세요? 승일 국장님! 올려주신 글을 한자도 빠짐 없이 잘읽었습니다. 일단 그분의 사상보다도 남한땅에 사시고 계실그분의 친인척 들의 안부가 우선 급선무 일것 입니다.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씨에 대한 본관은 이미 오래전 부터 해주 라는 것은 알고는 있으나 어느파인지는 모르고 있던터에 연구할수 있는 자료가 생긴것 같습니다.
우선 저의 생각은 그분이 전한공파이던, 혹은 대령군파이던지 간에 우리성과 상관없는 분들이 사단법인 최승희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는데에 우리대종회 차원에서 협조할 부분이 있다면 해야 하는것이 마땅하다 사료 됩니다. 해서 그분에 대한 역사관이 재조명되어서 나름 대로 복권이 될수 있다면 우리 문중의 일로써 얼마나 좋은일이겠습니까?
열심히 애쓰시는 우리 승일 홍보국장님의 노고에 종인의 한사람으로써 깊은 감명과 감사드린다는 말씀 전하여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대종회 차원에서 지원 내지는 협조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며 적극 추천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