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의 원문이미지는 본 게시판에 올리지 못하여 ""사진자료실""에 올렸습니다. 본 기사의 자료의 제공을 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언론매체와 접촉하여 우리 해주최씨를 널리 알리고, 역사바로잡기를 위한 홍보에 주력할 것입니다. 이 같은 내용의 기사가 자주 보도되어 우리 선조를 능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응분의 조치를 위하기 위한 자료로서 활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국경제21 가정의 달 특집 ‘한국의 명문가를 찾아서’ 빠르고 편리한 것만을 추구하는 디지털시대에도 자신의 뿌리알기는 버려서는 안될 가치다. 옛시절의 할아버지가 벼슬을 하거나 큰 업적을 남긴 선현들의 내력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것은 그 분들처럼 크게 되라는 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핏줄의식을 심어주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자신의 뿌리를 아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실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경제21에서는 뿌리찾기의 일환으로 국내의 몇몇 명문가를 찾아가 봤다. 이들을 통해 ‘나’의 뿌리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김재용 기자>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해주 최씨” 고려조 최고의 권문세가 해주는 황해도 남해안 중앙에 위치한 지역이다. 고구려때 내미홀이라고 하였고, 신라 경덕왕이 폭지라는 지명으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때 이 곳이 남쪽의 대해와 마주보고 있다고 하여 해주로 개명하였다. 고려 성종때 와서는 대령, 서해 등으로 불리웠다. 현종 때 해주안서도호부를 두었다가 예종때 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도호부는 고려*조선 때 지방 행정기관을 말한다. 이 도호부사의 직위는 정3품의 서열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해주는 매우 번성했던 것이다. 조선 때는 북쪽의 방어를 위한 진이 해주에 설치되었고 광해군 때는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895년(고종 32년)부(府)가 되어 16군(郡)을 다스렸다. 1940년 해주 항이 개항장으로 지정되었다. 해방 후 시로 승격되었다. 해주 최씨의 시조 최온(崔溫)은 고려때 해동공자로 불린 최충의 아버지이다. 해주 대령군에 있는 수양산밑에서 오랫동안 살았다고 전해진다. 시조 최온은 대령군의 호족으로 많은 재산을 이뤄 주변에 좋은 일을 많이 했다. 그래자 그를 숭상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인근고을에까지 그의 명성이 전해졌다. 원래 최 온이 선정을 베풀고 대대로 살아온 곳이 해주여서 후손들이 본관을 해주로 하여 대를 계승하고 있다. 이 곳의 별칭이 고죽군이어서 해주 최씨를 고죽 최씨라고도 하고, 수양 최씨라고도 한다. 해주 최씨는 신라 이래로 많은 재상, 학자, 문인을 배출한 전통있는 명벌에 속한다. 무엇보다 해주 최씨 가문의 명성을 드높인 인물은 고려시대때 재상을 지낸 최충이다. 최충은 동방의 공자라하여 해동공자라고 추앙받은 인물이다. 최충은 목종8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현종, 덕종, 정종, 문종까지 5조에 걸쳐 문하시중 등 최고의 관작을 두루 걸치며 추충, 찬도 등과 같은 11개의 공신 호칭을 받았다..관직에서 은퇴한 후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학교인 구재학당(九齎學堂)을 세워 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유학을 크게 진흥시켰다. 2세인 최충의 뒤를 이어 3세인 유선, 유길. 4세인 사제, 사량, 사추 등이 대를 이어 장원급제를 했고 5세조 약, 관, 주, 진 . 6세조 윤의, 홍윤 7세조인 민, 8세조 자, 9세 유엄 등이 재상을 지냈다. 9인(충, 유선, 사추, 유엄, 단, 황,빈, 산휘, 응구)이 고려조 공신 반열에 올랐다. 해주 최씨 가문은 이처럼 수많은 인물들이 최고의 명신과 공신반열에 올라 나라의 중요한 관직을 두루 걸쳐 귀족 중의 귀족으로 불린 고려조 제일의 권문세가였다.
깊이있는 학문과 문학이야기의 주인공 고려시대때 권세를 누린 여타 최씨는 보통 조선시대 들어와서 기세가 약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해주 최씨는 이와는 달리 조선시대 들어서도 명문의 반열을 유지했다. 해주 최씨가 명문의 뒤를 잇도록 해준 이로는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최만리가 첫째로 꼽힌다. 최충의 12대 후손으로 세종이 왕위에 등극한 1419년 진사시 을과에 합격해 벼슬길에 올랐다. 본시 학문이 높았던 최만리는 집현전에 들어가 박사를 거쳐 부제학이 되었다. 집현전의 터줏대감으로 한글창제에 깊이 관여하며 세종이 깊이 총애한 인재였다. 1439년에는 잠시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통정대부에까지 올라가고 조선조 2대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학문과 정치, 절의에서도 유명한 인물들이 많다. 조선조 8대 문장가이자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는 고죽 최경창이 있으며 조선 영조 묘정에 배향된 영의정 최규서가 있다. 조선이 개국하자 절의를 지키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최안택이 있고 그 후손인 최경회는 임진왜란때 상복을 입은 채 진주의 고립된 성에서 용맹이 싸우다 자결했다. 왜장과 함께 강물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왜에 항거한 주논개가 최경회의 재취부인이다. 조선시대 중 가장 애달픈 사랑의 주인공으로 꼽히는 기생 홍랑의 시와 사랑이야기는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이 홍랑의 연인이 고죽 최경창이다. 홍랑은 조선 선조 시절 함경남도 홍원의 관기였다. 34세의 나이에 최경창이 과거에 합격해 부임지인 함경남도 경성에 가던 중 들른 홍원 술자리에서 만났다. 최경창이 변방의 부임지를 자주 왕래하는 사이에도 홍랑은 먼 거리를 마다치 않고 최경창을 찾아다니며 극진히 내조하고 애정을 나누었다. 이 무렵 나눈 시조들은 지금도 보는 이들의 마음을 저리게 한다. 최경창이 파당싸움의 희생물로 객지에서 의문의 죽음당하자 3년간 시묘살이하고 수절하며 살았다. 그도 얼마 못 가 6년 후 사랑하는 이를 따라 저 세상으로 갔다. 남녀간의 만남을 인스턴트음식 먹는 식으로 여기는 요즘 세태에 해주 최씨가에서 내려오는 홍랑과 최경창의 애모의 정은 오늘날까지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문중에서는 홍랑의 지고지순한 마음을 받아들여 경기 파주 최씨 선산에 있는 최경창 부부 합장 묘 밑에 기생 홍랑의 묘를 둬 그 뜻을 기리고 있다.
해동공자로 추앙받는 최충 선생과 구재학당 해주 최씨하면 무엇보다 최충에 대해서 더 얘기를 해 봐야 한다. 동쪽의 공자로 추앙받는 최충은 해주 최씨의 2세손으로 984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고려 목종조에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현종, 덕종, 정종, 문종까지 5조에 걸쳐 벼슬을 했다. 그는 문하시중 등 최고의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고려 초의 국가기틀을 정비했다. 1047년(문종 1년)에 문하시중에 있으면서 법률관에게 율령을 가르쳐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했다. 1050년에는 서북면 병마사로 나가 농번기때 공역을 금지시키고 아울러 국가재정이 허투루 새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상소하여 제도적으로 이를 보완해 시행시키기도 했다. 아울러 이 무렵 동여진(東女眞)의 동태를 파악하고 국방을 강화하는 등의 업적을 쌓아 1053년에는 임금이 나라에 공이 많은 원로에게 주는 궤장(?杖)을 하사 받았다. 나이가 많이 들어 벼슬을 그만 둔 뒤에도 국정에 자문했다. 무엇보다 그는 사재를 들어 구재학당이라는 사학을 세웠는데 이는 우리나라 사립대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구재학당에는 현재의 대학처럼 학과(9개학과)로 나뉘어 교육을 실시했다. 구경(九經), 삼사 등 유교경전과 정사를 정교과목으로 했고 지금의 교양과목과 마찬가지로 문학과 예교질서도 가르쳐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특히 귀법사에서의 하기 강습과 조교제도 및 각촉부시 등이 있었는데 이는 그만의 독창적 교육방법으로 특기할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려시대때는 숭불정책으로 국학이 많이 침체돼있었다. 게다가 오랜세월 몽고 등 외세침입 등으로 인해서 교육을 제대로 받을 만한 곳이 극히 부족했다. 또한 현실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시가와 문장 위주로 교육하는 국학에 식상해하던 젊은이들이 새로운 배움을 찾아 구재학당으로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오늘날 취업과 학문탐구를 위해 다양한 학과를 찾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구재학당은 이렇게 해서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구재학당이 번성하자 당대 11명의 이름난 선비들이 이를 모방해 사학을 개설했는데 구재학당과 아울러 이를 세칭 12공도라 했다. 이 12공도는 국학을 압도했으며 고려 말까지 중요교육기관으로 유지됐다. 12공도에 자극을 받은 많은 사학이 설립돼 고려유학발전의 밑거름이 됐고 조선시대 서원성립에도 영향을 미쳤다. 최충 연구 논총을 집필한 김충렬(고려대학교 교수)박사는 “최충 선생은 이른바 삼불후(언제까지 썩지 않는 세 가지 : ? * 功 * 言)를 모두 갖춘 희대의 인간 대성자”라 하여 그의 업적을 평가하고 있다.
오산 문헌서원 우리나라의 서원의 시작은 조선 중종 38년(1543)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의 학자 안향을 추모하기 위해 백운동 서원을 세운데서 비롯됐다. 명종 7년(1550년)에 당시 황해도 관찰사 주세붕이 황해도 해주에 구재학당을 모방한 서원을 세워 최충 선생을 모셨는데 이것이 문헌서원이다. 이렇게 문헌서원이 북쪽에 있다보니 남한의 종인들이 최충 선생을 모실 곳이 없었다. 그래서 1991년에 여러가지 학술대회등을 거친 후 오산에 세우게 됐다. 그런데 왜 오산에 세웠을까?. 최충 선생과 관련된 지역은 북쪽에 있어 남한에는 마땅히 이렇다할 연고지가 없다. 그나마 오산 인근에 해주 최씨의 유사들과 관련된 사적비와 묘소 등이 있어 이곳에 세우게 돼었다고 한다. 해주 최씨는 일년에 한 번 문헌서원에서 제사를 지내 등 오산 문헌서원은 남한의 해주 최씨문중의 단합을 돈독히 하는 중요한 구심점이 되고 있다.
최만리는 한글창제에 반대했나? 역사를 바로잡아야할 문제 최만리는 해주 최씨가 낳은 또 한 명의 선현이다. 황희 정승과 함께 조선조 2대 청백리로 우리역사에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그럼에도 잘못된 역사관에 의해 사대주의의 상징으로 매도 당하기도 한다. 최근까지 정치권에서는 상대당의 행태를 비판하기 위해 최만리를 들먹이기도 했다. 그러나 과연 최만리는 한글 창제를 반대한 사대주의의 대표적 인물인가?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아는 것은 비단 해주 최씨 문중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최만리를 한글 창제 반대론자로 보는 것은 그가 세종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비롯됐다. 이 상소문은 집현전 학자 6명과 함께 최만리가 대표로 올린 것이다. 그러나 이 상소문은 언문창제 반대 상소가 아니라 언문 운회언해(韻會諺解) 계획에 대한 우려, 중국과의 민감한 외교에 대한 고려, 세종대왕의 건강에 대한 염려에서 올린 것으로 현재 다시 해석되고 있다. 세종이 스스로 이름 붙인 언문청을 설치하고 음운과 문자 연구를 거듭해 1443년(세종25년)에 훈민정음이 창제됐다. 그 후 세종은 실용화를 실험하고 운회언해를 위해 의사청을 설치했다.. 여기에서 집현전 학자들과 동궁을 비롯한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 9인이 모여 심도있게 논의하게 된다. 이때가 1444년(세종26년) 2월 16일로 이 날 4일 후에 갑자상소가 올려졌다. 그러므로 갑자상소는 의사청에서 언회운해를 계획한 것과 관련이 있다. 최만리도 집현전에서 27년간 봉직한 집현전 귀신이다. 한글 창제 당시 최고책임자인 부제학으로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한글 창제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그런 그가 한글창제를 반대하려면 한글이 창제되기 전에 했을 것인데 한글이 완성된 후 1년이 지난 뒤에나 갑자상소를 올렸으니 이 상소는 한글창제 반대상소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면 이 상소의 핵심은 무엇인가? 우선 운회언해라는 것은 한자음에 언문을 사용해 중국식으로 토를 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최만리는 어려운 중국식으로 토를 다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우리만의 언문을 살리자는 것이었다. 이를 포함해서 중국과의 민감한 외교문제와 한글창제로 건강이 급속히 악화된 세종의 건강을 지극히 염려한 내용이 상소를 올린 진짜 이유가 된다. 그럼에도 최만리 상소문이 왜곡돼 전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일제 통치에서 해방 된 후 김윤경이라는 국어학자가 한글 보급을 강조하다보니 갑자상소문을 잘못해석하게 돼었고 더불어 민족적으로도 세종의 한글창제업적을 강조하다보니 최만리의 진실이 널리 알려지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역사학자 이병도, 국어학자 이숭녕과 남광우 등이 김윤경의 잘못된 해석을 비판하면서 갑자상소문의 내용을 제대로 밝히게 되었다. 최만리는 세종이 총애한 충신이자 청백리였다. 27년간 집현전에 봉직하면서 한글창제에도 관여한 뛰어난 학자였다. 이제 최만리에 대한 왜곡된 시각에서 벗어나서 해주 최씨 문중의 자랑이자 민족의 자랑인 한 선현을 바로 보아야 한다.
해주 최씨 대종회장 최기선 인터뷰 현재 전국 각지에 100여개로 산재돼 있는 해주 최씨 종친회의 구심점 역할을 할 최기선 대종회장이 지난 2005년에 취임했다. 최기선 회장은 초대 민선 인천시장을 시작으로 문민정부 내내 인천시장을 맡아 인천의 발전을 이끌어 왔다. 대종회는 그의 숙련된 행정과 통합 능력을 높이사 그를 추대했다. 해주 최씨 대종회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그를 만나 앞으로의 대종회 운영방안을 알아 봤다.
Q.대종회의 목적과 하는 일은 무엇인가? A.지금 세대들은 디지털 시대의 편리함만을 추구할뿐 뿌리에 대해 관심이 없다. 이에 대종회는 조상들의 얼을 되살리고 부각시켜서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Q.회장님은 대종회를 어떻게 운영하고자 하는가? A.무엇보다 참여하는 대종회를 만드는 것이다. 어느 가문이든지 자기의 주장만 내세워 분쟁이 발생하고는 한다. 이는 어느 한 사람이 독단적으로 이끌어가려고 해서 그런다. 앞으로 우리 대종회는 어느 한 사람이 이끌어가는 게 아니라 각 분야를 맡고 있는 운영위원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민주적인 분위기로 쇄신시킬 것이다. 또 과거에는 재력가 몇몇만이 돈을 내 대종회를 운영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나머지는 소속감이 적어져 오히려 대종회의 침체를 불러 올 수 있다. 내가 취임한 이후 해주 최씨 모든 분들이 1만원이라도 내도록 회보 등에 지로를 끼어 넣어 참여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 2년째 이 방식을 이어오고 있는데 반응이 좋다. 특히 지방 분들이 자신도 대종회일에 참여할 수 있게 돼서 기분이 뿌듯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앞으로도 이 방안을 더욱 활성화시키려 한다.
Q.앞으로 대종회를 활성화시키위한 방안은 무엇인가? A.옛날 방식만 고집하면 안된다 .해주 최씨는 비교적 개방적이다. 호적에 해주 최씨로만 돼있으면 복잡한 절차없이 참여가 가능하다. 무엇보다 대종회 발전을 위해선 젊은 층과 부녀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기존에 부녀국이라는 조직이 있음에도 그 동안엔 유명무실했는데 앞으로는 부녀회를 강화시키고자 한다.
Q.대종회가 추진하고 있는 사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A.우선 임의단체인 대종회를 항구적인 단체로 만들기 위해 법인체 추진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대종회하면 경직되고 어렵게 생각해 젊은 층들이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그래서 홈페이지도 세련되게 만들었다. 문헌서원대제 이후 노래자랑 등의 2부 행사를 통해 다가서기 쉬운 대종회를 만들고 있다. 또한 여러 지역에서 흩어져 있는 회원들을 찾아가 그들의 소속감을 고취시키는 일도 중요하다. 그래서 청년 수련회와 임원연수를 통해 지방을 순회하고 있다. 한때 내가 내려간다니까 어느 지역에서는 몇 백명의 문중분들이 몰려 오셨는데 그 모습을 보고 정말 감동받았다. 이렇게 중앙에서 지방에 내려가는 일 자체가 해주 최씨의 유대와 결속을 강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Q.마지막으로 종인들과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A.천여년의 역사를 가진 명문가의 회장을 맡으니 그 책임감이 막중하다. 해주 최씨가 자랑스럽고 본받을 만한 가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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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수
승일국장님 이러한 기사를 올려주어 소중하게 봅니다.더욱 합심하여 종친으로서 긍지를 느기며 해동공자 선조님의 정신을 계승할 마음을 다시한번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