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최문에 대한 기록을 보시면 종파의 란에 현감공 고 파 라고 하셨는데 고 字 가 아니옵고 단단할 각 字 입니다. 하오니 정정 하여 주시길 바라오며, 아래 인물정보 사이트에 내용중에 보시면, ------------------------------------------------------------------------ 최춘명(崔椿命)
[요약정보]
시대 고려 후기 생졸년 ? - 1250 (고종 37) 본관 해주(海州) 성 최(崔) 성별 남 활동분야 문신/관료 / 충신 / 충신
[상세내용]
최춘명(崔椿命)에 대하여
?∼1250(고종 37). 고려의 충신. 본관은 해주(海州). 충 의 후손이며, 위위경(衛尉卿) 염(恬)의 아들이다. ------------------------------------------------------------------------ 에서 위위경 염의 아들이다 하였는데, 이는 잘못 된것입니다. (諱) 椿命 선조님은 (諱)염(恬)선조님의 아버님이십니다. 참고자료는 한국역사정보 종합 시스템 의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522의 내용 을 참고 하시길 바랍니다. ------------------------------------------------------------------------ 박전지 처 최씨묘지명(朴全之妻崔氏墓誌銘)
시대 고려 연대 1316년(충숙왕3년)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미상 출토지 미상 소재지 (한국)-현존하지 않음 서체 미상 찬자/서자/각자 박전지(朴全之) / 미상 / 미상
묘지명은 『죽산박씨파보(竹山朴氏派譜)』(1938, 宣川)에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1788년(정조 12) 개성부(開城府) 승제문(承制門) 밖 20리 지점인 고산동(高山洞) 삼랑산(三朗山) 남쪽 기슭에서 남편인 박전지(朴全之)의 묘지명과 함께 발견되었다고 한다. 묘지명은 남편인 박전지(朴全之)가 1316년(충숙왕 3)에 작성하였다. 묘지명의 주인공인 최씨(崔氏 : ?~1316)는 해주(海州) 사람이다. 아버지는 염(恬), 조부는 춘명(椿命), 증조는 혁(奕)이다. 부인은 문헌공(文憲公) 충 의 10세손이다. 어머니는 당성군부인 홍씨(唐城郡夫人 洪氏)로 홍진(洪縉)의 딸이며, 평장사(平章事) 홍관(洪瓘)의 7세손이다. 대령군부인(大寧郡夫人)이며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으로 추증되었다. 박전지에게 시집와서 2녀 1남을 낳았다. 장녀는 정탁(鄭倬)에게 시집갔는데, 가신(可臣)의 아들이다. 둘째 딸은 이직(李稷)에게 시집갔는데, 행검(行儉)의 아들이다. 아들은 원(瑗)이다.
G002+AKS-KHF_13CD5CCD98BA85D1250X0 시대 고려 후기 생졸년 ? - 1250 (고종 37) 본관 해주(海州) 성 최(崔) 성별 남 활동분야 문신/관료 / 충신 / 충신
[상세내용]
최춘명(崔椿命)에 대하여
?∼1250(고종 37). 고려의 충신. 본관은 해주(海州). 충 의 후손이며, 위위경(衛尉卿) 염(恬)의 아버지이다.
1231년(고종 18) 자주부사(慈州副使)로서 관민을 이끌고 몽고군에 포위된 성을 고수하여 항복하지 않았다.
그뒤 화의를 맺게 되자 조정에서는 몽고원수 살리타(撤禮塔)의 힐책을 받아 내시낭중(內侍郞中) 송국첨(宋國瞻)을 보내어 항복을 설유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어 삼군장수가 항복하게 되자 살리타는 회안공(淮安公) 정 에게 자주(慈州)의 항복을 독촉하였다. 이에 정은 후군진주(後軍陳主) 대집성(大集成)과 몽고관리를 보내어 조정과 삼군이 항복한 사실을 알리고 속히 항복하라 하였으나 조지(朝旨)가 이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몽고관리가 대집성으로 하여금 성안에 들어가 권유하게 하였으나 여러 차례 거부하였다. 이에 처형하라는 몽고관리들의 압력으로 서경에 투옥되자 왕이 재추(宰樞)에게 물으니 모두 감형하기를 청하였으나 대집성이 최우(崔瑀)를 움직여 처형하게 하였다.
재추들이 더 이상 고집하지 못하였으나 유승단(兪升旦)이 홀로 반대하였다. 최우가 거듭 내시 이백전(李白全)을 보내어 처형하려고 하였을 때도 사색(辭色)은 태연하였다.
이를 본 몽고관리는 비록 그가 몽고에는 명을 거역하였지만 고려에는 충신이니 살려주라는 청을 하여 석방되었다. 뒤에 논공행상에서 1등공신에 올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발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