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군 지용기 池湧奇(1330.1.4~1392)고려의 명장. 호는 의재 본관은 충주이다. 공은 1330년 1월 4일에 태어나서 아버지는 찬성사와 평장사 등의 벼슬을 지내시고 병의익대좌명공신(秉義翊戴佐命功臣)에 책록되신 지복룡이며 어머니는 영가군부인 송씨이다. 충의군께서는 태어난 지 삼칠일(3주간)만에 일어나 않으니 등에 큰 검은점이 박혀있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한자의 「奇」자 같았으므로 아버지께서는 이름은 용기(湧奇)라고 지었다. 그리고 태어난지 백일만에 벌써 걸음마를 시작하니 보는 사람마다 고을에 장사가 났다고 놀라워 하니 그로부터 인근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점점 자라서 세살이 되셨는데 그때 벌써 아버지로부터 천자문(千字文)과 명심보감(明心寶鑑)을 배워 읽었고 여섯 살때에는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읽었으며 아홉 살때에는 이미 논어(論語), 맹자(孟子)를 열두살 때 시전(詩傳)과 서전(書傳)을 열다섯때에는 중용(中庸)과 경서(經書)를 통달하게 되는 고을사람들과 일가친척들이 모두 놀라고 천재라고 소문이 크게 났다. 충의군께서는 이와 같이 글공부에만 천재일뿐 아니라 열여섯때부터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말타기, 활쏘기, 창던기지 등 무술(武術)을 익히시더니 이 또한 남달리 출중하여 가히 문무(文武)를 겸비한 나라의 큰 재목으로 각광을 받게되시었다. 스무살쯤 되셨을때인가 어느날 말을 타고 꿩사냥을 나갔는데 갑자기 날쌘 표범이 덤벼들었는데 크기가 중송아지만 하였다. 충의군께서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활 한방으로 정수리를 맞추니 표범은 어흥소리를 크게 지르며 비틀거렸다. 다시 창을 들어 가슴을 찌르니 드디어 죽어 자빠졌다. 이와 같이 충의군의 활솜씨와 칼솜씨는 이미 신의 경지에까지 이르셨다. 여러 문헌에 나타난 충의군 지용기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어떤 곳에서는 「공께서는 태어날때부터 남다른 점이 있었으니 한눈에 눈동자가 둘이요 이마에는 자주빛 사마귀가 하나 있었는데 마치 커다란 콩이 박힌 것 같았으며 등어리에는 奇자로 된 큰 검은점이 있어던고로 아버지 평장사공이 이름을 湧奇라 하였다. 삼각으로 늘어뜨린 긴수염은 가운데 부분은 배꼽까지 이르고 좌우로 양옆의 수염도 젖가슴까지 닿았다.」고 하였다. 또 다른 기록에는「그 모습이 장대하여 키가 9척(약 2m 70㎝)이요 허리가 열아름이요 네모진 얼굴에 크고 늘어진 귀와 표범같은 두상에 제비같은 이마를 가졌다」하였고 또 공의 무술과 재주를 기록하였는데 「힘은능히 천근을 들었고 활솜씨는 열발쏘면 열발이 틀리없이 명중이며 한번 건더뛰면 3간이요 한번 뛰어오르면 8계(여덟계단)나 되었으며 달리는 말궁둥이를 걷어 찰수 있고 손으로 소발굽을 움켜잡으면 꼼짝하지 못하였으며 평생동안 한번도 앓은 적이 없어 약 한첩 잡수신적이 없었고 추위나 더위나 굷주림이나 배부름에 구애받음이 없었다. 걸음이 나느것 같아 하루에 능히 3백리를 갈수 있었고 20일을 주무시지 않고도 피곤하지 않았으며 말소리가 큰소리로 꾸짖으면 좌우가 모두 두려워 복종하며 감히 바로 쳐다보지를 못하였고 참을 일에는 수염이 다 자라고 해를 넘겨서도 견디어 내니 이런 분이야 천신(天神)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충의군 지용기의 모습과 기상은 참으로 천하에 둘도 없는 용장이라 할수 있었다. 고려 말엽 어수선한 시절에 서북쪽에서는 몽고의 압력이 드세어지고 남해에서는 왜구의 침입이 잦으니 충의군께서는 젋은 혈기에 자원출전하려 하였으나 부모님이 만류하여 뜻이 이룰 수가 없었다. 울분과 아타까움에 말을 타고 산과 들을 내달리며 사냥으로 마음을 달래고 학문에도 더욱 정진하시더니 우왕 원년(1375년)에 조정에서 시행하는 과거에 응시하여 무과(武科)에 장원급제 하시었다. 우왕은 친히 만나보고 그 용모와 무술에 놀라고 기뻐하며 바로 전라도순문사겸 남해도원수로 임몀하니 그때 충의군의 춘추가 45세이셨다. 마침 이무렵에 왜구들이 장흥부와 정읍현을 휩쓸고 백성들을 죽이고 재물을 노략질하며 수많은 군사를 죽이고 장졸 백여명을 생포해 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충의군께서는 급히 왕에게 보고하고 패잔병을 수습하여 병영을 재건하니 많은 의병지원자들이 모여 들었다, 이들을 가려뽑아 특히 몸은 건장하고 날쌘 장정들을 골라서 결사대를 조직하여 훈련을 잘 시켜 해안을 특별 경계하니 이후로 왜구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왜구들은 방법을 바꾸어 인근 섬들에 거점을 만들고 낮에는 잠도 자고 휴식을 취하며 기다렸다가 밤을 이용하여 가까운 부락을 습격하여 식량과 재물을 약탈하며 반항하면 사정없이 죽이기도 하니 주민들이 더 이상 견딜수 없어 살던 마을을 버리고 피난하기에 급급하였다. 충의군 지용기장군께서는 이들을 섬멸하지 않고는 고려에 평화가 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마침 인구가 겹이라 밤에도 잘 보이는 점을 이용하여 올빼미 작전을 세워 대처하기로 하였다. 비밀리에 군사를 해안부락등에 잠입시켜 낮에는 낚시꾼을 가장하여 적정을 탐지하고 밤에는 해안 초소에 매복하여 왜국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교대로 잠을 재우고 보급을 충분하게 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높여 전력을 최고로 향상시켰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던 중에 드디어 왜구들이 백척도 넘는 작은 배를 타고 해안에 닿아 경비병만 몇 명 남기고 재물을 약탈하려고 모두 부락으로 사라진 뒤에 우리군사들이 날쌔게 기습하여 경비병들을 모조리 처치하고 놈들이 타고 왔던 배들을 수심이 깊은 딴 곳으로 몰아놓고 적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리없는 놈들은 약탁한 재물과 식량을 걸머매기도 하고 혹은 우리마을 사람들에게 등짐을 지우기도 하여 한두놈씩 돌아오는데 길모퉁이에 숨어 있다가 비호같이 덤벼들어 모조리 잡아죽이니 지척을 분간하지 못하는 어둠속에서 제대로 대항 해보지도 못하고 악소리를 지르며 죽어간 왜구들이 수도 없었다. 전 해안에 걸쳐 이같은 방법으로 적을 섬멸해 나가니 왜구들은 뒤늦게야 이를 알고 남은 놈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고 말았다. 충의군께서는 도망치는 놈들도 그냥두지 않고 날랜장졸 수백명을 손수 인솔하고 사로잡은 왜구놈을 인질로 삼아 그들의 소굴인 명랑향도(지금의 김제 앞에 있었다함)를 습격하여 닥치는 대로 왜구들을 쳐 죽이고 소굴을 불질러 그들의 근거지를 완전 없애버린후 사로잡혀 있던 우리 군사와 양민, 부녀자들의 가족들은 너무나 고맙고 감격하여 환오성을 지르며 충의군 지용기장군의 은혜를 기리며 전공을 기리는 전공비를 세웠다. 고려사에서는 이 싸움을 명양항대전(鳴良鄕大戰)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왜구들은 이렇게 쉽게 물러날 처지가 못되었다. 이들은 대개 대마도를 터전으로 살고 있었는데 평야가 적고 땅이 기름지지 못하여 곡식의 산출이 적으니 자연 식량이 부족하고 옷감이 넉넉하지 못하여 우리나라를 약탈하지 않으면 살아가기가 참으로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니 비록 이렇게 참패를 하여 혼이 났으나 또다시 떼를 몰아 쳐들어 왔다, 섬을 근거지로 하여 해안을 약탈하던 전의 수법을 버리고 이번에는 육지 깊숙이 쳐들어와 지리산에 숨어버리니 수목이 울창하여 도저히 토벌 할 수가 없었다. 충의군께서는 전북 남원과 경남 함양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작전에 대비하면서 형편을 살피니 왜구들은 밤만 되면 산에서 나와 마을을 습격하여 식량과 재물을 약탈하고 양민을 학살하니 백성들의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충의군께서는 더 이상 둘수 없다고 생각하여 병력을 모아 일부를 퇴로(退路)에 매복시키고 남은 군사를 몰아 사방을 포위하여 공격하니 왜구들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많은 피해를 입고 더욱 깊은 산중으로 숨어 들었다. 초겨울 낙엽이 지기를 기다렸다가 숨었던 잔적(殘賊)을 소탕해 버렸다. 그때 충의군께서는 이미 경상도밀직사(密直使)로서 조전원수가 되셨으니 우왕6년(1381년)이었다. 지난번에는 충의공 지용도와 충무공 지용수 두형제분께서 상우너수가 되어 관서(關西:평안도)와 관북(關北:함경도)지방에 침입한 오랑캐들을 쳐부수어 평정하더니 또 이번에는 충의군 지용기께서 왜구를 섬멸하는 공을 세우니 이때 모든 사람들은 지씨(池氏)덕택으로 편안히 살게 되었다 하고 지금이야말로 지씨가문의 전성시대라 하였다. 창왕원년에 태조 이성계, 심덕부, 배극렴, 조준. 성석린, 박위, 포은 정몽주 등과 더불어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책립(策立)하는데 공을 세웠으므로 문하찬성사의 높은 벼슬에 발탁되고 중흥공신(中興功臣)의 녹권(錄券)을 받아 충의군(忠義君)에 책봉되시었다. 책봉의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그대는 영매(英邁)한 자질과 크고 넓은 기량(器量)으로 항상 뜨거운 충성심을 가슴에 품고 관우와 장비 같은 용맹스러움을 겸하여 군사들을 어루만져 덕으로 다스리니 장졸들이 다투어 순종하고 전쟁에 나아가서는 적을 기필코 쳐부수려는 굳은 마음으로 큰 공을 세웠다. 공민왕이 돌아가시니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들이 정권을 잡고 신우와 신창이 왕위를 훔치니 왕실의 기상이 흐려져 어지럽고 윤리와 도덕이 무너져 종요사직의 신령님들이 놀래서 진노하시거늘 그대가 이성계등과 더불어 분기하여 몸의 위험을 돌보지 않고 의리로써 결단하고 빈틈없는 계획을 세워 나(공양왕)을 왕씨의 왕통에서 가장 가깝다고 하여 정통을 잇게하니 끊어졌던 실끝이 다시 이어짐이요 끊어졌던 선왕영령들의 제사가 다시 제데로 모셔지게 되었으니 그 공로가 참으로 빛나도다. 일찍이 유사에게 명하여 작위를 높여서 그대의 조부와 아버님도 책봉하도록 하고 정각을 세워 초상을 그려 모기도록하며 적장자는 「忠義」의 호를 대대로 잇고 다른 자손들은 영세토록 잘못이 혹시 있더라도 용서받게 하고 논밭과 노비를 내려주도록 하였으나 오히려 그 세운 공을 크지만 이에 비하여 상을 적어 족히 뒷사람들에게 이러한 좋은 일을 하도록 권함에 부족할까 염려하여서 이제 그대에게 다시 은촛대와 마필, 비단을 내리는 바이다.」라 하였다. 이어서 벼슬이 더욱 높아져 정일품(正一品:벼슬의 품계로 당시에는 正一品을 제일 높은 품계로 하고 제일 아래는 從九品까지 16품계가 있었음)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 三重大匡)으로 판삼사사란 이조의 영상에 해당되고 오늘날의 국무총리보다 더 윗다리라 볼수 있는 최고의 직위에 오르셨다. 그 이듬해인 공양왕2년(1390) 5월에 「이․초의 옥」이 일어났다. 「이․초의 옥」이란 윤이, 이초라는 자들이 중국 명나라 황제에게 가서 고려의 이성계가 정차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무고 하였다가 탄로 나 죄를 받은 사건을 말한다, 이때 헌사가 충의군지용기를 김종연(고려의 우너수로 윤이, 이초와 함께 명나라에 들어가 시중 이성계를 참소하였다고 죄를 받은 사람)의 일당이라고 죄를 씌워 강원도 삼척으로 귀양보냈다. 한편 충의군 지용기의 처족인 왕중명의 아들 왕식부라는 사람이 충의군의 사저를 무상 출입하며 지냈는네 자기가 고려의 선대왕인 충선왕의 얼증손(孼曾孫:손자의 첩이 낳은 아이)이리 하였으므로 정양군 왕우가 이를 알고 조정에 고하여 그를 체포하였다. 그런데 대사헌(大司憲:관리들은 감찰하고 기강을 진작하며 풍속을 바로 잡는 사헌부의 최고벼슬)김사형이란 자가 말하기는 「지용기는 공신으로서 큰 은혜를 입었으니 진실로 충성을 다해야 마땅하거늘 처의 재종형제인 왕익부를 충선왕의 증손이라 하여 몰래 집안에 숨겨 길렀으니 불충함이 막심합니다. 원하건데 전하께서는 왕익부와 그 일족을 벌하고 지용기의 고신(告身:벼슬을 보하는 사령장)과 공신녹권을 거두어 그 죄를 밝게 다스리소서.」 왕은 이에 사평부로 하여금 국문하게 하여 왕의부와 아우 왕득부, 그 일족 열셋을 처벌하였는데 당시 행승(幸僧:왕과 가까이 지내던 스님) 신조가 본래 지용기와 사이가 좋았던고로 가만히 왕에게 아뢰기를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 오로지 지용기에게 있다.」하였으므로 왕이 이를 믿고 다만 고신과 공신녹권만 거두고 용서해 주었다. 그러나 낭사 진의귀등이 또 여러말로 벌주기를 상소하고 헌사들도 극열하게 고변하니 왕이 정몽주, 조준을 불러 의논하고 지용기를 멀리 귀양보내고 가산을 몰수하였다. 이에 앞서 우왕때에 몇가지 사건이 있었다, 충의군지용기께서 왜구를 섬멸한 이래 얼마간 뜸하던 그들의 침략이 다시 시작되어 전남 광주, 동복 등을 괴롭혔으므로 조정에서는 다시 지용기를 순문사로 삼고 정지를 병마사로 삼아 옥과현에 들어온 적을 쫓으니 그들이 지용기의 이름만 듣고도 질겁을 하여 도망가다가 미라사라는 절을 들어가 숨었다. 우리 군사가 뒤 쫓아 절을 포위하고 불을 놓아 휘몰아 치니 적은 스스로 분사하고 말 백여필을 노획하였다, 첩보(捷報)를 받은 조정에서는 크게 치하하여 각각 은 50냥을 내렸다, 우왕14년(1388)에 요양(지금의 만주 요동성)을 쳐서 고구려 옛 영토를 수복하려고 군사를 이끌고 직접 평양에 이르렀다. 최영장군을 팔도도통사을 삼고 조만수를 좌군도통사로 삼아 서경도원수 심덕부, 부원수 이무, 양광도도원수 왕안덕, 부원수 이승원, 경상도상원수 박위, 전라도부원수 최운해, 계림원수 경의. 안동원수 최단, 조전원수 최공철,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조희길, 안경, 왕빈 드을 거느리게 하고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안주도도원수 정지. 상원수 지용기. 부원수 황보림, 동북면 부원수 이빈, 강원도부원수 구성노, 조전원수 윤호, 배극렴, 박영충, 이화, 이두란, 김상, 윤사덕, 경보, 팔도도통사 조전원수 이원계, 이을진, 전청장 등을 거느리게 하니 좌우군을 합하여 모두 3만8천여 병력이었다. 저녁이 되자 모든 장수들에게 술과 안주를 내리고 갑옷과 활, 칼을 나누어 주었으며 군사들도 배불리 먹인다음 좌우군을 총동원하여 평양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진을 쳤다. 그러나 우군도통사 이성계는 본래 요동정벌에 반대하여 소위 사불가론을 주장하였으니 첫째로 작은나라가 큰나라(명나라)를 친다는 것이 안될 일이요 둘째로 여름에 군사를 내는 것이 안될 일이며 셋째로 온힘을 기울여 요동을 치는 틈을 타서 왜구들이 쳐들어 올 염려가 있으니 안될 일이요 넷째로 장마철이 되어 활이 휘어지고 병사들에게 병이나니 안될 일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반대의견을 왕에게 간한바 있었으나 허용되지 않아 부득이 출정에 임한 이성계는 위화도에 진을 친뒤에 마침 큰비를 만나 강물이 범람하고 군사들 중에 죽는자가 속촐하자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군사를 되돌릴 것을 상소하였다. 그러나 평양에 대기하고 있던 왕과 도통사 최영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빨리 진군하라고 독촉하니 이성계는 명을 어기고 드디어 군사를 되돌려 오히려 본국 서울(개성)을 향하니 이 사건이 고려말의 「위화도 회군」이다. 왕과 최영장군은 어찌할바를 몰라 급히 서울인 송도(개성)로 귀환하여 회군방어에 임하였는데 곧 들이닥친 이성계군사에게 패하여 왕은 강화도로 쫓겨나고 최영장군은 지금의 고양으로 귀양갔다. 우왕의 뒤를 이어 왕자 창왕을 왕위에 올리고 최영을 다시 합포(지금의 마산)로 귀양지를 옮기었다. 이로써 조정도 완전 바뀌어 수상의 자리인 문하시중에는 이색이 앉고 부수상인 수문하시중에 이성계가 않았으나 그는 중외군사도통의 직위를 겸하였으므로 사실상 문무의 대권을 잡게되어 이로써 이씨조선개국의 터전을 만든 셈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판삼사사에 심덕부, 문하찬성사 지용기, 정몽주, 정당문학에 설장수, 평리에 성석린, 지문하사에 조준, 판자혜부사에 박위, 밀직부사에 정도전 등을 임명하였다. 어느날 이성계가 이들은 모두 불러 군사의 위세를 크게 떨쳐 벌리게 하고 잔치를 베풀어 말하기를 「우왕과 창왕은 본래 왕씨가 아니니 종사를 받들 수 없다. 또 천자(天子:중국 명나라 황제)의 명령도 가성을 폐하고 진성을 세우라 하였으니 지금 왕손 중에서는 정창군 왕요가 신종의 7대손으로 매우 가까운편이니 그를 마땅히 왕위에 올려야 한다」하고 여러 대신들의 의견을 물어 드디어 창왕마저 강화로 내쫓고 정창군을 왕위에 않히니 그가 곧 고려의 제34대 마지막왕 공양왕이다. 이때 공양왕이 교서(敎書:왕이 내리는 글)를 내렸는데 이르기를「공민왕이 불행하게 아들이 없었는데 적신 이인임이 신우를 거짓으로 왕씨라 하여 왕위에 올렸다. 우가 우둔하고 횡폭하여 명나라를 치려하므로 시중 이성계등이 사직의 대계로서 군사들을 달래어 회군하고 왕씨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의논할 때 주장 조민수가 이인임과 같은 당으로서 간교한 꾀를 내어 여러 대신의 의논을 막고 우의 아들 창으로 왕을 세우니 이로써 왕씨의 대통이 끊어져 신령과 사람들이 함께 분노하기 어언 16년이나 되었다. 금번 시중 이성계가 충성스런 마음으로 떨쳐 일어나 심덕부, 정몽주, 지용기, 설장수, 성석린, 박위, 조준, 정도전 등과 더불어 위로는 천자의 명을 받들고 종친어른들과 의논하며 공민왕정비의 명을 받들어 우와 창, 부자를 폐하고 나를 왕씨의 지친이라 하여 조종의 계통을 잇게하니 그 공은 개국공신(開國功臣)보다 못하지 않아 이를 영원토록 기릴 것을 맹약하나니 모든 이들은 시행하도록 하라.」하였다. 또 공양왕은 종묘(宗廟:先王의 신위를 모신 곳)에 나아가 이를 고하고 공신문(功臣文)을 공고하였는데 말하기를 「시중 이성계가 지극한 충성으로 떨쳐 일어나 그릇된 왕통을 바루고자하니 심덕부, 정몽주, 지용기,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정도전 등이 따라 찬동하여 드디어 이흉(二凶:우와창)을 제거하니 이에 성조진전(聖朝進展:선왕의 진영 앞)에 나아가 공을 고하여 상을 행하는 바이다. 이성계에게는 군을 봉하여 대대로 잇게하고 심덕부 이하는 충의군을 봉하여 모두 대를 이어 봉하는 것을 허락하고 초상화를 그려 전각에 걸고 공을 비석에 새겨 대려(帶廬:공신의 집안은 영원히 끊어지게 하지 않는다는 약속)의 맹약을 하여 조묘에 간직하겠사오니 원컨대 성조계서는 나의 뒤를 잇는 왕들과 아홉공신의 후손들을 도와 동심동덕(同心同德)으로 천록(天祿:하늘이 내리는 복록)을 함께 누리도록 하소서, 아홉공신의 자손들은 비록 대역죄(大逆罪)를 범하더라도 영원히 사면하도록 하여 그 공에 보답할 것이다. 내뒤의 왕들이 혹시 지그의 이 중흥의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고 아홉공신의 후손으로 하여금 작위(爵位)나 식읍(食邑:공신에게 맡겨주는 고을)을 잃게하면 그의 목숨을 끊어 나라를 향유하지 못하도록 하시옵서. 이는 나의 사사로이 함이 아니요 실로 아홉공신의 훌륭한 업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홉공신을 사직에 맡겨 왕씨를 다시 일으켜 우리 왕통을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라고 하엿다. 이에 공신녹권을 각각 내렸는데 이성계는 충의백을 삼고 밭 2백결(結:1결은 사방 33보의 면적)과 노비20호를 주고 심덕부는 충의백에 밭 150결, 노비 13구, 지용기 등 7인에게는 모두 충의군에 봉하고 각 밭 1백결, 노비 10구씩을 내렸다. 공양왕 2년(1390)에 아홉공신에게 교서를 내려 포상하고 말과 백금, 비단을 주고 내전에서 위로의 잔치를 베풀었다. 또 하교하기를 「가짜 임금 신우가 부도를 자행하고 또한 최영이 요동을 침범하고져 하여 나라로 하여금 천조(명나라)에 죄를 짓도록 하여 사직의 존망이 위태로웠는데 이성계가 조민수와 더불어 여러 장수를 달래어 회군시켜 사직을 안정시켰으니 그 공로가 매우 커서 대려처럼 잊을 수가 없다. 동심동력자(同心同力者)인 심덕부, 왕안덕, 지용기, 배극렴등 45인 모두에게 공신록을 내리니 유사는 계문하여 시행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해 11월에 이성계를 영삼삿를 삼고, 정몽주를 수문하지중으로 지용기를 판삼사사로 배그렴, 설장수를 문하찬성사로 삼았다. 그러나 그뒤에 이초의 옥에 연루되어 삼척으로 귀양가신 것은 위에 기술한바와 같다. 그 뒤에 면천으로 귀양지를 옮겼는데 이성계가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위를 빼앗아 이씨조선을 세우니 지용기를 옥에 가두고 더욱 고통을 가하였으나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고 성인의 글을 아침 저녁으로 읽으며 흐트러짐이 없으셨다. 지용기께서는 옥에 계시면서 너무나 의연하길에 옥리들도 크게 감동하여 몰래 돌보아 주기도 하였는데 한 옥리가 「책을 너무 읽으시니 체력을 손상할까두렵슨니다.」라고 하니 지용기께서는 「아침에 도(導)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성인께서 말씀하셨으니 나도 그렇게만 된다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느냐」하시었다. 항상 북쪽을 향하여 머리를 숙이며 말씀하시기를 「창천(蒼川:여기서는 千을 비유하는 말)은 높고 높으며 백일(白日:자신을 비유한 말)은 맑고 밝도다.」하시었다, 얼마 뒤 포은 정몽주선생께서 순절(殉節)하였다는 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나 역시 죽음이 있을 뿐이다.”,하시었고 드디어 유서(遺書)를 쓰셨다. 「달가(澾可:정몽주의 字)가 갑자기 가버리니 두손으로 어찌 잡으라.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하는 것을 어리석은 일이라 차라리 이 목숨 끊어 스스로 이몸 편하게 하리. 이제 죽은들 부끄러움이 없으면 족한 것이요. 인(仁)을 얻었으니 무슨 유감이 있으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식음을 끊어버리고 말하지 않고 눕지 않고 잠자지 않은지(不言․不食․不臥․不寢) 13일만에 귀양지의 감옥안에서 돌아가시니 그때가 이씨조선이 개국한 서기 1392년 4월 7일이었다. 그때 노란빛 안개기 사방에 있고 뇌성이 치고 폭우가 내리더니 조금 뒤에 흰무지개가 북쪽으로 수십리에 걸쳐 뻗쳤다고 한다. 옥리가 놀라 현감에게 고하고 함께 들어가 살피니 충의군 지용기께서는 북쪽을 향하여 정좌(整坐)하고 입은 굳게 다물고 눈을 부릅떴는데 머리카락이노하여 위로 치켜세운 상태로 절명하시었으므로 감히 바로 볼수 없도록 무섭고 엄숙하였다. 날을 정하여 장례를 치르니 묘소는 충남 당진군 합덕면 석우리의 분토산에 남향으로 있다. 배위는 이천서씨 승지를 지낸 서욱의 따님이신데 충의군 지용기와 합장으로 모섰다. 제사는 매년 음력 10월 7일 묘소에서 모신다. 충의군 지용기께서는 10여년간을 두고 온 정성을 기울여 많은 책을 저술하였는데 효경광의(孝經廣儀), 인의부강(仁儀富强), 삼교정화(三敎精華), 개척경제(開拓經濟), 불외역리(不外易理), 십대장부(十大丈夫), 유악지남(帷幄指南), 후손무자(後孫武子), 관방이벽(關防鋰壁), 오도선례(吾道先禮), 해륙주리(海陸周利), 사민요무(四民要務), 성리연원(性理淵源), 춘추혈맥(春秋血脈), 역사간사(歷史婜舍), 천인배합(天人背合) 등 16종과 고금시체약간편(古今詩體略干篇)을 모은 5권이 있는데 박지범부집(博地凡夫集)이라고도 이름하였다. 이 저서들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예술, 외교, 국교, 국방, 보건, 상공, 행정, 사번, 입법 등 전분야의 선정(善政)을 시행하는데 필요한 지침(指針)이 상세히 실려 있는 천하의 양서(良書)라고 한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고 난 뒤에 가산을 몰수당하는 중에 조준, 배근렴, 정도전 등이 이들 저서를 모두 불태워 버리니 지금은 한권도 온전히 전하는 것이 없다, 충의군 지용기는 조선태조 이성계와 매우 절친한 사이였고 정종의 후비 숙의지씨가 그의 당고모였으므로 조선존에 들어가면 부귀영화(富貴榮華)가 보장되어 있었는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켜 순절하시니 충의군 지용기의 위대하신 지조와 절개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인의 도의를 주장하다가 밀려난 것을 생각하면 공의 강직한 절개를 이해할 수가 있다. 충의군 지용기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이 광주광역시 광산구 금호동의 금호초등하교 뒷산에 있는 병천사 안에 있는데 매년 음력 3월 13일에 영남과 호남 유림들이 모여서 제사를 모신다. 충의군 지용기는 고려왕조에서 보기 드문 훌륭한 지도자요, 애국애족하는 위대한 영도략을 지닌 분이었다.
전리총랑(典理摠郞)을 지낸 諱 득전[得全]의 셋째아들로 본 문의 중시조(派祖)다.생몰(生沒) 시기는 알 수 없고 관직은 서운부정(書雲副正)에 이르렀다.墓所는 미상.배위(配位)는 충주 池씨로 父는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부원군(府院君) 지용기(池湧奇)이고 조부는 전의감정(典醫監正) 지복용(池福龍)이며 증조는 평장사(平章事) 지 연(池演)이다.외조는 위위시정(衛尉寺正) 서 욱(徐勖 :이천인). 아들 곤[ 崑 ],택[ 澤 ],담[ 淡 ],홍[ 洪 ],탁[ 濯 ],린[ 潾 ],륜[ 崙 ]이 있고 딸 하나는 중추원사(中樞院事) 증 영의정 화산부원군(贈 領議政 花山府院君) 권 전(權專 :안동인)에게 시집 갔다.권 전의 父는 한성윤(漢城尹)을 역임한 권백종(權伯宗)이며 아들은 승지(承旨) 권 신(權愼)인데 조선 세조 朝에 사육신(死六臣)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였다.그 아들 권자근(權自僅)의 큰딸이 문종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사녀(嗣女)가 되었고,그 아들이 부정(副正) 권산해(權山海)인데 권산해의 외동딸은 파평인 윤영손(尹令孫)에게 시집 갔다.그러나 윤영손(尹令孫) 역시 사육신(死六臣)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 파조상고 : 먼 옛날 高麗시대에 諱 溫이라는 분이 계셨으니 바로 海州崔氏의 始祖이시다.黃海道 海州 大寧郡에서 출생하시어 조상대대로 文章과 行實로 세상에 이름 났다.이 분이 諱 沖을 낳으시니 三重大匡太師요 호는 惺齋,月圃,또는 放晦齋라고도 하며 시호는 文憲이다.우리나라 순정유학의 宗祖로 세상에서는 海東孔子로 높여 부른다.이 분이 諱 惟善을 낳으시니 역시 三重大匡太師요 호는 松灘,시호는 文和이다.대를 이은 儒學의 宗長으로 세상사람의 스승이 되셨다.이 분이 諱 思齊를 낳으시니 司空 中書令 判吏部事요,시호는 良平인데 詩人으로 유명하였다.이 분이 諱 약을 낳으시니 榮祿大夫 禮部尙書 翰林學士요 직간으로 이름 높았다.후일 三重大匡太師에 증직되었다.이 분이 諱 允仁을 낳으시니 監察御史를 지내셨고 이 분이 諱 敏을 낳으시니 銀靑光祿大夫 尙書左僕射이며 본 문 派祖의 5代祖가 되신다.모두가 고려에 공헌하신 훌륭한 분들이다. 高祖의 諱는 滋로서 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平章事 修文殿太學士를 지냈으며 호는 동산수,시호는 文淸이다.당시 고려의 문병을 잡아 성망이 대단하였다.曾祖는 諱 유엄으로 三重大匡 匡靖大夫 都僉議中贊 大寧君開國侯요 시호는 忠憲이다.이분 역시 고려역사를 찬란히 빛낸 분으로 고려사열전에 그 傳記가 있다.祖父는 諱 持로서 初諱는 繼述이요 大護軍인데 忠憲公에 앞서 별세하였다.父親의 諱는 得全이며 典理摠郞을 지내셨다.母親이 두 분인데 첫 분은 夫人 부녕 金씨로 民部議郞 金 恪의 따님이시고 生母는 夫人 ○○ 朴씨로 及第 朴 彬의 따님이시다.다섯아들중 본 문 派祖는 셋째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