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8(태종 18)~1441(세종 23). 조선 제5대 왕 문종의 비.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딸이며 고려의 명장 충의군 지용기의 외증손녀이다. 1431년(세종 13) 세자궁에 선임되어 승휘(承徽)에 올랐다. 1433년경 양원(良媛)에 진봉되었다. 1437년 종부시소윤 봉려(奉礪)의 딸 순빈(純嬪)이 부덕하여 폐빈된 뒤 세자빈이 되었다.
성품이 단아하고 효행이 있어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총애를 받았다. 1441년 원손(元孫 : 뒤의 단종)을 출생하고 3일 뒤에 죽었다. 같은 해 현덕(顯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경기도 안산시 치지고읍산(治之古邑山)에 예장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현덕왕후에 추숭되었다.
혼전호(魂殿號)는 경희전(景禧殿)이다. 능호는 소릉(昭陵)이라고 명명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년) 문종과 합장되면서 현릉(顯陵)으로 개호되었다. 1454년 인효순혜(仁孝順惠)의 존호가 추상되었다. 같은 해 문종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봉안되었다.
1457년(세조 3) 현덕왕후의 어머니 아지(阿只)와 동생 자신(自愼)이 1456년에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사형당하고, 아버지 전이 추폐(追廢)되어 서민이 되었다. 그리고 아들 노산군(魯山君)이 종사에 죄를 지어 군(君)으로 강봉(降封)되었다.
이에 ?그 어미 된 자가 왕후의 명호를 유지함은 마땅하지 않으니 추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개장해야 한다.?는 의정부의 계(啓)에 따라 폐위되었다. 이와 함께 종묘에서 신주가 철거되고, 평민의 예로 개장되었다. 1471년(성종 2) 남효온(南孝溫)이 추복(追復)을 건의하였다.
1495년(연산군 1)에는 대사간 김극뉴(金克群), 사간 이의무(李宜茂), 헌납 김일손(金馹孫) 등이 현덕왕후의 추복을 헌의(獻議)하였다. 1512년(중종 7)에도 주강(晝講) 석상에서 경연검토관 소세양(蘇世讓)이 추복을 건의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듬해 종묘에 벼락이 치자 그것을 계기로 재차 논의되면서 전교(傳敎)로 추복되었다.
그리하여 현릉 동쪽에 이장되었다. 신주는 종묘 문종실(文宗室)에 봉안되었다. 친가(親家)도 1699년(숙종 25) 단종의 부묘(欖廟)와 함께 신원되었다. 소생으로는 단종과 영양위(寧陽尉) 정종(鄭宗)에게 시집 간 경혜공주(敬惠公主)가 있다. 시호는 인효순혜현덕왕후(仁孝順惠顯德王后)이다. 능호는 현릉(顯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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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빈(顯德嬪)을 옛 안산읍(安山邑) 와리산(瓦里山)에 장사지냈다. 그 지문(誌文)에 이르기를, “삼가 상고하건대, 빈(嬪)의 성(姓)은 권씨(權氏)로서, 먼 조상[遠祖] 김행(金幸)은 신라(新羅)의 대성(大姓)이었다. 복주(福州)를 지키고 있었는데, 고려 태조(高麗太祖)가 신라를 공격할 때에 가다가 복주에 이르니, 행(幸)이 고을을 가지고 항복하였으므로, 태조가 말하기를, ‘행(幸)은 가위(可謂) 권도(權道)를 안다 하겠다.’ 하고, 인하여 ‘권(權)’ 이라고 사성(賜姓)하였는데, 벼슬이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이로 인하여 김씨가 처음으로 권씨가 되었는데, 대대로 현철(賢哲)한 이가 많이 나서 영성(榮盛)하기가 비할 데 없었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정평(正平)이니, 증 통정 대부 공조 참의 행 통직랑 판도 정랑(贈通政大夫工曹參議行通直郞版圖正郞)이요, 조(祖)의 휘(諱)는 백종(伯宗)이니, 가선 대부 검교 한성 윤(嘉善大夫檢校漢城尹)으로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에 증직(贈職)되었고, 부(父)의 휘(諱)는 전(專)이니, 지금 자헌대부중추원사(資憲大夫中樞院使)가 되었다. 어머니 최씨(崔氏)는 고려(高麗)의 대유(大儒) 중서령 문헌공(中書令文憲公) 휘(諱) 최충(崔沖)의 12대 손(孫)인 서운부정(書雲副正) 휘(諱) 최용(崔용)의 딸이니, 영락(永樂) 무술 3월 임신(壬申)에 빈(嬪)을 홍주(洪州) 합덕현(合德縣)의 사제(私第)에서 낳았다.
빈(嬪)은 나면서 정숙하고 아름다워 외화(外華)가 보통과 다르고, 말과 행실이 예절에 합하였다. 선덕(宣德) 신해(辛亥)에 뽑혀서 세자궁(世子宮)에 들어와 승휘(承徽)가 되었고, 얼마 아니 되어 양원(良媛)으로 승격되었다. 정통(正統) 정사(丁巳) 2월에 빈(嬪) 봉씨(奉氏)가 부덕(不德)함으로 인하여 폐위(廢位)되매, 드디어 책봉(冊封)되어 빈(嬪)이 되었다. 공경히 양궁(兩宮)을 받들매 화(和)한 마음으로 기쁘게 받들고, 좌우(左右)의 잉시(잉侍)들에게는 항상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삼가고 화합하는 미풍을 조성하였다. 신유년 7월 23일 정사에 몸을 풀어서 원손(元孫)이 탄생되니, 양궁(兩宮)께서 매우 기뻐하시고,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서로 축하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날 임금께서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시어 교서(敎書)를 반강(頒降)하여 나라 안에 대사(大赦)하게 하시고, 또 장차 원손의 탄생한 예(禮)를 거행하려 하시었는데, 이튿날 무오(戊午)에 갑자기 병이 나시어 동궁(東宮) 자선당(資善堂)에서 운명하셨으니, 춘추(春秋)가 스물 넷이다. 의원이 미처 약을 쓰지 못하였고, 기도(祈禱)도 신명(神明)에 두루 하지 못하여, 양궁께서 슬퍼하며 애석하게 여기시고, 나라 사람들도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아아, 슬프도다. 양궁께서 대공(大功)으로 5일간 복입으셨고, 세자께서는 기복(期服)으로 30일간 복입으셨다. 9월 초7일에 시호(諡號)하기를 현덕(顯德)이라 하고, 예(禮)를 갖추어 안산군(安山郡)의 고읍(古邑) 산에 장사하였다. 빈(嬪)은 타고난 성품이 한정(閑靜)하시어 입궁(入宮)하여서도 칭찬이 많아, 능히 동궁(東宮)에 짝이 되어 이 원손(元孫)을 낳으셨으니, 일국(一國)의 경사이었다. 어찌하여 한 병으로 갑자기 고치지 못하게 되었는가. 아아, 슬프도다. 빈(嬪)은 일남 일녀(一男一女)를 낳으셨으니, 여아는 이미 젖을 떼었고, 남아는 곧 원손(元孫)이다.” 하고,
명(銘)에 이르기를, “부드럽고 지혜로운 덕(德)과 아름답고 고운 용모가 양궁(兩宮)에게 사랑을 받아, 그 책봉(冊封)하심을 받았고, 의식대로 빈(嬪)의 법도를 닦으시어 미덥게도 원량(元良)의 짝이 되셨도다. 원손(元孫)이 탄생되어 울음소리 황황(皇皇)하니, 종팽(宗팽)에 경사가 넘쳤고 기쁨이 조야(朝野)에 가득하였는데, 하늘이여, 어찌하여 나이[年]마저 안 주셨나. 자는 듯 세상을 떠나시매 복을 누리지 못하셨도다. 슬픈들 어이하리 말씀이나 돌에 새기리라.” 하였다. 【원전】 4 집 363 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 *가족-성명(姓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