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우리나라의 말이(語音)중국과 달라서“문자”가 서로 통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과연 行間의 의미는 무얼 뜻하는 것일까요?
한글은 문자이지 말이 아니질 않습니까? 그렇다면 현재는 중국과 문자가 통할수 가 있는것일까요? 만약에 여기에서 말하는대로 문자가 아니고 말이라 한다면 글자 그대로 발음기호가 맞는것입니다. 최소한 당시에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종임금자신도 언문이라고 하였으며, 언문청이란 기구도 만들어서 서적을 출판하였던것 아닌가요? 그런데 지금의 학자들은 그언문청을 정음청이라고 합니다. 세종조 문헌에 그어디에도 언문청이라고 되어있지 정음청이란말은 없습니다. 정음청을 혁파하였다. 라는 문종조 2년 에 기사가 나올뿐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중국과는 문자가 통할 수가 있다는것인가요? 여기에서 분명한것은 분명히 ´글´이 아니라 ´말´이 달라서 ´문자´가 통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불쌍하여서(편민주의)언문을 만들었다. 라고 했습니다.
말이 다른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이부분까지는 이해를 하였습니다만) 그런데 말이 달라서 문자가 통하지 않았다니? 문자는 중국이나 조선이나 옛날부터 한자(한문)를 쓰고 있지를 않았는지요? 여기가 중요합니다. 말이 달라서 문자가 통하지 않았다...? (이해가되질않습니다. 종친여러분들께서는 이해하셨는지요?) 아시는 종친이 계시면 그 의미를 아래에 댓글로 한수 가리켜주시길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아래의 예를 잘읽어보시면 아마도 이해가 되실것입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역대 주석 들의 이름을 보면 강택민(江澤民)을 장쩌민 으로 등소평(鄧小平)을 덩샤오핑 으로 모택동(毛澤東)을 마우쩌뚱 으로 주은래(周恩來)를 저우언라이 로 하고, 공자(孔子)를 꾸웅쭈 라고 하니, 문자는 같은데 발음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통하지 않았다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종은 당시에 요동으로 유배된 명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 이란 사람에게 신숙주와 성삼문을 자그마치 13번을 보내서 중국어 발음(음운학상)에 대하여 연구 하였던것은 어느누구라도 부인할 수 가 없는 것이 세종실록의 기사가 있습니다.
위와같이 문자는 같은데 발음이 다른것에 착안을 한것이 세종임금의 당시에 동국정운식 번역사업이었던것입니다. 만약에 동국정운식 발음이 성공했더라면 우리말은 중국말과 비숫한 말을 쓰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중국은 원나라의 침입이후 중국 표준음(漢族 音)이 급격하게 변화하여 한자를 읽어 소통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만든것이 홍무정훈 인것이며, 특히 고려조 에서는 사역원을 따로 두어 2품관이 관리하는 역관(통역관)을 양성하게된 동기가 되었으며, 그전에는 한자(文字)만 알면 서로 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고전국역총서 等을 참조하세요)
그런데 일부 한글학자들이 주장하는내용을 보면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는것입니다. 당시에 한자에 대한 표준음이 정해져 있지 않아 백성들이 여러모로 불편해하는 엄연한 사실을 그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예를 들어 ´牧丹´을 두고 어떤 이는 ´목단´으로 어떤 이는 ´모란´으로 발음한다. (여기에서 그들은 부제학공과 갑자상소를 올린이를 뜻함) 이러니 똑같이 한문을 공부하고도 서로 뜻이 통하지 않는 결과가 생긴 것이다. 이래서 세종임금이 백성들을 위한 편민주의 어쩌구하면서 언문을 만들었다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것 아닙니까? 한심하단 생각이 절로 듭니다.
위와같이 문자는 같은데 발음이 달라서 그발음을 바로잡기위하여 한글을 만들었다는게 정인지의 세종어제 훈민정음의 발문(세종실록의 기사) 에 나와있는데도 말입니다.
*참고*牧丹:(모란), [목단(牧丹)이라고도 한다. 높이 2m이며 각처에서 재배하고 있다. 가지는 굵고 털이 없다. 잎은 3엽으로 되어 있고 작은 잎은 달걀모양이며 2∼5개로 갈라진다.]
이런말이 가당하기는 한것인지 종친여러분들께 여쭙고 싶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모란이라고도 하고 목단이라고도 하는데 뭐가 달라진건지 그의미를 모르겠다 이말씀입니다. 울나라 중학교 학생들 참으로불쌍합니다. 제대로된 역사를 배울수가없는 작금의 현실이니 말입니다 . 그렇게 어렸을적 부터 왜곡되게 가르치니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소설 뿌리깊은 나무를 쓴 이정명이 같은 엉터리 작가가 한글의 우수성과 세종의 업적을 칭송하니 독자들이 마치 그를(이정명) 애국자인양 생각케 되는게 아닌지요? (이정명이는 국문학 출신이랍니다.)
각설하옵고, 바로 그 홍무정운 을 附會(번역)하는 작업을 1444년 갑자년 음력 2월16일이전에 세종이 집현전 소장학자들에게 명하여서 올리게 된 上疏가 바로 부제학공이신(諱) 萬理 선조님이 疏頭가 되어 여럿이 合疏를 올리게 되는것입니다. 이름하여 제목은 언문의부당함을 아뢰다. 인것입니다. (그런데 제목 부터 한글창제반대상소 라고 왜곡된것입니다.)
그러니까, 언문 창제의 첫째 목적은 조선 한자음의 교정에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글자그대로 당시에 언문은 한자어의 발음기호에 불과 하였던 것이라 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내용은 저의 생각도 이숭녕박사님, 남광우 박사님,황재순박사님,의 생각과 같다고 말씀드릴수가 있는것입니다.
하기야 뭐 이것도 백성을 위한 길이기는 하지만, 훈민정음 어제 서문의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려고 하는 바가 있어도"" 이 부분에서 ""어리석은 백성""은 누굴 뜻하는걸까요. 제생각엔 한문을 아는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엔 한자에 대한공부가 없으면 언문이 필요치 않았던것입니다. 한자음에 대한 토(발음기호) 역활이었던것입니다.
지금의 일부 학자들은 이런것에 대하여서도 그 의미를 왜곡 시킨채로 사대주의가 어떻고, 혹은 한글의 우수성과 세종임금의 업적만을 강조 하다보니 말 그대로 아전인수격 으로 후학을 가르치고 있는것 아닐까요?.
그리고 세종께서 그렇게도 열정을 보이신 이사업(운서교정작업)은 유일하게 실패하고 마는것 입니다. 안타깝게도 성종조에 모든 것이 폐기되는 역사적인 사실이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는것을 지금의 학자들은 왜 굳이 외면 하는것일까요?
세종께서 언문을 창제하시고, 정확히 448년동안 한글이 제 구실을 한것이 언제였는가를 상기하여 보시길 바랍니다. 갑오경장(1895. 8 ~ 1896. 2) 이후 일본인들이 청나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킨다고 하여 독립문도 세우게 하고, 독립신문도 만들게 하였으며, 사전이라든가 성경책 또는 불경들을 한글로 번역하는 사업을 한것이 바로 갑오경장이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이란 국호를 사용하고 난 이후가 되는것입니다.
아래내용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註]: 독립문[獨立門]:1896년(건양 1) 독립협회(獨立協會)가 한국의 영구 독립을 선언하기 위하여 청(淸)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전국민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하여 세웠다.
독립신문[獨立新聞]: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徐載弼)이 정부로부터 4,400원(3,000원은 신문사 창설비, 1,400원은 서재필의 주택구입비)의 자금을 지급받아 1896년 4월 7일 창간하였다.
일제강점기 [日帝强占期]: 1910년 8월 국권피탈로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부터 8·15광복에 이르기까지 일제강점(强占)하의 식민통치 시기. (그래서 사람들은 일제 36년이라고 합니다.) 종친 여러분! 어린 자제분들에게 질문하여 보십시요. 독립문은 왜 만들어 졌으며 또한 독립신문은 왜 만들어 졌느냐고요? 아마도 일본에 대항해서 독립하여서 만든것이 독립문이고, 독립신문이 만들어졌다고 대부분 말할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나라 역사 교육의 현주소인것입니다.
종친 여러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강령하십시요.
대종회 청년국장 겸 중앙청년회 회장 영림 영길 배상 ======================================================================
이렇듯 세종임금의 편민주의 사상에 젖어 세종임금을 칭송하시는 국문학 박사님들이시여!!! 갑자상소 본문도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서 무엇으로 후학들을 가르치시렵니까? ㅉㅉㅉ 제발 정신좀 차리시지요.....
승조
국장님 여러모로 수고하십니다 누구나 할 수있는것같이보이나막상 국장님같이 할려고하면은 힘들것이라고 봅니다.새해에도 건승하시고 좋은글 많이올려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