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장성 (고려 성 [城]) [千里長城] 11세기초 고려가 북쪽 변방지역에 쌓은 1,000여 리에 걸친 석축산성. 1033년(덕종 2) 고려는 동북 방면의 여진족과 서북방면의 거란족을 방비할 목적으로 장성축조를 시작하였다. 평장사 유소(柳韶)가 축성을 지휘했는데, 축성범위는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는 지금의 의주지역 및 그 부근의 평안북도 맹산·운산·개천 등 13개 성을 거쳐 함경남도 영흥지역의 34개 성에 연결되어 동쪽으로 바다에 이어지고 있다. 이 장성은 군사적인 기능뿐 아니라 문화권의 구분과 같은 의미도 지닌 것으로 지적된다. ~~~~~~~~~~~~~~~~~~~~~~~~~~~~~~~~~~~~~~~~~~~~~~~~~~~~~~~~~~~~~~~ 고려조에 문헌공 선조님께서 왕명으로 서북면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시어 평안남도 이당시 1041년 (정종7년)에 영원진(寧遠鎭)과 평로진(平盧鎭) 과 보(堡)14곳을 축성하셨다는 기록을 수양열전에 수록코자 구하기위하여 아침 일찍이 서울로 나가 김포종회 회장님이신(康勳)종친과 함께 종로구 구기동 소재 이북 5 도청 내 평안남도민회를 찾아갔다가 마침 옆에 황해도민회가 있기에 방문하여서 자문을 구하였으나 황해도민 회장님의 말씀이 종로 3가 낙원상가 쪽에 가면 해주도민회가 있다고 하여 다시 해주도민회를 찾아가서 그곳에서 해주시지를 한권 구입하였으며 마침 그곳에 와계신 어르신들중에 한분이 해주최가 라고 밝히니 문한당(문헌당) 후손들이시구먼 하더군요.
黃海南道 碧城郡 (황해도 벽성군 서석면 서원리)에 문헌당(文憲書院:일명:文憲堂) 이 현재도 깨끗하게 보존되고있다는 이야기를 그곳 해주시민회 회장이신呂運 선생으로 부터 전하여 들을수가 있었으며 가장 최근에 찍은 영상물도 있다는 말씀을 들을수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해주시가 커져서 문헌서원이 해주시로 편입이 되었는데 1917년 당시에는 행정구역이 벽성군 서석면 서원리 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해주시(해주감영) 에서 서쪽으로 15리 신광사 아래 신광천 중류 에 위치 하였다는 어르신의 소싯적의 기억으로 도움말씀을 들을수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없는 관계로 영상물을 볼수는 없었던게 아쉽기는 하였지만 다음을 기약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기록은 황해도 거주 최씨들의 분포 상황을 발췌한것입니다. 혹여 종친들께서도 해주최씨라고는 하지만 파를 찾지못하시는 종친들이 계시면 참고가 될듯하여서 스크랩 하였습니다.
대종회 중앙청년회 회장 영림 영길 배상
황해도최씨집성촌(黃海道崔氏集姓村)
일반적으로 전국(全國)에 누대(累代)에 걸쳐 정착(定着) 세거(世居)하는 자연부락(自然部落)을 집성촌(集姓村)이라 한다.
이러한 집성촌(集姓村)이 산업화(産業化), 도시화(都市化)로 인하여 대가족(大家族) 에서 핵가족(核家族)로 변하고 더불어 집성촌(集姓村)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1930년에 실시한 국세조사(國勢調査)의 통계자료(統計資料)에 의(依)하여 20호(戶) 이상(以上)만을 골라 수록(收錄)하였으므로 당해(當該) 제종(諸宗)은 참고(參考)하시길 바라며 또한 행정구역명칭은 1988년(단기4321년)발간기준이며 현 행정구역과 다소 차이가 있음을 감안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