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 문 ----- 저는 대령군파 33세 춘선(春善)입니다. 대정15년(서기1926년) 평북 정주군에서 발간된 해주최씨 족보 말미에 의하면 강원파로서 29세 봉진(鳳臻), 30세 치륜(致崙)과 치관(致寬), 31세 응식(應植),응규(應奎),응오(應伍)님 중 응식의 세손입니다.
현재 발간된 해주최씨 대종회 대종보 권3에 의하면 24세 완종(完宗)님은 25세 만필(萬弼) 한 분으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소지하고 있는 대정15년 평북 정주에서 발간된 저희 족보에는 25세 만필, 영필(英弼) 두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재 저는 향후 약 2020년 전후 발간예정인 대동보에 25세 영필님 후손을 찾아 추가하기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남한에 계시는 25세 영필님 후손이신 26세 천광(天光), 천우(天宇),천수(天壽)님의 후손들을 찾고 있습니다.
26세 후손 혹은 30세 치관(致寬)님의 후손들께서 이 메일을 보시면 저와 상호 연락을 하여 대동보 양식에 맞는 수단을 정리하여 향후 발간된 대동보에는 25세 영필 선조님의 후손들을 추가할 수 있도록 하였으면 합니다.
관심있으신 대령군파 25세 영필 선조님의 후손님들의 많은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제 연락처는 019-339-0138이며, E-mail은 ccs0926@hanmail.net 입니다. -------------------------------------------------------------------------------------------------------
최치륜(崔致倫) 시대 조선 후기 생졸년 ? - 1812 (순조 12) 본관 해주(海州) 성 최(崔) 성별 남 활동분야 항일/국방 / 의병 / 의병
최치륜(崔致倫)에 대하여
?∼1812(순조 12). 조선 후기의 의병. 본관은 해주(海州). 참의 무숭(茂崇)의 손자이다.
1811년(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전 첨사(僉使)로서 의병에 참가하여 할아버지 무숭과 함께 의주성을 지켰다.
뒤에 의병장 허항(許沆)의 휘하에서 좌익장(左翼將)이 되어 농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용주(龍州)를 수복하였고, 철산유진장(鐵山留陣將)이 되어 농민군 청북도지휘(淸北都指揮) 정경행(鄭敬行)과 휘하 군관인 정대성(鄭大成)·김윤대(金允大) 등을 생포하였다.
또한, 농민군으로서 용천부사를 자처하고 있던 정성한(鄭聖翰)과 그의 무리인 장성명(張成明)·최유천(崔維天) 등을 사로잡아 압송하도록 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전공을 높이 인정하여 자품을 올려 나주영장(羅州營將)에 임명하였으나 1812년 정주성을 공격하다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의주 학봉사(鶴峰祠)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純祖實錄,西征日記,陣中日記,關西邑誌
순조 12년 임신(1812, 가경 17) 1월 18일(임진)
평안 감사가 의주 부윤 조흥진의 철산 등의 승전과 정복일의 압송을 아뢰다
평안 병사가 아뢰기를, “의주 부윤(義州府尹) 조흥진(趙興鎭)이 보고하기를, ‘본부(本府)의 영병장(領兵將) 허항(許沆)과 김견신(金見臣) 등이 14일 오시(午時)에 동림성(東林城)으로 달려 들어가자 모여 있던 적도들이 모두 무기를 버리고 흩어졌으므로, 군사들이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아니한 채 그대로 소탕했고, 체포한 적도 4명과 거둔 무기도 또한 실어 보냈습니다. 동림·서림 및 철산(鐵山) 세 곳의 적도들은 며칠 안에 모두 토멸(討滅)하였으되, 본부(本府)의 군사들은 한 사람도 다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서림성(西林城)에서 생포한 적도 42명은 모두 선천(宣川)·철산·용천(龍川) 세 고을의 유개(流丐)의 부류였으므로 다시 양민이 되게 한다는 뜻으로 효유(曉諭)하여 석방해 보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의주 부윤 조흥진이 보고하기를, ‘본부(本府)의 장교(將校)로서 철산의 진에 머물렀던 최치륜(崔致倫)이 적괴 정경행(鄭敬行)·정대성(鄭大成)·김윤대(金允大) 등을 잡아 바치고, 의병장 김견신이 적괴 정복일(鄭復一)을 잡아 바쳤길래, 조사해 물었더니, 「정경행은 청북 도지휘사(淸北都指揮使)이고 정복일은 철산 부사(鐵山府使)」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산(嘉山)·정주(定州)·선천(宣川)·곽산(郭山) 등의 고을의 흉패(凶悖)한 향임이나 장교들이 서로 내응(內應)하고, 철산의 정가(鄭哥)들이 모두 적당(賊黨)으로 들어간 것은 모두 정복일이 속이고 유혹한 소치입니다. 바야흐로 함거(檻車)로 압송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원전】 48 집 5 면 【분류】 *군사(軍事) / *변란-민란(民亂) [주D-001]유개(流丐) : 떠도는 비렁뱅이.
순조 12년 임신(1812, 가경 17) 1월 22일(병신)
좌의정 김재찬이 제경욱·김대택·의주 공신의 공로와 민정을 위로할 것을 아뢰다
차대하였다. 좌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아뢰기를, “제경욱(諸景彧)과 김대택(金大宅)은 애초부터 왕명을 받은 장수가 아니었고, 또 항오(行伍) 중에 있는 군사와도 달랐음에도, 단지 적개(敵愾)의 의리로 개연히 종정(從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성을 공격하는 날 전모(前茅)가 되어 관문을 지키는 자를 베고 곧장 돌입하여 나아감만 있었고 물러남이 없다가 마침내 순사(殉死)하고 말았으니, 이것은 수양(睢陽)의 순원(巡遠)과 다름이 없습니다. 더욱이 듣건대 제경욱은 일찍이 나라를 위해 한 번 죽기로 스스로 작정하고, 한 자의 칼을 쥔 채 천리길을 떠나는데, 도보로 길에 올라 매번 사람들에게 말하되 다시는 돌아가지 않기로 맹세했다고 합니다. 그 난에 죽기로 마음에 맹세한 것이 이미 평소 정한 바 있었으니, 실로 그 조상을 닮은 후손입니다. 김대택은 본디 가산 사람으로서 군민(郡民) 전체가 적도가 되었으나, 유독 스스로 몸을 빼어 서울로 들어와 순무(巡撫)의 휘하에 소속되기를 원하고, 군사를 좇아 서쪽으로 출정하여 육박하여 성에 올랐다가 제경욱과 함께 동시에 목숨을 버렸습니다. 대개 혁연(赫然)한 두 사람의 충절은 족히 삼군(三軍)을 씩씩하게 하고 팔방(八方)을 고무했었기 때문에 정려(旌閭)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하며 2품의 절도사 직임을 추증하는 것에 대해서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습니다만, 청컨대 제경욱에게는 특별히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를 추증하고, 김대택에게는 특별히 남병사(南兵使)를 추증하되 처자를 방문하여 넉넉히 구휼하고 빈장(殯葬)을 각별히 더 도와주도록 하소서. 또 들으니, 제경욱은 가난하여 힘이 없어 그 선조 제말(諸沫)의 연시(延諡)를 아직까지 하지 못해 한을 안은 채 죽었다고 하니, 이조로 하여금 즉시 시호를 내리게 하고, 호조에서는 연시의 비용을 도아주게 하여, 장사지내기 전에 그 눈을 채 감지 못한 한을 위로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이번에 적을 토벌한 공은 의주(義州)가 으뜸입니다. 김견신(金見臣)은 창의(倡義)해 군사를 모아 싸우면 반드시 승첩을 아뢰었고, 허항(許沆)은 밤에 용천(龍川)을 습격하여 전 지경(地境)을 수복하였으며, 최신엽(崔信燁)은 미관(彌串)을 격파하여 적괴(賊魁)를 사로 잡았고, 용골(龍骨)을 습격하매 흉도(凶徒)가 스스로 궤멸되었습니다. 선천(宣川)과 철산(鐵山)에 나누어 모여 있던 적들이 소문을 듣고 먼저 흩어진 것과, 운암 산성(雲暗山城)의 험한 곳에 웅거하고 있던 도적들이 싸우지도 않고 벌써 달아난 것은 모두 이 세 장교의 공입니다. 최치륜(崔致倫)이 적괴 정경행(鄭敬行)을 생포해 결박지어 능히 거괴(巨魁)를 잡았던 것은 곧 출전한 뒤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김견신·허항은 이미 포전(褒典)을 베풀었습니다만, 그들이 더욱 다시 공을 아뢰기를 기다려 마땅히 따로 별다른 상을 더 주어야 할 것입니다. 최신엽은 승장(乘障)의 임무로만 그 공에 답할 수 없으니, 특별히 한 자급을 더해 내금장(內禁將)에 의망하여 들이고, 최치륜 또한 자급을 더하여 임기 만료가 다된 영장(營將)에 자리를 만들어 의망하여 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장교와 군졸들은 청컨대 난이 평정되기를 기다려,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해 등급을 나누어 아뢰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동·북 양도(兩道)의 진정(賑政)이 다급함은 비록 양서(兩西)와 같은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이미 춘궁기의 민정(民情)이 지극히 걱정스럽고 고민이 됩니다. 별도로 십행(十行)의 은혜로운 사륜(絲綸)을 내리고 각각 위무 어사(慰撫御史)를 보내어 덕음(德音)을 선전(宣傳)해서 먼저 군정(群情)을 위로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48 집 6 면 【분류】 *군사(軍事) / *인사-관리(管理) / *변란-민란(民亂) / *인물(人物) [주D-001]순원(巡遠) : 안록산(安菉山)의 난 때,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수양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는 고사.
순조 12년 임신(1812, 가경 17) 1월 27일(신축)
평안 병사 박기풍이 여러 죄인을 압송했음을 아뢰다
평안 병사 박기풍(朴基豊)이 아뢰기를, “죄인 이장겸(李章謙)·전 선사포 첨사(宣沙浦僉使) 왕도항(王道恒)·전 신도 첨사(薪島僉使) 유재하(柳載河)·전 서림 첨사(西林僉使) 김인후(金仁厚)·전 동림 별장(東林別將) 이진열(李震說)·전 임해 별장(壬海別將) 김홍섭(金弘涉)을 선천부(宣川府)에서 잡아 보냈으므로, 이 장겸은 칼과 수갑을 채워 장교(將校)를 정해 위로 압송하고, 다섯 진장(鎭將)은 순영(巡營)으로 압송하여 엄하게 핵실(覈實)하고 감단하여 처리하는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보고하기를, ‘부(府)의 장교 최치륜(崔致倫)이 용천(龍川)의 위쉬(僞倅) 정성한(鄭聖翰)을, 부의 장교 최봉덕(崔奉德) 등이 선천의 적괴(賊魁) 최봉관(崔奉官)을 잡아 바치고, 부의 장교 최종일(崔宗一) 등이 서림(西林)의 위장(僞將) 김익명(金益明)을 또한 순영으로 압송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원전】 48 집 9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군사(軍事) / *변란-민란(民亂)
고전 국역 총서 (국조보감 제78권)
순조조 3 12년(임신, 1812)
(전략) ○ 허항을 우림위장에, 김견신을 선전관에, 최신엽(崔信燁)을 내금위장에, 최치륜(崔致倫)을 영장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는데, 최신엽과 최치륜은 의주부 장교로서 적을 토벌하는 데 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략)
그 외에 성해응(成海應)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중에(關西殉節諸臣傳),(姜仁鶴傳),(辛未記變),(出征軍捴)등에 원문 기시가 기록이 있으며, 정약용(丁若鏞)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중에 (淀水)에 원문 기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