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 문 ----- 충경공 사추(忠景公 思諏)의 배위가 경원군대부인 이씨(慶原郡大夫人 李氏)라고 하는데 혹 누구의 딸인지 알 수 있을까요? 당시 최고의 문벌이라 불러도 모자라지 않았을 해주 최씨, 인천 이씨 양 거대세가의 결합이었으니, 과연 누구의 딸이 그에게 출가했는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부디 기분 상하지는 마시고, 확인 두 어 가지 부탁 드릴게요. 현재 홈페이지의 파계도에서는 충경공 사추에게 우복야 원과 평장사 관, 주(湊) 3남과 이자겸, 문공미, 류인저에게 각각 출가한 딸 셋이 있다고 되어 있는데, 전해지는 충경공의 금석문에서는 원과 진(溱) 2남에 송염(宋琰), 이자겸, 문공미, 류인저에게 출가한 딸 넷이 있었다고 적혀 있네요. 어느 게 맞는지 알 수가 없네요. 또 몇 개의 금석문을 찾아보면, 정순공 관(靖順公 灌) - 경문공 홍윤(景文公 洪胤) - 순(淳) - 서(瑞)로 연결되는 세계는 맞는 듯 한데, 김륜(金倫)의 처 변한국대부인 최씨(卞韓國大夫人 崔氏)의 금석문에서 경문공이 문헌공 충(文憲公 冲)의 11세 손이라 했습니다.
막내 사위 인저 역시 류여(柳汝)의 자제라고 하는데, 전에 언뜻 듣기로는 명의태후의 아버지 류홍(柳洪)의 자제로, 명의태후의 오빠라고 했었던 것 같습니다.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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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쪽빛이라고 하신 분. 다음부터는 본문의 종친이시던 아니시던간에 본명을 꼭사용하여 주실것을 당부드리며 답글을 올려 드립니다. 귀하께서 요구하시는 답글이 될수 있었으면 합니다. 보학에 관심을 갖고 계신 귀하에게 감사의 말씀을 다시금 전합니다. 부디 하시는 사업 번창하시고, 가정에 화목 하시고, 강녕하시길 바랍니다.
대종회 중앙청장년회 회장 겸 청년국장 영림 영길 배상 ====================================================================
1. 충경공의 배위에 대한 기록은 아쉽게도 현재로서는 알수있는길이 없습니다.
2. 대종회 홈피와 묘지명의 기록은 다릅니다. 그래서 본 대종회에서는 수양열전을 발행하여 정정 한것입니다. 묘지명이 맞습니다.
3. 김륜의 처 변한국대부인 의 기록중에 경문공이 문헌공의 11대손이라고 했습니다. 라는 질문에 대하여서는 아래의 문헌으로 대신합니다.
박전지처 최씨 대령군부인최씨 묘지명에 부인은 중서령 문헌공충의 10대손이다. 하였습니다. 최서(崔瑞) 묘지명 을 보시면 장녀는 근시호군(近侍護軍)김륜(金倫)에게 시집 갔는데, 도첨의 참리 집현대학사 동수국사 상장군 문신공(都僉議 ?理 集賢大學士 同修國史 上將軍 文愼公) 김변(金?)의 아들로 행정 능력이 뛰어나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 박전지(朴全之)
시대 고려 후기 생졸년 1250 (고종 37) - 1325 (충숙왕 12) 본관 죽주(竹州) 성 박(朴) 호 행산(杏山) 시호 문광(文匡) 성별 남 연령 76 활동분야 문신/관료 / 재상 / 재상
박전지(朴全之)에 대하여
1250(고종 37)∼1325(충숙왕 12). 고려 후기의 재상. 본관은 죽주(竹州: 지금의 竹山). 호는 행산(杏山). 전법판서를 지낸 휘(暉)의 아들이다.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여 사국(史局)과 한림원의 벼슬을 지냈다.
1279년(충렬왕 5) 원나라 세조가 양반자제를 뽑아 입시하게 하자, 원나라에 들어가 그곳의 명사들과 사귀어 명성을 떨치고 원나라의 정동성도사(征東省都事)가 되었다.
귀국 후 이부와 병부의 시랑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안동부윤이 되었다. 재능이 인정되어 전중윤지제교(殿中尹知製敎)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세자(世子: 뒤의 충선왕)의 시강을 맡아 보도(輔導)함이 많았고, 세자가 원나라에 있을 때 고생을 꺼리지 않았다.
1298년 충선왕이 한때 즉위하여 사림원(詞林院)을 두었는데, 이때 최참(崔旵)·오한경(吳漢卿)·이진(李瑱) 등과 함께 사림원학사가 되어 전주(銓注: 인사행정)를 담당하였으며, 충선왕의 즉위교서를 제찬하였다. 뒤이어 삼사좌사사림학사 승지(三司左使詞林學士承旨)가 되었고 다시 밀직부사(密直副使)·중경유수(中京留守: 開城府判尹)가 되었다. 그해 충렬왕이 복위하자 무고로 파직되었다가 1307년 판비서시사 권수밀직부사(判秘書寺事權授密直副使)가 되었다.
1308년 충선왕이 복위하자 연흥군(延興君)에 봉하여졌으며, 1321년(충숙왕 8) 수첨의찬성사(守僉議贊成事)가 되어 치사(致仕)하였다. 이 무렵 심왕(瀋王)의 무리가 왕을 원나라에 무고하는 글에 서명을 강요하였으나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으며, 왕이 원나라에서 돌아오자 정승이 되어 치사하고 추성찬화공신(推誠贊化功臣)에 봉하여졌다.
그는 사람됨이 온화하고 자애스러웠으며 강직하였으나 결단성이 적었다.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김륜처 최씨 변한국 대부인 최씨 묘지명 에 대학자인 중서령 문헌공 충 의 11대 손이다. 에서 부인의 증조부이신 경문공의 대수가 아니라 변한국 대부인의 대수가 맞습니다.
위에 박전지 공 과 아래 김륜 공 의 기록을 참조 바랍니다. 두분의 차이는 1세대인 약 30년의 차이가 있는것을 확인하실수 있습니다.
김륜(金倫)
시대 고려 후기 생졸년 1277 (충렬왕 3) - 1348 (충목왕 4) 본관 언양(彦陽) 성 김(金) 자 무기(無己) 호 죽헌(竹軒) 시호 정렬(貞烈) 성별 남 연령 72 활동분야 문신/관료 / 문신-고려 / 문신
김륜(金倫)에 대하여
1277(충렬왕 3)∼1348(충목왕 4). 고려의 문신.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무기(無己), 호는 죽헌(竹軒). 아버지는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 변(賆)이다.
1290년(충렬왕 16)에 원나라의 반적(叛賊) 합단(哈丹)이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침범하자 가족이 강화로 피난하였는데, 14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지휘하는 것이 어른과 같았다. 음보(蔭補)로 노부판관(鹵簿判官)이 되었다가 신호위장군(神虎衛將軍)이 되었으며, 홍자번(洪子潘)의 천거로 변정도감부사(辨正都監副使)를 거쳐서, 감찰시승(監察侍丞)이 되어 소송사건을 신속하고 공정하게 처리하였다. 내신(內臣)을 강력하게 탄핵하다가 주관(州官)으로 좌천되었는데, 이때 궁실과 불사를 수리함에 있어서 사자(使者)가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징발하였으나, 그가 다스리는 주(州)에는 감히 들어가지 못하여 주민(州民)들이 편안히 지내게 되었다. 일찍이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시종했고, 심왕(瀋王) 고(暠)를 고려왕으로 세우려는 무리들의 연판장에 서명을 거절하기도 하였다. 경상·전라도도순문사(慶尙全羅道都巡問使)가 되어 합포(合浦: 馬山)에 진수하자 호령이 엄명하고 이민(吏民)을 편안하게 했으며, 뒤에 첨의평리(僉議評理)·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1339년(충숙왕 복위 8) 조적(曺頔)의 난에 연루된 죄인을 다스림에 있어서 “그들은 조적에게 속았을 따름이니, 어찌 족히 책하리오.”라 하고 고문을 하지 않고 관용으로 다스려 죄인들이 감복하여 죄상을 숨김없이 자백하게 하였다.
한편, 원나라의 승상 빠이옌(伯顔)이 반역자인 조적을 두둔하여 충혜왕을 소환하자, 왕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간명하게 사리를 밝혀 왕에 대한 의혹을 풀게 하였으며, 그때 나이 육십을 지났으므로 원나라의 관리들로부터 백수재상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충혜왕이 원나라에서 돌아와 벽상일등공신(壁上一等功臣)에 추성찬리공신언양군(推誠贊理功臣彦陽君)에 봉해졌으며 그 부모와 처자에게도 관작과 토지·노비가 하사되었다.
1343년에 충혜왕이 정동성(征東省)에서 원나라의 사신 고용보(高龍普)·타치(朶赤) 등에게 변을 당하고 다시 원에 잡혀가자 왕을 구출하려고 이제현(李齊賢)으로 하여금 원나라에 보내는 상소장을 쓰게 하였으나, 대신들이 원나라 황제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하여 서명을 하지 않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 사실을 분하게 여겼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찬성사로 승진되고 뒤에 좌정승에 올랐다.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자 부원군에 봉해지고 공신의 호에 보리(補理)가 더 가해졌다. 1348년에 강윤충(康允忠)의 죄상을 들어 탄핵하였으며, 그해 충혜왕의 시호를 청하러 원나라에 가려고 하다가 풍질을 얻어 죽었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 4. 유인저 공 의 부친에 대한 기록은 지적하신대로 맞는 것으로 문헌이 있습니다. 아래의 기록을 참조 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유인저(柳仁著)
시대 고려 중기 생졸년 ? - 1113 (예종 8) 본관 정주(貞州) 성 유(柳) 시호 정간(貞簡) 성별 남 활동분야 문신/관료 / 관료 / 관인
유인저(柳仁著)에 대하여
?∼1113(예종 8). 고려의 관인. 본관은 정주(貞州: 지금의 海豊). 문하시중 홍(洪)의 아들이다. 숙종의 비(妃) 명의태후(明懿太后)의 오빠이며, 이자겸(李資謙)·문공미(文公美)와 함께 최사추(崔思諏)의 사위였다. 음서(蔭敍)로 관직에 나아가 위위주부(衛尉注簿)가 되었다.
1106년(예종 1) 왕이 가창루(嘉昌樓)에 거둥하여 시를 짓고 신하들에게 화답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허경(許慶) 등과 함께 시신(侍臣)으로서 시를 지어 올렸다. 이해 문하시중 위계정(魏繼廷)이 사퇴시켜 줄 것을 요청하자, 왕명을 받아 집에가 철회하도록 설득하였다.
1108년 과거에 합격한 뒤,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올랐다. 1109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있으면서, 여진족을 정벌하러 가기 전에 문하시중 윤관(尹瓘)과 함께 창릉(昌陵)에 나아가 제사를 올리고, 전쟁에 이기게 하여달라고 기원하였다. 이해 전중감 지추밀원사(殿中監知樞密院事)에 임명되었다.
1111년 병부상서 수사공(兵部尙書守司空), 1112년 참지정사 상서좌복야 판상서형부사(參知政事尙書左僕射判尙書刑部事)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113년에 죽으니 왕이 친히 글을 지어 조문하고, 수사도 문하시랑평장사(守司徒門下侍郞平章事)를 추증하였다.
권문(權門)의 출신으로 여러 친구들과 사귀며 공부를 해서 과거에 합격한 뒤 관직이 재상의 지위에까지 올랐지만, 성격이 남에게 교만하지 않아 유자(儒者)의 풍도가 있다는 칭송을 받았다.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