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 호는 월송이며 태어난 해는 밝혀지지 않았다. 경주지씨 시조 대학자 문성공 지원부의 손자이다.공은 생존연대는 1270~1280년대 사이에 태어났나고 합니다. 또 어떤기록 1300년대에 태어났다고 하지만 이것 잘못된 기록입니다.
공은 충의공 지용도의 동생이며 청백리 최만리의 외조부이다. 공은 지원부이며 매제인 성여완(1309~1397)의 조부 성공필이다. 1314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충목왕때 현응직에 보임되시고 공민왕 때 안우등을 따라 옹건적을 쳐서 서울을 수복하였으므로 일등공신에 오르셨다. 이어서 판적객시사를 제수하고 전공판서로 옮기고 규의선력공신(揆義宣力功臣)의 호를 받았다.
전객시는 뒤에 예빈사로 바뀌었는데 나라의 손님이나 왕족, 재상에게 대접하는 연화, 궁중의 제사 드을 관장하는 관청으로 판사는 이의 가장 으뜸벼슬로서 당시에 정삼펌의 서열로 보하였다. 전공판서도 인조의 공종판서에 해당되는 벼슬로 오늘날의 장관급이며 공신의 호는 그때그때 공적에 따라 뜻을 붙여 이름을 삼았다.
공민왕1년에 홍건적을 피하여 경북 안동으로 옮겼던 왕의 일행이 난이 편정된뒤 환도하던중에 개경남족의 흥왕사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근신 김용이 원나라에 머무르던 최유등과 내응하여 행궁을 침범하였는데 왕이 몸을 피하여 실패하더니 최유가 다시 워나라 순제의 왕후가 되었던 기씨들 달래어 순제를 움직여 공민왕을 폐하고 당시 원나라에 가있던 충숙왕의 아우 덕흥군을 옹립하려고 요양의 군사를 몰아 국경을 침범하였는데 충무공 지용수꼐서 최영, 이성계 등과 더불어 이를 물리쳤으므로 다시 추성규의선력공신(推誠揆義宣力功臣)의 호를 추가하여 받고 동지밀직사사에 오르셨다. 그뒤로 첨의평리, 지문찬성사를 지내시더니 이어서 서북면상원수겸평양윤이 되었다.
공민왕 18년에는 원나라가 중국에 새로 일어난 명나라에 쫓기어 개평으로 옮긴 뒤 원나라 평장이란 벼슬로 있던 고려인 기새인첩목아란 자가 지금의 만주땅 개원에 동녕부를 설치하고 본국을 침범하려함으로 공민왕이 옛 고구려땅 요동을 회복하려는 야망으로 이들을 친다는 명목을 붙여 이성계를 동북면원수로 충무공 지용수를 서북면상원수로 삼아 군사를 일으켰다. 시중 이인임이 도통사가 되어 안주에 진을 치게하고 만호 정원비, 최혁성, 김용진 등으로 압록강에 부교를 만들게 하니 말서너필이 함꼐 건설수 있는 정도였다. 원수들이하 모든 장졸들이 차례로 건너는데 사흘이 걸렸는데 그날밤에 뇌성벽력이 치고 큰비가 내리는 모두 심히 의아하며 두려워 하거늘 병마사 이구가 말하기를
""길한 징조인데 무엇을 두려워 하는가"" 모든 장수들이 영문을 몰라하므로 이구가 다시 말하기를
""용이 움직이면 반드시 뇌성벽력이 있기 만련인데 지금의 지용수께서는 그 이름이 용(龍)자이니 강을 건너는 날 뇌성벽력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로 이것은 싸움에 이길 징조다.""하니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군사를 내몰아 요성에 까지 이르러 반역군들은 처부수고 주민들을 설득하여 편안히 살게하고 돌아오는데 충무공 지용수꼐서는 반드시 추격군이 있을 것을 미리 짐작하고 뒷편 경계를 엄히 하였더니 과연 며칠 뒤에 적장이 추격해오다가 우리군사의 방비가 엄한 것을 보고 그 놀라운 작전과 경비에 넛을 잃고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개선하여 귀국한 뒤 다시 일등공신에 올라 정일품 광정대부((匡靖大夫)로 문하시중찬성사겸 평장사가 되시었으며 왕이하 여러 대신들도 하늘이 내린 최고의 명장(名將)이라 극구 찬양하였다.
돌아가신 년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우왕 때로 추측되며 시호는 충무공(忠武公)으로 내려졌다.
시호란 나라에 공이 큰 대신들이 죽고난 뒤 왕이 내리는 호로써 당시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으며 그 가운데서도 충(忠)자나 문(文)자가 든 것은 으뜸으로 삼았다.
묘는 경기도 양주군 충덕면 풍양리 천도봉에 있고 충무(忠武)의 광주 병천사(秉天祠), 해주(麗水)의 충민사(忠愍祠), 개성의 현충사(顯忠祠)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지충무공전서(池忠武公全書)》가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충무공 지용수의 외손자 최만리
최만리(崔萬理) 1380?∼1445(세종 27).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명(子明),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 고려시대 해동공자로 불리던 최충(崔冲)의 12대손이며 하(荷)의 아들이며 고려시대 명장 충무공 지용수으 외손자이다. 1419년(세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그 이듬해 집현전박사로 임명되었다. 그뒤 집현전학사를 거쳐 그 실무책임자인 부제학에까지 올랐다. 개괄적인 관력을 보면, 1427년 3월 교리로서 문과중시에 급제하였고, 그해 7월에 응교에 올랐으며, 1437년 직제학, 1438년 부제학, 1439년 강원도관찰사, 1440년 집현전부제학으로 복귀하였다. 그뒤 1444년에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반대 상소문제로 즉일 친국을 받고 다음날 석방, 복직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부정과 타협을 모르는 깨끗한 관원으로서 일관하였으며 진퇴가 뚜렷하였다. 그는 집현전의 실무책임자인 부제학으로서 14차에 걸쳐 상소를 올렸다. 그 중 불교배척 상소가 6회, 첨사원(詹事院) 설치 반대상소가 3회로서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밖에 일본과의 교역에서 석류황(石硫黃)의 대가를 지나치게 후하게 지불한 것에 대한 책임추궁, 진사시에서 시(詩)의 출제법이 잘못됨을 지적한 것, 그리고 이적(李迹)의 사형 결정이 모호하다고 감형을 주장한 것과 사직상소 및 한글반대상소가 있다. 불교배척 상소의 대부분은 흥천사(興天寺)의 사리각 중수 및 경찬회(慶讚會)의 혁파를 청하는 것이었고, 첨사원 설치를 반대한 상소는 세종이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에게 섭정시키려 하므로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이었다. 그는 훈민정음이 완성될 때까지 세종의 뜻을 잘 받들어 반대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세종은 훈민정음을 완성하고 비밀리에 궁중의 의사청(議事廳)에 최항(崔恒) 이하 집현전 소장학사와 동궁·진평대군(晋平大君) 등을 참가시켜 원나라의 웅충(熊忠)이 엮은 《고금운회거요 古今韻會擧要》의 자음을 한글로 달아 일대 자음의 개변운동을 하려 하였다. 세종은 당시 우리나라의 한자음이 체계없이 사용되는 것이어서 어느 정도 중국체계에 맞도록 새 운서를 편찬하여 당시 한자음을 개혁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에 그는 집현전의 중진학자들과 함께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것이 유명한 한글 반대 상소문이었다. 이 상소문은 여러 학사의 합작으로 보이며, 조목에 따라서는 한글창제의 불필요성, 한글의 무용론을 주장한 것으로 사대주의적 성향이 짙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진의는 세종의 한자음 개혁에 반대한 것이 된다. 즉, 세종의 최만리에 대한 친국내용을 보면, “내가 만일 이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을 것이냐.”라고 한 것을 보면 최만리 등의 상소는 《고금운회거요》의 번역사업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고금운회거요》의 번역사업은 뒤에 《동국정운》의 사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중국에서 《홍무정운 洪武正韻》이 실패작임과 같이 우리의 《동국정운》도 그 한자음이 실시될 수 없어 실패작이라 한다면, 그의 《고금운회거요》 번역사업의 반대상소 견해는 그러한 의미에서 정당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소문의 내용이 사대주의라고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당시 지배층이 일반적으로 사대주의적 경향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그에 대한 평가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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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지씨 유래 지씨(池氏)는 조선씨족통보」 에는 지씨의 본관을 89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관향은 충주, 울진, 경주, 청주, 단양, 광주 6본으로 전한다. 그들은 아직 정확한 문헌이 없기 때문에 고증하기가 어렵다
각각 울진지씨, 경주지씨, 충주지씨, 청주지씨, 단양지씨, 광주지씨 대종회을 따로 함
경주지씨의 유래
시조 문성공 지원부이며 중시조 충의공 지용도이다. 문성공 지원부의 사위인 정숙은 해주정씨 시조이다. 경주지씨는 충주지씨에서 갈려져 왔으며 설과 또다른 지씨성을 중국에서 귀화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시조 문성공 지원부는 충주지씨 시조 지경의 후손인지 정확한 문헌 없어 고증하기가 어렵다.
공은 서북면(西北面) 상원수(上元帥)로 거제(巨濟) 고성(固城)에 처들어온 왜적(倭賊)을 격퇴하고 1356년 금병(金兵)의 침입을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나아가 크게 격파하였다. 공민왕 7년에 내사시 문하평장사(內史寺 門下平章事)겸 이부랑 판혜덕부사(吏部郞 判惠德府事)가 되었고, 1364년 역적 최유(崔濡)가 요동으로부터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 의주(義州)를 포위하니 아우 충무공(忠武公) 지용수(池龍壽)와 함께 나아가 물리쳤으며 경주부원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경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문과급제자 1명을 배출했다.
충의공 지용도의 6세손 세조(世祖) 때 충청절제사(忠淸節制使)로 단종(端宗)을 복위하려다 화(禍)를 입은 지정이다. 지정은 본래 이름은 지봉원이며 우의정 정분의 생질이다. 공은 1444년(세종 26) 삼군진무(三軍鎭撫)로서 경상도선위관에 차견(差遣)되어 왜구의 침입으로 소란된 민심을 무마시켰다. 그뒤 1448년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로 파견되었고, 1450년(문종 즉위년)에 입조하여 특지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발탁되었고, 다음해 첨지중추부사가 되면서 정평도호부사(定平都護府使)를 겸직하였다. 1453년(단종 1) 충청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어 부임을 기다리던 중, 계유정난이 일어나면서 수양대군(首陽大君)일파에 의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반역을 도모하였다.”고 논죄되어 전라도 영암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그해 조수량(趙遂良)·안완경(安完慶)·이양(李穰)·민신(閔伸) 등과 함께 교살되었다.
그 외에도 한말(韓末)의 의병장(義兵將) 지홍문(池弘文)은 1907년 군대 해산령이 내리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강화갑곶(江華甲串)에서 일본군 1개 중대(中隊)를 격멸했으며, 만주(滿洲) 대학살 때 순국(殉國)한 지하영(池霞榮)과 함께 경주지씨(慶州池氏) 가문을 더욱 빛냈다. 경주지씨 인구수는 1만3000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