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2008년도)에 사상 최대의 인원(406명)동원으로 중앙청장년 하계수련회를 마친 문경종친들의 집성촌에 대한 소개가 지금으로부터 15년전 당시 대종회 사무국장님으로 봉직하셨던 형식 현 대종회 자문위원께서 당시에 대종회 임원 연수를 다녀오셔서 쓰신 문경시 영순면 포내리에 대한 소개가 종지 제 3권 245쪽에 수록 되어있기에 발췌하여 본 자유게시판에 올려본다.
대종회 임원 연수와 집성촌 탐방기 (1994년 10월 29~30일)
형식(瀅植)당시 대종회 사무국장
一, 대종회 발전과 임원 연수
훌륭한 선조가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해도 후손들이 그 유지(遺志)를 받들지 못하면 근원(根源)은 있으나 흐름이 없고 뿌리는 있으나 잎이 실하지 못한것과 다를바 없다 하겠으니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천년의 뿌리를 내린 해주최씨가 앞으로 자손만대(子孫萬代) 더 큰 번영과 명성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장학(獎學),육영(育英)에 힘쓰고 전통윤리 도덕을 함양하여 선조의 훈업(勳業)을 선양(宣揚)하는것이 오늘에 사는 후손들이 할 일이기에 이중요한 일을 담당한 조직이 바로 대종회(大宗會)라 생각한다.(중략)
二, 집성촌 문경시 영순면 포내리 탐방기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을 믿지 않는사람도 경관(景觀) 좋은 마을을 보면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행복할것이라고 생각이 들게 되고 방향이 좋고 전망좋은 묘소를 보면 그곳의 영혼은 고이 잠들어 자손에게 복을 내리겠다는 생각이 드는것이 보통사람들의 마음이라 할 수 있으니 포내마을에 도착하면서 느낀 소감이 바로 이것이었다. 마을 뒤에는 기산(箕山)이 둘러 싸있고, 앞에는 넓은 평야에 마을을 감싸 굽이쳐 흐르는 강물이 마치 중국고사에 나오는 기산영수(箕山潁水)를 연상케하는 그림같은 아늑한 마을로 자손만대 기리 순성하라고 영순포내리라 이름한 최씨 마을 이었다.
부지깽이도 바쁘다는 가을걷이의 농번기임에도 불구하고, 남녀노소 많은 종친들이 연로한 어른들께서는 두루마기로 의관을 갖추시고, 청장년들은 정장을 하고, 동구밖까지 마중을 나와 정중히 맞아 주었고 접대장소인 마을회관에 당도한 일행은 전통예절(傳統禮節)로 상면인사를 나눈후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 덕담과 문중사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사이 종부님들께서는 정성들여 음식을 마련하여 극진하게 대접하였다.
감동어린 대접을 받은 일행은 안내를 맡은 당시중학교 교장선생이신 병식(昞植)종친으로부터 각종 사료를 통하여 유적과 관련된 조상에 대하여 설명을 들었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전 문헌공 후손 19世 諱 업(業)공은 진사공(進士公)諱 垠 파조의 5世孫으로 경북영주에서 이곳으로 이거 하여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마을 뒷산 언덕에 아담하게 세워진 추원재(追遠齋)는 수호신처럼 마을 전체를 굽어 내려다 보고있는데 이추원재는 22세인 계산공(諱:宗壁(종벽),號:桂山(계산)의 유덕을 기리고, 자손들에게 숭조사상을 심어주며 또한 그들의 화합의 장으로 삼게 하기 위하여 1922년 후손이신 기호(基鎬)종친,열호(烈鎬)종친,고부(高溥)종친등이 동네자손들의 뜻을 모아 건립하여 지금까지 문중의 대소 행사와 친목과 화합의 자리로 이용되어 오고 있다고 하였다.
계산공(1649~1719)은 성품이 온후하며, 학덕을 겸비한 인물로 특히 덕을 많이 쌓았는데 그유덕을 높이 평가 하여 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로 증직된 포내문중의 훌륭한 조상으로 묘비문에 기록 되어있다. 그리고 추원재 옆 서북간 산 언덕위에는 앙소정(仰巢亭)이란 정자가 있어 마을 경관괴 위풍을 한층 돋보이게 하는데 기호(基鎬:도식 부간사장의 조부)종친이 생전시 1964년 3월에 선친(諱:瓚(찬), 號:春海(춘해)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앙소정은 중국고사에 나오는 요(堯)임금시대에 기산영수의 그 유명한 은사소부(隱士巢父)와 허유(許由)의 청렴함을 비유한 즉 소부를 높이 우러러본다는 뜻을 담아 선친을 추모하며, 이름 붙였다고 한다.
또한 앙소정 앞뜰에는 28世 춘해공의 애국지사 추모비가 우뚝 서서 일행의 옷깃을 여미게 하여 숙연한 마음을 갖게 했는데 이 비(碑)로 말미암아 포내리 종친들은 보다 긍지를 갖고 참된삶을 영위하리라 믿어졌고, 과거 암울했던 숫한 고난의 민족사를 이 추모비에서도 말해주고 있다. 사료에 의하면 춘해(春海)公은 조선조말 의병대장인 이운강(李雲岡)휘하에서 왜병과 수많은 접전을 겪으며, 많은 전공을 세웠고, 의병대장이 순국후에는 의병들이 분산되자 재기를 기약하고, 이곳 향리로 돌아와서 기회를 엿보며, 은거 두문불출하고, 서당훈장으로 전전하며 궁핍한 생활속에서도 초지일관 항일투사로 일생을 마쳤는데 광복후에 정부로부터 사증손(嗣曾孫)인 도식종친에게 공의 건국훈장 애족장(建國勳章 愛族章)이 수여되고, 추모비 건립에 국가 보조금이 지원되었다고 한다.
애국지사(愛國志士)인 春海公의 증손인 도식(道植)종친은 일찍이 조부모의 숭조애족(崇祖愛族)정신을 이어받아 대종회 창립 당시부터 공직의 몸으로 종사에 참여하여 현재 대종회 임원인 부간사장과 진사공파 상임고문으로 봉사하고 있으며, 이곳 포내리 출신인 대종회 운영위원인 학구(鶴九)종친도 영남지회 부회장 이며, 문경종친회장으로써 종사에 선조의 대를 이어 열의를 갖고 활동하고 있으니 훌륭한 조상이 있기에 그유지를 받드는 후손이 있고, 그후손이 많을수록 가문은 계속 번영하게 된다는 것을 포내리를 통하여 알수 있었고, 포내마을을 중심으로 150여 세대가 집성촌을 이루고 화목하게 생활하고 있다고 하니 입향조의 유덕을 가히 짐작할만 하였다.
짧은 시간의 종친들과의 만남이었지만 관포지교(管鮑之交)와 같이 헤어지기가 아쉬웠으니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진리와 억겁(億劫)의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것이 한핏줄의 인연(因緣)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작별인사를 나눈뒤 1박 2일간의 연수를 마치고 귀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