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은 생원공 (諱)塘의 손자이시며,아버지는 생원(生員) 숙경(淑景)이시다. 공이 경기도 안성 불지촌을 떠나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수월리에 자리를 잡으시니 이곳에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다. 배위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이시며, 묘소는 예천군 지보면 수월리 진봉산(陳峰山) 손좌(巽坐:)에 합봉이며 표석이 있다.
19世 (諱)취명(就明) 선조9년(1576,丙子)~ 공의 자는 일중(日中),아호(雅號)는 한오(閒吾)이시다. 입향조 곤(滾)의 손자이며,생원공 파조이신 (諱)당(塘) 의 현손이시다. 배위는 안동 권씨 처기의 따님이시다. 묘소는 경북 예천군 지보면 수월리 진봉산 병좌(丙坐:)에 쌍봉으로 있으며, 표석이 있다. 한오공의 12세손 두영(斗榮)등 제족이 집성촌인 수월리에 정자를 지어 현판을 한오정이라 지어 공을 추모하니 그유래는 아래와 같다.
☞ 한오정(閒吾亭) 한오정기(閒吾亭記) 경북 예천군청 지보면 수월리 평지마을은 해주최씨가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조선조 선조대왕 25년(1592,壬辰)에 섬나라 (일본)괴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명나라를 토벌할려고 하니 조선은 길을 내달라는 구실로 이리떼 같은 짐승의 야욕으로 육해병력 수십만명을 일으켜 삼천리 강토를 유린하니 무릇 가슴에 적개심이 불타는 혈기 있는 사람은 보국에 정진하지 않는이가 없었다. 이때를 당하여 최공 취명이 나이 17세로 전선에 나아가 죽을뜻을 품었으나, 병환으로 활동이 어려운 모친곁을 잠시도 떠날 수 없어 모친을 업고 피란길을 올라야 했다. 피란도중 왜적과 마주쳐 몸을 숨겨 위험을 모면하는 험난함을 겪으면서도 밥지을 나무를 해야하고, 열매를 주워 모친을 봉양하고, 헐벗은 몸으로 품팔이를 하면서 적이 물러간 뒤 까지 8년동안 몸과 마음을 다하여 극진히 봉양하니 이는 중국의 漢나라 의 강혁(江革,자는 차옹 임치인이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봉양하던중 천하에 난리를 만나 노모를 업고 피난하여 도적을 무찔러 평정하고, 母子가 모두 온전함을 얻는 충효에 힘을 다한 名士) 같은 사람도 더 할수 없는 일로써 주자가 쓴 소학 편말에 등재 되지못한 것이 한이 되지만 이러한것이 공에게 있어 무엇이 그리 대단한 일이겠는가? 이제 공이 선조들의 세상을 되돌아보니 고려조로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혁혁한 족벌로 명망이 높고 대대로 닦은 훌륭한 덕행이 족보에 끊임없이 기록 되어 있도다. 공의 대(代)에 이르러 사친(四親)이상은 가난하면서도, 도(道)를 즐기기를 안표(顔飄)와 원도(原堵)같이 처세하여 학문에 헌신하고, 도의를 몸소 실천하여 탁파를 쳐서 청파를 일게 하니 마치 냇물이 쌓이고, 교악이 높이 솟고, 옥이 빛나고, 얼음이 맑은것 같아 이것이 존귀해서 더욱 빛이 나고, 천지가 열악해도 스스로 극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근본(根本)이 세워져 도(道)가 생기고, 선(善)을 행하여 세속을 순화 하니 아는 자는 이를따르고 착한자는 이에 부지하여 창암(蒼菴)이윤수(李潤壽)같은이는 유문충공(柳文忠公:유성룡)의 매서(妹婿)라 , 그도의로 상교(相交)하고, 시문으로 왕래한 자 반드시 그흔적이 남아있을 터인데 병화(兵火)의 변으로 참고할만한것이 전무하니 이것이 후손들의 숨은 아품이요, 역사가의 통한이니 그 기송무징(杞宋無徵)을 어찌 하겠는가? 이에 공의 13세손 두영(斗榮)이 재운(在運), 재후(在厚), 재주(在柱), 신영(信榮). 병영(炳榮)등 제족과 더불어 공께서 덕과 명성이 끼친곳에 정자를 지어 현판을 한오정(閒吾亭)이라 한것은 선조님의 아름답고 위대한 삶을 숭모(崇慕)하기 위함이다. ☞시제 향사일은 매년 양력 11월 둘째주 일요일이다. ※생원공파 예천종회 회장: 영수(永秀: 현 부제학공 후손종회 회장) ~~~~~~~~~~~~~~~~~~~~~~~~~~~~~~~~~~~~~~~~~~~~~~~ 2, 경북 문경시 영순면 포내동 [진사공파 종회]
입향조(入鄕祖) 19世 (諱) 業
공의 자는 계조(繼祚)요, 부친은 (諱)충손(忠遜)이시며, 진사공(進士公) (諱)은(垠)의 현손이시다. 공은 자손이 귀(貴)하게 되므로 증 가선대부(贈 嘉善大夫)가 되었다. 천성이 온유돈후(溫柔敦厚)하고, 근검독행(勤儉篤行)하며, 재예(才藝)에 총명하였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조상을 받들고 가사에 진력하며, 정성으로 어머니께 효도하였으나, 어린나이에 자수성가는 어려웠다. 조부(重錫,증이조판서 (諱)숙손(淑孫)공의아들)공과 부친(諱)충손(忠遜)의 묘를 생존시 살던 경북 영주 땅에 두고 어머니 전주이씨를 따라 문경 포내동(聞慶 浦內洞)으로 이주함으로써 후손들의 입향조가 되시었다.
그리고 영주땅의 선산(先山)과 위토는 4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대를 이은 산지기에게 관리를 맡기고 있다. 공의 묘소는 문경시 영순면 진목동 뒷산에 해좌(亥坐:)로 모셨다. 배위는 청주 한씨이시고, 묘는 산양면 사동(山陽面 蛇洞)乙坐이다. 슬하에 외아들인 진사(進士)구흠(龜欽)이 있다. 손자(孫子)로는 시영(時永)과 증 통정대부 좌승지(左承旨)재영(再永)등 3형제가 있으며, 증손에는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종벽(宗壁)과 고묘(고묘)에 여막살이 3년을 마치고, 시칭(時稱) 효자(孝子)로 알려진 종의(宗義) 등이 있어 후대에 이르러 가세가 성하게 되었다.
☞ 추원재(追遠齋) 추원재는 문경시 영순면 포내동에 진사공(諱)은(垠) 선조님의 후손들이 세운 우모소(寓慕所)로 입향조(入鄕祖)이신 (諱)업(業)선조님 의 증손인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贈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諱) 종벽(宗壁)조의 추모행사를 위한 재실이다. 국권을 빼앗긴 20세기 초에 선조마저 잃을것을 염려하여, 一 門이 힘을 모아 주변의 뫼 봉우리가 굽어 공읍(拱揖)하고, 장강(長江)이 일대를 굽이치는 이마을 언덕에 방2칸 퇴1칸을 지은것이 1922년(壬戌)이고 해마다 원근(遠近)의 자손들은 이곳에 모여 세찬(歲饌)을 올린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여러차례 보수와 중건을 해 오던중 2005년(乙酉)에는 입향 400주년을 기념하여 마을 입구에 해주최씨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마을임을 기념하는 해주최씨 세거지지비(海州崔氏 世居之地碑)를 세웠다.
☞ 암촌재(庵村齋) 앙소정(仰巢亭) 암촌재는 문경시 영순면 포내동 암촌리 에 있는 문헌공(휘)충 선생의 25세손이요, 부제학 (諱)萬理 公의 12世孫인 범순(範淳)조를 기리기 위한 재실(齋室)이다.
후손들의 오랜 숙원에 따라 사현손(嗣玄孫) 기호(基鎬)공이 암자리(庵子里)에 있는 선고(先考)의 앙소정(仰巢亭) 일부를 “암촌재”로 사용하기로 하고, 매년 제향을 올릴때에 사용되고 있다. ☞ 제향일은 매년 음력 10월 13일 이다. ※진사공파 문경종회 회장: 인식(仁植) 총무: 장호
3, 충북 제천시 모산동 [집의공파 종회]
집의공 파조(執義公 派祖) (諱) 승순(承順) 公의 설단
파조 집의공(執義公)을 기리는 신도비가 광해군5년(1613,癸亥)에 평북 영변군 남송면 천수리(南松面 天水里) 형제봉에 건립되었는데 1950년 에 한반도(韓半島)가 남북으로 분단 되고 왕래가 차단되어 북한땅에 있는 묘소에 참배(參拜)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남쪽의 후손들과 월남한 후손 창훈, 정완, 병식의 세분들께서 뜻을 모아 1974년 4월10일에 파조이신(諱)승순 공의 신도비(神道碑)를 충북 제천의 묘향동산(妙香東山)에 새로 건립하고, 단(壇)을 모아 해마다 제사를 올린다. ☞ 시제 향사일은 매년 양력 5월 셋째주 일요일이다. ※집의공파 제천종회 회장: 병기(秉基) 총무: 병각 ~~~~~~~~~~~~~~~~~~~~~~~~~~~~~~~~~~~~~~~~~~~~~~~~~~~~~~~~ 4, 충북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 최성미 마을 [전한공파 성산종회]
입향조(入鄕祖) 19世 (諱) 유창(裕昌)
공(公)은 중종36년(1541,辛丑)3월20일 생이시며, 공의 나이 52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남에 가솔들을 데리고 충북 음성군 대소면 금왕리로 은거(隱居) 하신후 광해군5년(1613,癸丑)10월 20일 壽73歲에 졸하시고, 그 손자(孫子)인 (諱)운(澐)이 관직에 나아가 가선대부(嘉善大夫:문관의 종2품의 관계)가 되었으며, 증손(曾孫)인 (諱)득길(得吉)은 통덕랑(通德郞:정오품 상(上) 문관의 품계)를 지내셨으며, 고손(高孫)인 (諱)유의(裕義)는 절위장군 행부호군(折衛將軍 行 副護軍:종4품)을 지냈으며 그후로 후손들이 현달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왔으며, 언제부터인가 마을 이름도 해주최씨 후손들이 대대로 세거 한다. 하여서 최성미(崔城美)마을이라 불리고 있다.
공의 묘소는 충북 음성군 대소면 금왕읍 삼봉리 감자동 해좌이며 표석이 있다. 배위는 순천박씨 합봉이다. ☞ 숭모재(崇慕齋) 숭모재는 충북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 1구 최성미 마을 에 소재하고 있으며, 19世이신 (諱)유창 (裕昌)선조님과 아드님이신 20世 (諱) 윤기(允起) 선조님과 그의 아드님이신 21世 (諱)운(澐) 선조님,등의 높은덕과 치적을 기리기 위함과 후손들의 숭조상문 정신을 대대손손 이어가기 위하여 당시에 회장인 준섭 종친과 총무로 봉직하던 재두 종친등과 외지에 나가계신 많은 종친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992년 4월 7일 시작하여 동년 9월 11일 완공 하였으며, 성산종회는 (諱)유창(裕昌)선조님께서 이곳에 안착 하신지 15대를 살아오면서 한때는 많은 종친들이 살았으나 현재에 와서는 20가구에 불과하다. ☞ 향사일은 매년 음력 10월 두 번째 일요일이다. ※전한공파 성산 종회 회장: 욱섭(旭燮) 총무: 재근 ======================================================================== 5, 충북 청원군 미원면 종암리 [전한공파 분령종회]
입향조(入鄕祖)
24世 (諱) 상일(尙逸) 숙종대에 이르러 상호 비판을 전제로 100년 가까이 공존하던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점점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경신환국(庚申換局), 기사환국(己巳換局), 갑술환국(甲戌換局)등 세 차례에 걸친 환국의 와중에 남인과 서인은 서로를 숙청하고 정치적으로 제거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경신환국을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가 기사환국으로 실각한 서인은 이 과정에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과 윤증, 박세채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으로 나뉘었다. 노론과 소론은 경술환국을 통해 복권하면서 남인을 완전히 제거하였고, 이후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영조 즉위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당쟁이 치열해질수록 숙종은 성군이 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백성들도 살기 편했다. 왜냐하면 정적이 건재하여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정치인들은 부패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조는 즉위하던 해(1724년) 당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탕평책(蕩平策)을 폈다. 영조 즉위 초에는 소론이 득세 하였으나, 얼마후 영조는 김일경,목호룡 등이 노론의 4대신을 역모로 몰아 죽였다 하여, 김일경, 목호룡 두사람을 죽이는 한편 소론의 4대신도 내쫒았다. 이후 영조는 노론과 소론 사이의 화해를 유도하고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겠다고 선언해 이전까지의 격렬한 당쟁은 영조대에 이르러 사라졌다. 그러나 오랫동안 뿌리를 박은 당쟁이 그렇게 쉽사리 없어질수는 없었고, 양상이 달라진 것 이었다.
앞서 소론파의 김일경,목호룡을 죽인데 불만을 품은 소론들은 영조 4년에 이인좌,김일경의 아들 김영해,정희량등이 주동이되어 동지를 규합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의 혈손인 밀풍군(密豊君)을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영조4년(1728:戊申)3월15일에 이인좌는 청주에 그들의 무리를 집결시켜 청주성을 습격하였다. 이인좌의 군대는 힘안들이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진천,죽산을 거쳐 한양을 향해 진격을 하였던 것이다. 이때 때마침 양성에 은거하고 있던 소론의 원로 최규서가 이같은 사실을 고변하여 조정에 알려 왔다,
영조는 병조판서(兵曹判書) 오명항(吳命恒), 중군 박찬신(朴纘新), 종사관 박문수(朴文秀), 조현명(趙顯命) 등을 보내서 토벌토록 하니 이들 관군은 안성(죽산)에서 이인좌의 무리를 토벌하는데 성공하였다.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당쟁의 표면적 안정에 중점을 두고 능력에 관계없이 양쪽을 고르게 등용한 영조와는 달리, 정조는 비교적 안정된 정국을 바탕으로 능력에 따라 사람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붕당 간의 당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정조의 정책에 찬성하는 시파(時派)와 반대하는 벽파(僻派)로 새로운 당파를 형성하여 당쟁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탕파싸움이 최절정에 이르던 시기이니 만큼 (諱)尙逸 진사공의 5촌 당숙이신 간재공 (諱)奎瑞 선조님께서 그 아드님들에게 “문집이나 글문을 남기지 말아라”하신 말씀에 많은 영향이 있었을 것이며, 어수선한 정계의 상황으로 인한 시기에 진사시에 합격하신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첩첩 산골로 이주하신것 같다. 그리고 이당시를 전후하여 우리해주최씨 전한공파 일부의 일족은 역적으로 몰려 양성에서 장호원, 이천, 충주(중원), 음성, 청원,등지로 분산 도피하는 사태가 빚어진것일 것이다.
청원군 가덕면 과 청원군 미원면 종암리 분령종회의 입향조이신 (諱) 상일 선조님께서는 숙종(肅宗)17년(1691:辛未)11월1일에 양성(용인)에서 출생하시어 37살 되던해인 영조(英祖)3년(1727:丁未)에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급제하시고, 영조(英祖)24년(1748:戊辰)11월18일에 壽 58歲로 돌아가셨는데 진사시에 급제 하셨을당시 방목의 기록을 보면 영감하(永感下)라고 기록한것을 보면 부모님 두분이 모두 돌아가신 것으로 나타나 있다.
아버님이신(諱)두서(斗瑞)公의 관직은 대구진관병마절제도위(大丘鎭管兵馬節制都尉:종6품), 통훈대부[(通訓大夫:문관(文官)의 정3품(正三品) 당하관(堂下官)]의 품계(品階)로 나타나 있으며, 언제부터 청원군 가덕면으로 오신것에 대하여서는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청원군 가덕면 병암리에서 세거하시다가 그 손자 되시는 (諱) 수정(수정)선조님께서 다시 더 후미진 산골짜기인 청원군 미원면 종암리 로 옮겨 세거하셨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종인들은 한때 미원면 종암리 에 약12가구 70여명이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한적도 있었다. 현재는 1가구만 남아 세거하고 있으며, 청주등지와 서울 인천 수도권 등지에 산재하여 세거하고 있다. ☞ 입향조이신(휘)상일 선조님의 시제 향사일은 매년 음력 10월15일 이다. ※전한공파 분령종회 회장: 상섭(相燮) 유사: 병호, 총무: 재철